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숲속 도서관의 사서입니다 - 치유의 도서관 ‘루차 리브로’ 사서가 건네는 돌봄과 회복의 이야기
아오키 미아코 지음, 이지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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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도서관 사서로 오랜 기간 근무해 온 저자는 여러 요인으로 정신 질환을 앓게 되어 몸과 마음이 일시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 남편과 함께 히가시요시노무라로 이주하여 인구 1700명의 산촌, 숲속의 70년 된 고택에서 사설 도서관 루차 리브로를 개관한다. 이 책은 그 루차 리브로와 저자가 겪은 투병생활, 독서, 그리고 히가시요시노무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거의 마지막에 구입한 책이었는데 얇아도 빨리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독서와 책을 치유의 방법으로 이용하는 저자가 낡은 고택을 도서관으로 만들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 투병생활의 경험, 좋아하는 책 안에서 깨달은 것들에 대해 자분자분 꺼내놓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같이 읽고 싶은 책이 쌓여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왠지 이런 일들이 그 애를 가장 괴롭혀왔고, 그래서 입원까지 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몸이 아파 고통스러운 사람이 자신이 내는 조그만 소음이나 목소리까지 신경 쓰면서 고통을 자기 안에만 담아두려고 애써야 하는 걸까요? 그 애가 반사적으로 "죄송해요"라고 말하게 만들어온 사회가 그 애의 고통을 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사회가 깨닫지 못하면 수많은 고통이 구원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나는 숲속 도서관의 사서입니다』 中 p.119



직원들이 각자의 개성을 전면에 드러내며 알하기를 바라기에, 결국 나는 손님을 포기하게 만들기로 했다. 돈을 냈으니 이곳에서는 신처럼 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의 모든 서비스가 완벽할 것이며 언제나 판으로 찍어낸 것처럼 일률적으로 빈틈없는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을. ……나는 직원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우리 가게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니까 흔들리는 게 당연해.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당연히 있고, 손님이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뭔가 다르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는 게 원래는 당연한 일이지.

다나카 모토코, 『1층 혁명: 사설 마을회관 '카페 런드리'와 마을 조성』

- 『나는 숲속 도서관의 사서입니다』 中 p.94~95


도서관 공간에 규칙을 게시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던 저자는 관리의 측면에서는 장점이 있겠지만, 우리는 '관리보다 공간을 함께하고 싶'라고 이야기한다. 함께하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한 건 분명하고 효율성을 위해서는 게시가 당연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런 고민은 신선했다. 더불어 직원들을 위해서 손님을 포기하기로 했다는 '카페 런드리'의 이야기도 서비스라는 걸 제공하는 어떤 일이든 중심을 손님에 놓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이런 곳이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영화제 사무국에서 일할 때 축제를 진행하는 스태프도 즐거운 행사가 되면 안 되겠냐는 내 말에 그건 말 그대로 '꿈'이라는 반응이 돌아왔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 실무자의 편의를 고려해 주면 왜 안되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실무자를 위해서는 규칙의 게시가 더 좋은 방법인 거 같다. 규칙을 게시해 놓아도 제대로 안 보고 묻고 또 묻는 사람투성이일 테니까... 하지만 게시가 아니라 소통을 통해서, 관리자와 이용자의 구분 없이 운영되는 공간이 되게 하고 싶은 저자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딱 어떤 방법이 정답이라는 건 없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꾸려진 작은 도서관?, 서재?를 만들어 보고 싶다. 이것도 또 누군가는 그냥 마음만 갖고 있으라고 뼈 때리는 충고를 할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마음만 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또 모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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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 암, 도전, 진화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매혹적인 탐구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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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정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던 저자는 그 '암'을 정복하기 위해 의사가 되었다. 방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지만, '암'은 방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파고든다고 해서 정복되는 게 아니었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희망, 좌절, 연구, 공부, 고민, 깨달음의 지난한 기록이다. 그리고 이 지난한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결국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어떻게 죽을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살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나에게 얼마나 더 살 수 있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는 환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어보는 환자는 없었다. 어떻게 살지보다 얼마나 살지에만 방점이 찍혀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中 p.396


아직 암으로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 없는 나는 암 때문에 삶의 어떤 시기를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보냈을 저자가 과연 암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초반부 암과 관련한 다양한 유전자와 항암제 등의 꽤 전문적이고 의학적인 설명이 나왔을 때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알 수 있는 게 좋았고, 흥미로웠다. 암을 그저 질병의 위치에 두지 않고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본 중반부,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후반부를 지나면 정말 '암'이라는 걸 정복하고 싶어서, 그로 인한 고통에서 환자들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고 싶어서 오롯이 '암'에 대해 집중해온 한 사람의 절절함이 느껴진다. 



