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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 SF 미스터리 ㅣ 나비클럽 소설선
천선란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2년 1월
평점 :
우주적 상상력의 SF를 배경으로, 찰나의 반전으로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미스터리의 향연을 통해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장르적 쾌감을 즐기시기를 바란다.
- p.304 기획 후기 中
9명의 SF, 미스터리 장르 작가들의 단편 모음인 『2035 SF 미스터리』. 이전에 작품을 읽어 본 작가들도 있어서 여러 가지로 기대가 되었는데 다 읽고 나니 기억에 남는 건 새롭게 접한 작가들의 단편이었다. 이런 게 또 앤솔로지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 아무도 모르는 죄의 무거움 - 「고난도 살인」
메타버스에 대한 투자로 부자가 된 순석은 나날이 발달하는 과학 기술 덕분에 해결되는 미제 사건들을 보고 혈육을 만들지 않기 위해 결혼, 연애까지도 포기하고 살고 있었다. 이대로 살면 어려운 시절에 저절렀던 범죄는 그대로 묻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남긴 오래된 사진 속 육촌 형제의 발견은 그에게 엄청난 공포를 선사한다. 육촌 형제인 성준이 교도소에 가거나 DNA 검사를 받아 혈육 찾기라도 시도하면 미제 사건의 DNA와 대조를 통해 본인의 평온한 일상도 끝난다는 데 생각이 미친 순석은 성준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기로 하는데...
실제로 친인척의 DNA를 통해 해결되는 범죄를 본 적이 있어서 소재 자체를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설마설마하던 예상이 맞아들었던 반전의 순간에는 웃음이 났고, 다시 머리를 굴리는 순석에게 해피엔딩이 올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용케 과거의 범죄를 들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면 좀 착하게라도 살지. 과거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게 당연하다고 보면 순석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건 필연적일 수도 있겠다.
순석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메타버스 속에서와는 사뭇 다른 실생활의 모습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가상현실 속의 나를 실제와 얼마든지 다르게 꾸며낼 수 있기에 이것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쓰이는 댓글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 그럴만했던 죽음 - 「억울할 게 없는 죽음」
규나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동생 규빈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엄마의 등쌀에 한겨울에 사람들이 꺼리는 난민촌을 방문하게 된다. 자신을 스토킹하던 직장 상사가 일으킨 사고로 의수와 의족을 장착한 채 평생의 꿈도 잃게 된 규나보다 늘 아들인 규빈이 우선이었던 엄마는 단순 사고라는 경찰의 말을 믿지 않는데... 난민촌에서 만난 흥신소 할머니와 청년은 규나에게 예상치 못한 다정한 환대를 건네고, 규빈이 협박 받고 있다고 얘기하며 살인 청부를 문의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건 세상 낙담할 일만 남은 거 같은 규나가 보여주는 안정감 때문이었다. 스토킹을 당해 사지가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는데 그게 업무상 과실이라고 주장했던 피의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게다가 엄마라는 사람은 규나가 팔다리를 잃어 생긴 돈으로 아들 규빈을 어학연수 보내고, 규빈의 죽음에 계속 한탄하며 몸이 불편한 딸이 기어코 택시 기사들도 꺼려 하는 난민촌으로 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흥신소 할머니의 말처럼 규나는 규빈과는 달랐다. 단순히 태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규빈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이 바로잡을 수 있는 여지까지 고민할 줄 알았다. 이에 비해 덩치 큰 백수에 툭하면 시비에 휘말리던 규빈은 사고로 죽은 게 다행이지 않을까?
| 일급 AI 휴먼의 등장 -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
깨끗하고 풍족한 환경의 제네시스 돔, 그 안의 생활자와 그 밖의 생활자로 구분되어 있는 세상. 일급 탐정 채휘는 잃어버린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난민이라고 주장했던 의뢰자 찬카가 사실 초상위 클래스 제네시스 그룹의 일원인 걸 알아챈 채휘는 의뢰 수락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찬카와 함께 다니는 AI 휴먼 구잔의 칩 속에 감시 코드가 있었던 걸 발견한 이들은 난민 막사의 취재진 중 감시자를 찾아 딸의 납치범이 누구인지 알아낸다.
마지막 채휘가 자신의 정체를 자각하는 부분 덕분에 이 이야기가 한층 흥미롭게 느껴졌다. 의뢰를 받고 일행과 같이 난민 막사로 가면서 난민들의 현실, 그들을 돕기 위해 찬카와 친구들이 진행하고 있는 연구, 그리고 그 연구의 상용화를 막는 인간의 욕심까지 보고 들은 채휘가 결국 깨달은 본인의 정체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 선택하는 채휘의 모습까지, 초반에 탐정물로 생각했던 나는 전혀 다른 장르로 전환된 거 같은 후반부가 기억에 남았다.


위에서 언급한 3편을 포함해서, SF와 미스터리 어느 쪽의 팬이더라도 즐겁게 읽어낼 수 있는 9편의 작품이었다. 수록작 중 천선란 작가의 「옥수수 밭과 형」, 황세연 작가의 「고난도 살인」은 드라마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니 영상으로 구현될 모습도 기대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앤솔로지의 기획 후기 부분에 내가 좋아하는 랜달 개릿의 다아시경 시리즈가 언급되어서 좋았다. 행복한 책읽기에서 출간된 3권의 책을 끝으로 더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쉬운데 SF와 미스터리 팬이라면 요 작품도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