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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6년 10월
평점 :
멸망의 날을 믿는 종교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그날을 준비해왔다. 하지만 예언의 그날은 그냥 지나갔고,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부정하기보다는 그날이 언젠가 올 거라거나 자신들의 믿음과 행동에 신이 감복하여 멸망을 실행하지 않기로 했다는 해답(?)을 내놨다. 이런 사례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잘 바뀌지 않는다, 바뀌기 어렵다는 증거로 자주 사용된다.
소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주인공 혜령이 운 좋게 로또에 당첨된 시점에 엄청난 지진으로 인간 세상의 종말을 경험하면서 시작된다. 혜령은 종말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남편과 사별하고 결혼해서 독립한 딸 이레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60대 여성이었다. 지진이 났을 때 봉산에 있던 혜령은 산을 내려가던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고 홀로 산을 다시 올라와 전망대 근처의 짓다 만 화장실에 몸을 숨긴다. 지진과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 세상에서 다른 생존자를 찾지 못했지만, 괜찮다는 메시지를 남긴 이레를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잔해 속에서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삶을 지속한다.

| 생존과 공존의 자세
홀로 지낸 지 17년 만에 혜령은 캠핑카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바를 만난다. 혜령의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생존을 위한 고단함에 공감하며 따라가던 이야기는 노바를 만난 시점에 홀로 돌봄에서 서로 돌봄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따뜻함을 안겨 준다. 혼자도 잘 살아남았던 두 사람이지만, 둘이 되면서 서로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가며 따로 또 같이 흐뭇한 생존을 이어간다.
이후에 만난 윤주와 안섭은 이야기의 분위기를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 멸망의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안섭의 재력으로 맺어진 일종의 고용 관계인 두 사람은 복구될 세상에서 여전히 금, 보석, 돈 등이 중요할 거라는 윤주의 부질없는 믿음으로 유지되는, 보는 사람도 불편한 동거를 유지하고 있다. 노바에게 했듯 마음을 썼던 혜령마저 윤주에게는 단호하고 다르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자기 말밖에, 자기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은 세상이 달라져도 똑같다는 걸 윤주가 보여준다. 사전 양해도 없이 혜령과 노바의 주거지를 막무가내로 찾아왔을 때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생존자 영락은 점차 복구되는 자연의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고립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며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열심이다. 이레를 만나야 하는 혜령, 그리고 안섭과 지금의 생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윤주는 영락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노바는 새로운 길이 발견되어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더불어 지체 장애인 안섭은 새로운 길로 떠날 때 몸이 불편한 자신이 버림받을 거라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삶의 의지가 인간의 본능이라면, 공존은 어떨까? 공존도 인간의 본능일까?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이지만, 자신을 구해준 순간까지 적반하장으로 구는 윤주를 보고 있으니 공존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피하는 게 상책인 상황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
역 오거리에 있던 유명 탕수육 가게 앞을 지나며 새삼 아쉬움이 들었다. 먹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항상 다음으로 미뤘다가 끝내 먹어보지 못했다.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왜 매번 미뤘을까. 아마도 언제든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이런 미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일 따위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어진 이 순간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이제 안다. 다들 내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무릎이 망가지기 전에 부지런히 여행도 다니고 치아가 약해지기 전에 먹고 싶은 것도 다 먹어보라고. 그래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中 p.140~141
혜령은 혼자 있을 때 영화를 봤다고 했다. 옛날 일들이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다고... 아마도 그 안에서 미처 해보지 못한 일들도 계속 생각이 났을 거다. 다음이라는 말로 미뤄두었던 온갖 사소한 일들이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기에 혜령은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일들을 실행해야 함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느끼고 있을 거였다. 그리고 그러기에 노바에게 더 마음을 쓰고, 생존을 위한 활동뿐 아니라 영락과 함께하는 길 찾기에도 열심일 수 있지 않았을까.
뭔가를 하고 싶은 이유만큼 할 수 없는 이유도 따라붙는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큰일이었던 것 같던 그 이유들이 별거 아닐 때가 많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해보라고 이야기 속에서 혜령도 말해주고 있는 거 같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의 배경은 은평구다. 낯익은 장소, 가게, 지명들이 12살부터 이곳에 살았던 나에게 더 큰 친숙함과 즐거움을 준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혜령이 머물고 채집 활동을 다니던 곳, 윤주와 안섭, 노바의 근거지 등을 그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 본 도서는 아카 @aka_book_의 모집으로 자음과모음 @jamobook 출판사에서 도서는 보내주시고 #SF탐사단 에서 함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