한두 명 살리겠다고 수백 명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 그래서 감염내과 교수님은 늘 원칙을 강조했다. 항생제를 원칙에 맞게 쓰는 것은 입원 환자 전체의 생명을 위해 중요하다. 눈앞의 환자 한 명을 살리려고 강한 항생제를 처방하려는 전공의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백 명의 환자를 살리기 위해 강한 항생제의 사용을 제한하려는 감염내과 교수님은 때때로 대치했다. 항생제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교수님을 매정하다며 원망하는 전공의도 있었다. 확실히 소선(小善)은 대악(大惡)을 닮아 있었고 대선(大善)은 비정(非情)을 닮아 있었다.

-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中 p.39


한 분야를 오래 진득하게 계속해온 사람은 뭔가를 단정 지어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못한다. 최근에 치매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교육을 받으며 보니 치매 관련 질환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 증상들도 여러 가지여서 강의하는 의사선생님은 어떤 한 증상으로 판단할 수 없고 다른 질병력 등 환자의 여러 부분을 고려해서 진단과 치료를 진행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거듭하셨다. 좀 명확한 게 있었으면 했던 나에게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였다. 아마 '암'에 대해 연구와 탐구를 지속해온 저자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런 저자가 만나왔던 멘토와 롤 모델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암'과의 고군분투 속에서 결국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거다.



인류의 진화와 번성 과정을 살펴보면 암의 징표를 그대로 따라간다. 암의 정의대로라면 인류는 지구에 정확히 암이다. 지구는 사람암 4기를 앓고 있다. 암 환자가 흔히 열이 나듯 지구도 인간들 때문에 열(지구온난화)이 나고 있다.

-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中 p.210


지구가 사람이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저자는 지구가 사람암을 앓고 있다고 했다. 시각을 달리하면 우리는 암세포인 셈이다. 그러면 우리가 겪는 기후 위기 같은 현상들은 지구 나름의 항암치료 방법일 수도 있겠다. 지구가 더 독한 치료제를 내놓기 전에 우리 스스로 암세포가 아닌 그냥 정상 세포가 되기 위한 변이(?)를 시작해야 한다는 걸 이 책에서도 깨닫는다. 

우리는 분열을 하는 세포로 구성된 존재이고, 엄청난 세포 분열 횟수에 대면 오히려 암에 걸리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란다. 세포 분열 중에 얼마든지 돌연변이가 나타날 수 있고, 그 변이가 살아남기 위해 면역체계를 교란하여 우리 몸에 적응하고 정착하면 그게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암 때문에 굳이 전생의 죄까지 흘러갈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몸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몸에 나쁜 일은 삼가는 것뿐(이거 단순하지만 중요하다)! '암'은 언제 정복될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분명한 건 우리가 이 싸움에서 계속 많이 패배할 거란 사실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렇더라도 배가 다시 고플 거지만 밥을 먹고 어차피 죽을 것이지만 오늘을 사는 것처럼, 패배할 예정이지만, 아마 이 싸움을 누구도 놓지는 않을 것이고 이것은 앞으로 더 많은 세기를 이어갈 승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거듭된 패배가 부디 누군가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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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 히치하이커와 동물학자의 멸종위기 동물 추적 프로젝트
더글러스 애덤스.마크 카워다인 지음, 강수정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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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책방에서 순전히 표지가 주는 분위기 때문에 골랐던 책,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는 베스트셀러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와 세계적인 동물학자 마크 카워다인이 함께 써 내려간 멸종위기 동물 추척기다. 

진지하고 무겁게 와닿아야 할 거 같은 이야기 속에 엉뚱하고 때때로 새털같이 가벼운 더글러스 애덤스의 모습에서 왠지 빌 브라이슨을 떠올린 건 나뿐인가? 이 세상이 덜 암울하기 위해서는 더글러스 애덤스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가 이미 2001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니... OTL



아이아이 여우원숭이로부터 시작된 멸종위기 동물 찾기는 코모도왕도마뱀, 북부흰코뿔소, 실버백마운틴고릴라, 카카포, 양쯔강 돌고래, 로드리게스큰박쥐 등을 직접 만나기 위한 긴 여정이 되어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중국, 모리셔스 등으로 이어진다. 더글러스와 마크가 멸종위기 동물을 만나러 가는 과정만 봐도 이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 수 있는 데다 한 가지 종을 지켜내기 위해 다른 종들에게 겪는 잔혹함(?) 때문에 씁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들을 지켜야 하는 건 그들이 멸종하지 않는 지구가 인간도 멸종하지 않을 수 있는 지구이기 때문이라는 건 너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들의 프로젝트가 모두에게 환대 받으며 원활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체계와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않아 곤란을 겪기도 하고, 때때로 일종의 투어리스트와 다를 바 없이 받아들여져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진심과 노력은 언어와 국적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는 가닿기에 두 사람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육체적, 물리적, 심리적 어려움을 헤치고 목표한 멸종위기 동물들의 생태를 거의 대부분은 직접 확인한다. 



