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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역사 이야기를 좋아해서 한 번씩 좀 다르게 쓰인 관련 책이 나오면 눈여겨보게 된다. 그래서 『고전환담』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역사적 팩트와 픽션을 적절히 섞어 엮어낸 이 단편 모음집 안에서 우리는 잘 알려진 이순신, 세종, 황진이, 대원군 등을 만날 수 있는데 정말 흥미를 자극하는 지점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주변 인물들-그들을 사랑했거나 증오했거나 아꼈던-을 주인공으로 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불어 그냥 이름 모를 조정 신료, 민초들로만 넘겼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접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각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어떤 인물이 실제하고 어떤 인물이 창조된 것인지를 정리한 작가의 친절한 코멘트도 읽을 수 있다. 그 속에서 흔하게 접해서 역사적 사실처럼 이야기해 온 것들 중에 잘못 구전된 부분들도 알 수 있다.

"땅이 척박해서도, 종자가 약해서도, 부처의 가호가 미미해서도 아니라네. 그대의 마음이 준비가 안됐을 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외톨이가 아니어서 아승기阿僧祇의 다른 세상들과 겹쳐지며 제각각 서로를 비추고 또 되비추고 있다네. 이것이 화엄경의 인드라망 우주일세."
- 『고전환담』 中 p.139
당나라 유학을 가던 원효와 의상을 설화 속 인물 사복과 엮어낸 단편에서 위의 원효의 말을 보면서 다중우주가 떠올랐다. 원효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고사가 실증적으로 사실이 아니며 불가능한 가설이라고 한 작가가 당나라 유학을 중도 포기한 원효의 입을 빌려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교차할 때 고 좁은 틈으로 억만 겹 대우주의 법계를 엿보면 그게 성불'이라고 한 게 재미있었다. 원효가 그 옛날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
"말을 마음에만 품고 산다면 그게 지옥인 거다. 말로 못 할라치면 글로라도 써서 뜻을 전해야 할 것 아니겠느냐? 글이 사람을 해치기라도 한다더냐? 짐승 아닌 사람일진대 아무리 어리석어도 글을 쓸 줄은 알아야 하는 법이다. 백성들이 갇혀 있는 무명無明의 지옥을 우리가 깨뜨릴 것이다."
- 『고전환담』 中 p.233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많은 신료들의 반대가 컸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의 신념에 동화되어 열성적인 지원자가 된 딸 정의공주의 편지를 통해 한글 창제와 그에 관련된 학자들,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새삼 한글에 대한 애정을 샘솟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성심껏 도왔지만, 그저 혼이 맑은 착한 아들이었던 문종이 더 안타깝기도 했다.

" 그래, 놀자! 내 마음이 별거가? 그게 네 마음이고 세상 마음이고 또 부처의 마음 아니겠노? 그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카기도 하고 여래장如來藏이라 카기도 하는 기다. 뭐 알 거 없다. 그런 구별이 무슨 소용 있겠노? 놀아보자. 세상살이가 한바탕 즐거운 놀이인 것을 어리석은 내가 허욕에 눈멀고 귀먹어 인상 쓰고 있었구나."
- 『고전환담』 中 p.142-143
『고전환담』은 '전쟁과 혁명', '현장의 미스터리', '시간을 초월한 사랑', 이렇게 총 3부로 나뉜다. 그중에 3부 '시간을 초월한 사랑'에서 아는 역사적 인물을 제일 많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인지도와 관계없이 이런 상상도 가능하겠다는 마음으로 읽다 보면 더 집중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그런 구별도도 별 필요가 없다. 낯설면 낯선 대로 친숙하면 친숙한 대로 이 이야기들을 그냥 한바탕 마음껏 즐겨보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