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테크의 시대
이진우 지음 / 다산스마트에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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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학교 실습실에 가득했던 아이맥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애니메이션을 배우면서 접했던 아이맥은 기존에 사용했던 데스크톱과 비교해 남다른 컬러풀함과 전혀 다른 운영체제로 신세계를 보여줬지만 개인적으로 구매해서 사용하기에는 기기 자체와 거기에 깔아야 하는 맥용 프로그램들의 비용까지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맥이 가득한 고등학교 실습실이라니...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구나 했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1인 1대의 디지털 기기를 보급하는 시대란다. 이건 또 다른 신세계다. 주변에도 물어보니 디벗(digital+벗)이라는 기기를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서 집에서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기기인지 직접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른 아이들과 공유하지 않는, 졸업할 때까지 나만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기기를 가지고 있다는 거 자체가 놀라웠다. 그리고 아이들은 대체 그 기기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경쟁력은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적에서 중요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기가 끊기거나 인터넷이 막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 학생들의 읽고, 쓰고, 생각하는 기본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도록 돕고 그 위에 기술적 수단을 활용하여 개인적 적성, 흥미, 달란트에 따른 개인화 교육이 이뤄지도록 기술의 사용을 디자인해야 한다.

- 『에듀테크의 시대』 中 p.403


『에듀테크의 시대』는 크롬북의 기획자인 저자가 코로나로 급물살을 타게 된, 전에 없던 기술의 학교 적용 현장에서 느낀 점들을 바탕으로 기술의 적용에 앞서 충분히 고려되고 고민되어야 하는 부분과, 그 단계,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려되는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교육에 기술이 함께하는 것이 필연적인 변화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교육의 근간은 인간을 인간답게 키워내는 것, 무엇보다 그것이 기술의 적용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라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내용 안에서 기술의 교육 현장 적용 사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랐던 마음이 커서 아쉬움이 좀 남았지만, 이 책은 기술의 현장 적용 이전에 관련 실무자들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들이 같이 읽으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분야에서 기술의 장점이나 적용과 관련된 긍정적인 사례 중심의 책들을 볼 때,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우려를 한 번씩 느꼈었다. 기술은 계속 점점 빠른 속도로 발달해 왔고, 인간 역시 더 빠른 속도로 그 기술을 소비하는 방향으로 질주해왔다. 좋은 점을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좋지만, 우리가 기술의 발전으로 감당해야 하는 어두운 지점에 대해서도 이젠 많은 고민을 해야 되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현재의 기후위기도 고민 없이 소비된 기술의 부정적인 영향 중 하나라고 생각되니 말이다.

교육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키워내는 게 메인이라면 그 어떤 일보다 기술의 적용과 이로 인해 야기될 여러 가지 결과에 대한 시뮬레이션과 신중한 논의가 필수적일 거 같다. 기술은 이미 넘쳐나서 일상 속에서도 따라잡기 벅찰 지경이다. 교육에서의 기술이라면 특히 그런 벅참으로 인해 소외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런 부분에 대해 환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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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라진 날
할런 코벤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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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을 때 재미있는 장르소설을 읽겠다는 소망에 여러 책 이름을 찍어갔었다. 그리고 다 검색해서 청구기호를 출력했는데 막상 찾고 보니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몇 권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할런 코벤의 신작이 있을까 싶어 검색하다 대출 중이라 좌절하고, 다른 책을 찾으려던 책장에서 운 좋게 이 책을 발견했다. 대출 중이라던 책이 왜 책장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할런 코벤이면 기본은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빌렸다.



뉴욕에서 세 아이,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잉그리드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사이먼의 삶은 큰 딸 페이지가 마약 딜러 에런과 엮이면서 달라진다. 마약에 중독되어 결국 대학교도 그만두고 사라진 페이지를 계속 찾아다니던 사이먼은 센트럴파크에서 버스킹 하던 페이지를 만나지만 에런의 방해로 노숙자를 폭행한 부유한 파렴치한이 되어 경찰에 연행된다. 폭행 혐의를 벗은 며칠 후, 에런이 살해되었다며 경찰이 찾아오고 잉그리드와 사이먼은 직접 페이지를 찾기로 하고 페이지가 에런과 같이 살던 아파트(범죄 현장)를 찾아가게 된다. 건물주인 코닐리어스는 페이지를 마지막 본 날, 그녀가 에런에게 폭행당한 거 같았다는 얘기를 해주고 페이지가 자주 가던 마약상 로코의 은신처를 알려준다. 로코를 찾아가서 페이지에 대해 추궁하던 중 잉그리드가 로코의 마약 딜러가 쏜 총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빌린 당일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속도감이나 몰입감이나, 미국 3대 미스터리상을 모두 수상한 최고의 작가, 넷플릭스에서 자신의 작품 총 14편을 영상화하는 프로젝트의 제작자 겸 총괄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답게 역시나 기본은 하는 할렌 코벤이었다.