나는 선교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기는커녕 두려움과 경계심이 앞선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무튼 영국 특유의 필요에 따라 영국 사람들이 발명해 낸 그 신을 믿지 않으며, 신도들에게 가발과 텔레비전 방송국, 그리고(이게 제일 중요한데) 수신자부담 전화번호를 안겨 주는 미국의 신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나는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그 믿음을 간직하고, 제발 개발도상국엔 수출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中 p.108


제목만큼 책이 우울하지 않은 건 이들의 더글러스 애덤스 특유의 위트 덕분이다. 여정 안에서 겪은 다채로운 웃픈 에피소드들이 이야기가 무겁게만 흐르게 두지 않는다. 중국에서 양쯔강 강물 안의 오디오를 수집하기 위해 필요했던 콘돔 구하기의 지난한 상황, 자꾸 이리로 저리로 사람을 이동시키면서 정작 필요한 절차는 밟아주지 않았던 공항 직원 때문에 난감했던 순간 등을 있는 그대로 솔직한 어투로 담아내는데 그게 오히려 웃음을 자아낸다.


"뭐든 가능하고 유전공학도 있잖아요. 우리 세대가 끝날 때까지 잘 지켜서 다음 세대에 넘겨주면, 새로운 도구와 기술과 과학이 개발되겠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좋은 상태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면서, 그들의 마음도 우리와 같기를 바라는 것뿐이에요."

-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中 p.235


사안이 심각한 만큼 이런 환경과 동물, 지구의 자연을 다룬 책들은 계속 나온다. 읽을 때마다 체감하는 위기감은 있지만 그래서 우리의 생활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잘 모르겠다'라는 게 슬프다. 요즘 찜통에 들어앉아 있는 거 같은 매일의 날씨에 인간의 멸망도 멀지 않았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매년 올여름이 가장 시원한 거라는 말이 진짜 와닿는데 이제는 정말 다 같이 뭘 해야 한다. 뭐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덜 가난하고, 덜 암울하고, 덜 쓸쓸할' 인간 자체가 없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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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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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은둔형 외톨이로 살던 셰바이천이 방에서 숯을 피우고 자살했다. 시신을 발견한 건 어머니 셰메이펑과 이웃이자 친구인 칸즈위안. 단순 자살 사건으로 종결하려던 경찰의 눈에 셰바이천의 옷장 속 토막 난 시신이 보존된 유리병 여러 개가 발견된다. 과연 단 한순간도 밖에 나간 적도 집에 손님을 들인 적도 없었다는 셰바이천이 살인범인지, 죽은 사람들의 신원과 살해 동기는 무엇인지, 어느 하나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 경찰에 대한 불신은 높아지는데... 셰바이천의 절친이자 장르 소설가인 칸즈위안의 작품에서 실마리를 찾은 쉬유이 경위는 그를 감시하고, 그러다 만나게 된 살해된 여성과 닮은 탄아이잉을 통해 수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경찰이 탄아이잉과 셰바이천의 삼촌인 셰자오후를 발견하면서 사건이 술술 풀려나가는 부분을 읽다가 문득 책 띠지의 홍보 문구를 보고 이게 아닌가 보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맞았다. 이렇게 큰(?) 스포를 띠지에 적어 놓다니! 

셰바이천은 외톨이가 아니었다. 기가 막히게 머리 좋은 든든한 친구 칸즈위안이 있고, 화재 현장에서 같이 친구를 구해낸 더듬이가 있었고, 손자에게 늘 미안함을 안고 살았던 외할아버지, 자신을 아껴주는 어머니가 있었다. 정말 고독하고 외로웠던 사람은 화재현장에서 하나뿐인 아버지를 잃고 세상과 단절을 택한 더듬이, 이민 간 영국에서 부모님을 모두 잃고 돌아와 할머니와 단둘이 생활했던 칸즈위안이 아닐까. 

