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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 암, 도전, 진화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매혹적인 탐구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1월
평점 :
폐암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정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던 저자는 그 '암'을 정복하기 위해 의사가 되었다. 방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지만, '암'은 방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파고든다고 해서 정복되는 게 아니었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희망, 좌절, 연구, 공부, 고민, 깨달음의 지난한 기록이다. 그리고 이 지난한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결국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어떻게 죽을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살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나에게 얼마나 더 살 수 있냐고 집요하게 물어보는 환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어보는 환자는 없었다. 어떻게 살지보다 얼마나 살지에만 방점이 찍혀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中 p.396
아직 암으로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 없는 나는 암 때문에 삶의 어떤 시기를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보냈을 저자가 과연 암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초반부 암과 관련한 다양한 유전자와 항암제 등의 꽤 전문적이고 의학적인 설명이 나왔을 때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알 수 있는 게 좋았고, 흥미로웠다. 암을 그저 질병의 위치에 두지 않고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본 중반부,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후반부를 지나면 정말 '암'이라는 걸 정복하고 싶어서, 그로 인한 고통에서 환자들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고 싶어서 오롯이 '암'에 대해 집중해온 한 사람의 절절함이 느껴진다.

한두 명 살리겠다고 수백 명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 그래서 감염내과 교수님은 늘 원칙을 강조했다. 항생제를 원칙에 맞게 쓰는 것은 입원 환자 전체의 생명을 위해 중요하다. 눈앞의 환자 한 명을 살리려고 강한 항생제를 처방하려는 전공의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백 명의 환자를 살리기 위해 강한 항생제의 사용을 제한하려는 감염내과 교수님은 때때로 대치했다. 항생제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교수님을 매정하다며 원망하는 전공의도 있었다. 확실히 소선(小善)은 대악(大惡)을 닮아 있었고 대선(大善)은 비정(非情)을 닮아 있었다.
-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中 p.39
한 분야를 오래 진득하게 계속해온 사람은 뭔가를 단정 지어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못한다. 최근에 치매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교육을 받으며 보니 치매 관련 질환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 증상들도 여러 가지여서 강의하는 의사선생님은 어떤 한 증상으로 판단할 수 없고 다른 질병력 등 환자의 여러 부분을 고려해서 진단과 치료를 진행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거듭하셨다. 좀 명확한 게 있었으면 했던 나에게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였다. 아마 '암'에 대해 연구와 탐구를 지속해온 저자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런 저자가 만나왔던 멘토와 롤 모델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암'과의 고군분투 속에서 결국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거다.

인류의 진화와 번성 과정을 살펴보면 암의 징표를 그대로 따라간다. 암의 정의대로라면 인류는 지구에 정확히 암이다. 지구는 사람암 4기를 앓고 있다. 암 환자가 흔히 열이 나듯 지구도 인간들 때문에 열(지구온난화)이 나고 있다.
- 『죽음은 직선이 아니다』 中 p.210
지구가 사람이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저자는 지구가 사람암을 앓고 있다고 했다. 시각을 달리하면 우리는 암세포인 셈이다. 그러면 우리가 겪는 기후 위기 같은 현상들은 지구 나름의 항암치료 방법일 수도 있겠다. 지구가 더 독한 치료제를 내놓기 전에 우리 스스로 암세포가 아닌 그냥 정상 세포가 되기 위한 변이(?)를 시작해야 한다는 걸 이 책에서도 깨닫는다.
우리는 분열을 하는 세포로 구성된 존재이고, 엄청난 세포 분열 횟수에 대면 오히려 암에 걸리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란다. 세포 분열 중에 얼마든지 돌연변이가 나타날 수 있고, 그 변이가 살아남기 위해 면역체계를 교란하여 우리 몸에 적응하고 정착하면 그게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암 때문에 굳이 전생의 죄까지 흘러갈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몸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몸에 나쁜 일은 삼가는 것뿐(이거 단순하지만 중요하다)! '암'은 언제 정복될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분명한 건 우리가 이 싸움에서 계속 많이 패배할 거란 사실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렇더라도 배가 다시 고플 거지만 밥을 먹고 어차피 죽을 것이지만 오늘을 사는 것처럼, 패배할 예정이지만, 아마 이 싸움을 누구도 놓지는 않을 것이고 이것은 앞으로 더 많은 세기를 이어갈 승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거듭된 패배가 부디 누군가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