사랑하는 딸 페이지를 찾으려 사건을 파헤치는 사이먼, 실종된 부잣집 도련님을 찾는 탐정 엘레나, 그리고 '진리의 안식처'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지시를 수행하는 디디와 애시, 전혀 접합점이 없을 거 같던 세 그룹의 이야기는 후반부에서 만나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게 된다.

본인은 전혀 몰랐으나 모든 비밀의 키는 사이먼의 아내 잉그리드가 쥐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방황이 어떤 비극을 가져오게 될지 그녀가 예상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잉그리드가 사랑하는 사이먼에게 철저히 숨기고 동생인 이본에게 반드시 비밀로 지켜달라고 했던 그 일이 사이먼과 페이지가 겪은 아픔, 그리고 본인이 사경을 헤매게 되는 원인으로 스스로에게 돌아온 셈인데 이런 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정말 용서가 안 되는 건 '진리의 안식처'라는 사이비 집단이다. 그 집단의 청부를 성실히 수행하는 디디와 애시를 보면 솔직히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이렇게까지 한다고 싶은, 억지스러운 마음도 드는데 인간이란 생명체가 좋든 나쁘든 갈 데 없는 극한까지 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니까... 

사이비 종교 집단과 얽혀 시작된 사이먼 가족의 슬픔은 페이지를 찾게 되고, 잉그리드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 끝난 듯 보이지만 독자들은 알게 된다. 이 가족에게 진짜 고통과 어둠은 지금부터, 잉그리드가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던 비밀을 사이먼과 페이지가 공유하게 된 지금부터 시작될 거라는 걸 말이다. 

사이먼은 페이지를 찾으면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에게 감췄던 비밀을 알아낸다. 마지막 잉그리드의 비밀은 끝까지 몰랐으면 좋았겠지만 경찰보다 더 집요하게 페이지의 여정을 찾아가던 사이먼이 그렇게 두지를 않았을 거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던지게 되는 질문,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어디까지,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가'


『네가 사라진 날』 中 p.10


+ 뉴욕 센트럴 파크의 벤치는 큰돈을 기부한 사람들에게 헌정된 거라 개인 명판이 저런 글귀를 담고 붙어 있단다. 여기서 다시금 나는 과연 뉴욕에서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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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플레이스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타나 프렌치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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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일요일에 총 3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었다. 그중에 두 권이 장르소설이었는데 요 『시크릿 플레이스』는 정기구독했던 『미스테리아』에서 알게 된 작품이었다. 대여해 온 두 권 중에 이게 더 읽는 데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그대로 맞았다는... 학생 대부분이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인 사립 여학교 세인트킬다의 미해결 사건을 풀어내는 여정은 한 번에 쭉 읽어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1년 전 세인트킬다의 교정에서 붙어있는 남학교 세인트컬름의 학생 크리스 하퍼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금방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던 사건은 조사를 거듭할수록 모든 용의자가 제외되는 상황으로 흐르고, 결국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된다. 아버지가 형사인 여학생 홀리는 교내 대나무숲 역할을 하는 게시판 시크릿 플레이스에서 '난 누가 그 애를 죽였는지 알아'라는 글씨가 오려 붙여진 크리스 하퍼의 사진을 발견하고 미제사건수사과의 모런 형사에게 가져온다. 이게 미제사건수사과를 벗어날 기회라고 생각한 모런 형사는 1년 전 책임자였던 살인수사과 콘웨이 형사에게 협업을 제안하고 세인트킬다로 향한다. 