그래도 이 세 사람은 함께여서 단절된 듯 단절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고 서로를 보호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쉬유이 경위에게 '돌아올 이유, 가족이 아무도' 없어서 홍콩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칸즈위안을 보며 소중한 모두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그의 회한 같은 게 느껴져서 살짝 울컥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영국에 사는 의사 친구에게 안부 전해달라며 전화번호를 전하는 쉬유이의 마음에 공감이 되었다. 힘들겠지만 쓸쓸하겠지만 어떻게든 살아달라는 부탁 같아서...


하지만 억지로 책임을 전가해서 얻는 위신은 거품일 뿐이라고, 쉬유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모래사장에 짓는 건물은 탄탄할 수 없다. 기초가 부실하면 높이 지을수록 점점 기울어지고 무너졌을 때 피해도 크다. 일시적인 안정을 추구하며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하다면 장기적인 안정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 『고독한 용의자』 中 p.386


"최선을 다했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말했죠? 당신과 당신 팀원들이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 믿더라도 경찰 시스템 전체가 그렇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진 않다고요. 시스템에 속한 모든 사람은 언제나 현실적인 선택을 하죠. 두 가지 선택지가 앞에 있을 때 자기 윤리 기준을 위배하지만 않는다면 리스크가 적은 쪽을 선택하는 게 인지상정이에요. 다만 이 평범한 선택이 쌓이면 '악'이 될 뿐입니다……. …

- 『고독한 용의자』 中 p.390~391


쉬유이 경위는 수사를 진행하면서 진실보다는 빠른 수습을 종용하며 이틀의 기한 뒤에는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셰바이천을 범인으로 발표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는다. 그런 지시에 부당함을 느끼고 고민하는 쉬유이와 칸즈위안의 대화에서 다시금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경찰 수사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실을 밝히는 것인가? 대중을 안심시키는 것인가? 우리가 가끔씩 선택하게 되는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이 쌓여서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꼬집는 칸즈위안의 말이 뼈아플 수 있을 거 같다. 


『고독한 용의자』는 짜임새, 몰입감 좋은 장르 소설이었다. 더불어, 그 안에서 사회 시스템에 던지는 질문이나 관계와 사람을 살피는 작가의 시선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마 누군가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면 쉬유이 경위처럼 '가족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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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체면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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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형사들>이라는 시리즈 프로그램이 있다. 현재 4시즌이 방송 중인데 방송 1회당 2건의 사건을 다룬다. 프로그램 안에서 사건 얘기가 마무리될 때쯤 MC들이 꼭 범인의 형량을 묻는다. 이때 거의 매번 탄식의 한숨이 터져 나오는데 법의 처벌이라는 게 그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는 대부분 한참 부족하다고 여겨져서다. 게다가 심신 미약, 반성문 등 형량 감소 요건은 어찌나 잘 이용되는지 듣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참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언가 변호사들이 떼로 나오는 프로그램에서도 대체 왜 이렇게 처벌 수위가 약한 거냐는 물음이 나온 적이 있었다. 출연진 중 누군가가 법의 주 소비 대상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이고, 그렇기에 가해자가 가중 처벌을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는데 중심을 둔다고 얘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변호사이자 추리 소설 작가인 저자의 단편 모음집인 이 책을 읽으면서 저 두 프로그램을 보며 떠올렸던 우리가 기대하는 법의 정의, 역할이라는 것에 대해 계속 곱씹게 되었다. 

법이, 처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수위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만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억울한 가해자 만큼이나 억장이 무너질 거 같은 피해자는 만들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닐까? 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법을 만들고, 집행한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추리와 SF가 적절히 섞인 수록작들은 본질보다 체면이 중요시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런 상황이 야기된, 혹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법의 본질뿐 아니라 삶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특히 표제작 「법의 체면」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복합적인 상황의 인물을 등장시켜 보여주는 법의 허점과 아이러니는 결코 아물 수 없는 피해자 가족들의 상처와 맞물려 긴 여운을 남긴다. 

누구도 해친 적 없지만 세상의 체면 때문에 자신의 천국을 잃게 된 어느 방송작가의 자살기 「당신의 천국」, 법 집행자와 가해자, 누구의, 무엇이 범죄인가를 묻는 듯한 「완전범죄」, 욕망을 채우는 허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아이러니를 그린 「애니」, 삶과 행복에 대한 블랙코미디 같은 「행복한 남자」, 「컨트롤 엑스」까지 총 여섯 편의 단편에서 작가가 직업적인 활동에서 느꼈던 고민, 괴로움, 그리고 이를 대하는 진중함과 그런 감정들을 승화시키는 방편인 듯한 상상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결백한 사람, 피해자는 법의 보호, 나아가 세상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 상황에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확실한 방지턱 같은 게 있어야 한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사회, 법이라면 그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다 같이 고민해 봐야 할 거 같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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