『시크릿 플레이스』 中 p.312


두 형사는 먼저 시크릿 플레이스에 크리스의 사진을 붙일 수 있는 여학생들을 추려 낸다. 학교에서 여왕처럼 행동하는 조앤의 무리 4명, 그리고 제보자인 홀리와 친구들 3명, 이렇게 총 8명의 학생이 가능했다는 걸 알아낸 모런과 콘웨이는 그들을 따로 또 같이 만나보면서 1년 전 진실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야기는 1년 전 크리스가 죽었던 즈음의 과거와 사건을 새롭게 조사하는 현재 두 형사의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되는데 그 안에서 모든 등장인물이 꾸는 동상이몽이 독자들 앞에서만 드러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관계 등에 있어서- 특별함을 꿈꾼다. 아마 그런 마음이 정점에 달하는 시기가 10대가 아닐까 하는데 홀리와 친구들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준 건 자신들의 관계를 특별한 걸로 만들려는, 아니 그렇게 믿는 유달리 강한 유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홀리가 아버지인 매키 형사 앞에서 그 애들이 바로 내 가족이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서도 잘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이 특별하다는 착각이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도... 나 혹은 우리의 특별함에 눈이 멀면 다른 걸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크리스라는 첫사랑을 맞이한 설리나의 마음을 살피기보다는 자신들의 특별한 관계가, 우리라는 특별한 존재가 어떻게 될까 봐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만 갇혀버린 홀리, 줄리아, 베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4 사람이  조앤의 무리처럼 적나라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소통할 줄 알았으면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크리스가 설리나의 머리에 손을 넣어서 들어 올리자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떨어졌다. 설리나는 크리스의 팔에 입술을 대려고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마치 수중 댄서 같았다. 시간이 오직 둘만을 위해 멈추고 일 분 일 분이 그들에게 백만 년을 주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시크릿 플레이스』 中 p.344


크리스가 설리나의 마음과 같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줄리아, 홀리의 우려, 조앤 무리들의 험담처럼 크리스에게 설리나는 그저 며칠의 즐거움 뒤에 차버릴 전리품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이 진짜 끝까지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그저 그런 예상일뿐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친구들과의 맹세와 첫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비극적으로 크리스를 잃은 설리나의 영혼 없는 모습이다. 자신들은 다르다고 믿었지만, 결국 그들은 아무도 지키지 못했고 그렇게 견고하다고 믿은 관계까지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홀리가 자신과 친구들을 가족이라고 묶은 순간부터 예견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가깝고도 먼, 너무 사랑하지만 때로는 벗어날 수 없어 환장할 거 같은 가족 말이다. 이 소녀들에게는 '가족 같다'가 아니라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평범하게, 다소 유치할지라도 원초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더 좋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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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문학동네 청소년 68
문이소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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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이 바로 이야기라서 일 거다. 때로는 가슴 아리고 슬픈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배 찢어지게 웃어서 눈물 나는 이야기일 때도 있다. 매일이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은 그런 일상의 작은 변화로 나름의 모험을 겪는 (범상치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소녀 농부 깡지와 웜홀 라이더와 첫사랑 각성자」, 「젤리의 경배」, 「유영의 촉감」, 「이토록 좋은 날, 오늘의 주인공은」,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 이 총 5편의 이야기는 제목만 보고는 대체 무슨 내용인지 정말 가늠이 안 되었다. 왠지 『오즈의 마법사』가 연상되었던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은 아무런 유사점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우선 제목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보고 그게 철저하게 배신당하는 경험을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 '나'로 살아가는 모두를 응원해


"누구긴요, 나한테지. 내가 나로 살아봐서 아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내가 보기보다 거칠게 살았답니다."

- 「젤리의 경배」 中


가끔 일을 하거나 뭘 만들거나 하면서 한 번씩 깨닫는다. '나로 사는 거 참 피곤하구나'라고... 특이점이 온 자아를 갖게 된 초지능 AI를 만난 -그저 좋아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고단한 작가-젤리는 죽을 때 '비명 대신 자신에게 고맙다고 인사할 수' 있도록 앞으로 열심히 제대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그래, 우리 모두는 그럴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을 거다. 특히 「젤리의 경배」는 그런 나를, 당신을 응원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 다정함을 잃지 말아 줘


놀랍게도 슁젠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다. 자신의 생김새를 보려면 굴곡 없이 매끄럽게 빛을 반사시키는 '거울'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타 개체의 꼬라지에 대해 말이 많은가 보다. 본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할수록 타 개체에 대해 쉽게 떠드는 법이다.

- 「유영의 촉감」 中


스무 번째 나는 열아홉 번째 내가 남긴 '유영의 촉감'이라는 기억을 계승하여 온전한 내가 되려는 여행을 떠난다. 다양한 생명이 들끓고 있는 행성에 도착하여 생명체에게 슁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탐험하던 중 예기치 않게 유영을 만나게 된다. 자신이 만난 유영이 선대가 남긴 유산과 관련이 있는지에 집중하던 나는 그녀 덕분에 촉감뿐 아니라 다채로운 감정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함께'라는 걸 깨닫는다. 


난 인간이란 본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간사한 존재이며, 자기보다 약한 것에는 무한히 잔혹하게 구는 존재임을 증언했다. 배신과 망덕은 인간의 특성 아닌가. 하지만 여사는 한때 나의 주인이었던 인간이 대걸레 마녀는 아니지 않냐며, 모든 인간을 똑같이 생각해선 안 된다고 했다.

-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 中


봉지 기사는 출산 중에 사망한 누더기 여사의 살아남은 막내를 대걸레 마녀가 데려가자 다시 한번 인간에 대한 회의와 배신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막내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 수리 기사로 위장하여 마녀의 집에 잠입한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캐릭터들의 정체를 제대로 알게 되는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은 단편적인 경험 때문에 몸도 마음도 뾰족해지지 말라고 말하는 거 같다.



인간은 거울이 있어야만 자기를 온전히 볼 수 있는 주제에 타인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떠든다. 더불어 상처와 슬픔의 되새김질로 스스로를 옹졸하고 편협한 시선에 갇힌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정함과 배려로 진화의 정점에 오른 종이다. 그런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좋은 점들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두에게 기운을 잃지 말라는 따뜻한 격려를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를 '낭만 채집가'라고 말하는 문이소 작가의 이 책은 여러 가지 어지러운 감정을 소소한 이야기, 대책 없는 낙관과 긍정으로 잠재우고 싶은 순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국가 기밀로 두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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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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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를 좋아해서 한 번씩 좀 다르게 쓰인 관련 책이 나오면 눈여겨보게 된다. 그래서 『고전환담』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역사적 팩트와 픽션을 적절히 섞어 엮어낸 이 단편 모음집 안에서 우리는 잘 알려진 이순신, 세종, 황진이, 대원군 등을 만날 수 있는데 정말 흥미를 자극하는 지점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주변 인물들-그들을 사랑했거나 증오했거나 아꼈던-을 주인공으로 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불어 그냥 이름 모를 조정 신료, 민초들로만 넘겼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접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각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어떤 인물이 실제하고 어떤 인물이 창조된 것인지를 정리한 작가의 친절한 코멘트도 읽을 수 있다. 그 속에서 흔하게 접해서 역사적 사실처럼 이야기해 온 것들 중에 잘못 구전된 부분들도 알 수 있다.



"땅이 척박해서도, 종자가 약해서도, 부처의 가호가 미미해서도 아니라네. 그대의 마음이 준비가 안됐을 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외톨이가 아니어서 아승기阿僧祇의 다른 세상들과 겹쳐지며 제각각 서로를 비추고 또 되비추고 있다네. 이것이 화엄경의 인드라망 우주일세."

- 『고전환담』 中 p.139


당나라 유학을 가던 원효와 의상을 설화 속 인물 사복과 엮어낸 단편에서 위의 원효의 말을 보면서 다중우주가 떠올랐다. 원효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고사가 실증적으로 사실이 아니며 불가능한 가설이라고 한 작가가 당나라 유학을 중도 포기한 원효의 입을 빌려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교차할 때 고 좁은 틈으로 억만 겹 대우주의 법계를 엿보면 그게 성불'이라고 한 게 재미있었다. 원효가 그 옛날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


"말을 마음에만 품고 산다면 그게 지옥인 거다. 말로 못 할라치면 글로라도 써서 뜻을 전해야 할 것 아니겠느냐? 글이 사람을 해치기라도 한다더냐? 짐승 아닌 사람일진대 아무리 어리석어도 글을 쓸 줄은 알아야 하는 법이다. 백성들이 갇혀 있는 무명無明의 지옥을 우리가 깨뜨릴 것이다."

- 『고전환담』 中 p.233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많은 신료들의 반대가 컸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의 신념에 동화되어 열성적인 지원자가 된 딸 정의공주의 편지를 통해 한글 창제와 그에 관련된 학자들,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새삼 한글에 대한 애정을 샘솟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성심껏 도왔지만, 그저 혼이 맑은 착한 아들이었던 문종이 더 안타깝기도 했다.



" 그래, 놀자! 내 마음이 별거가? 그게 네 마음이고 세상 마음이고 또 부처의 마음 아니겠노? 그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카기도 하고 여래장如來藏이라 카기도 하는 기다. 뭐 알 거 없다. 그런 구별이 무슨 소용 있겠노? 놀아보자. 세상살이가 한바탕 즐거운 놀이인 것을 어리석은 내가 허욕에 눈멀고 귀먹어 인상 쓰고 있었구나."

- 『고전환담』 中 p.142-143


『고전환담』은 '전쟁과 혁명', '현장의 미스터리', '시간을 초월한 사랑', 이렇게 총 3부로 나뉜다. 그중에 3부 '시간을 초월한 사랑'에서 아는 역사적 인물을 제일 많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인지도와 관계없이 이런 상상도 가능하겠다는 마음으로 읽다 보면 더 집중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그런 구별도도 별 필요가 없다. 낯설면 낯선 대로 친숙하면 친숙한 대로 이 이야기들을 그냥 한바탕 마음껏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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