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호프 자런 지음, 김은령 옮김 / 김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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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생태계 파괴, 에너지 자원 고갈 등은 환경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자주 듣거나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것도 최근이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심각하다고 회자되고 있는 주요한 이슈다. 그렇게 떠들어도 크게 달라진 게 체감되지 않는 이슈이기도 하다. ^^;;; (이 책을 읽으니 '파리기후협정'이니 그 난리를 피워도 왜 그게 체감되지 않았는지도 확실히 알겠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와 연구를 시작했을 때 희미한 북소리처럼 들리던 것이 이제는 내 머릿속에서 마치 주문처럼 울려 퍼지고 있다. 덜 소비하고 더 많이 나누라. 13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도록 해주는 마법 같은 기술은 없다. 소비를 줄이는 것이 21세기의 궁극적인 실험이 될 것이다. 덜 소비하고 더 많이 나누는 것은 우리 세대에게 던져진 가장 커다란 과제다.


-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中 p.127

 

이전에 방송에서 환경을 위해 에코백이나 텀블러를 사용하는 것을 두고 인터뷰하던 전문가가 솔직히 그것보다 육식을 줄이는 게 환경에 보다 도움이 된다고 했을 때 우리가 하는 다양한 환경 보호의 방법들의 실제 효과는 정말 어떨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데이터로 가득 차 있다.

전 세계 인구의 6분의 1이 전 세계 전기의 반을, 에너지의 3분의 1을 사용하며, 전 세계 이산화탄소의 3분의 1을 발생시키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인류의 10퍼센트에 의해 이루어지는 엄청난 식량과 연료 소비로 인해 나머지 90퍼센트의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제대로 공급되기가 지속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우리가 75억 인구가 매일 2,900칼로리씩 섭취할 수 있는 정도의 음식을 생산하고 있고 이것이 USDA(미국 농무부)가 제시한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1인당 에너지 필요량을 공급하고도 남는 정도임에도 기근은 전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덜 소비하고 더 많이 나누라"라는 저자의 말이 깊이 와닿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재생에너지를 다룬 챕터에서 풍력이나 태양열을 이용한 전력 생산의 적나라한 수치를 보고 좀 놀랐는데 지금 같은 에너지 사용량을 두고 이걸 원자력이나 화력이 아닌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것은 데이터만 봤을 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는 전인류의 적극적인 의지와 보다 직접적인 노력 없이는 우리는 -후손이고 미래고 상관없이- 지구가 가지고 있는 연료 자원을 빠르게 거덜 내는 삶으로 질주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 모든 문제의 가장 나쁜 부분은 이런 변화의 피해를 식량이든 에너지든 소비가 적은 실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지역이 더 먼저 별다른 대책 없이 겪을 거라는 점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구를 상대로 한 이 거대한 범죄(?)의 주범은 덜, 늦게 고통받는 - 어쩌면 고통받지 않을 수도 있는- 아주 부당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계속 상기시킨다. 우리는 강하고 또 운도 좋다고. 지구는 너무 적은 자원을 놓고 살아남으려 애쓰는 많은 사람들의 집이기도 하다. 우리가 식량과 안식처, 깨끗한 물을 누리는 집단이라는 사실은 지금껏 우리가 위태롭게 만들어온 세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中 p.234


자신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 가족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녹여 내어 그저 데이터 자료집처럼 읽힐 수도 있는 책을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것은 저자의 능력일 것이다. 대화의 사안은 중대하지만 무겁거나 어둡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지구와 인류를 놓고 절망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더 오래 살아남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3세대밖에 남지 않았다는 우리 인류에게 지금은 두려움에 떨며 포기해야 할 시간이 아니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변화해야 하는, 책임져야 하는 시간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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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 동네 주치의의 명랑 뭉클 에세이
추혜인 지음 / 심플라이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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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크리스마스에 니은 서점이 이벤트 중이었을 때 방문해서 2권의 책을 사고 부직포 파우치를 비롯한 선물도 받아왔다. (마스크팩까지 선물로 주실 줄은 몰랐다. ㅋㅋㅋ) 그때 구입한 책 중에 한 권이 바로 이 『왕진 가방 속에 페미니즘』이었다.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의 가정의학과 의사라는 저자의 이력을 보고 동네에 이런 데도 있었나라는 궁금증에 선택했는데 다 읽고 나니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이 병원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의사분 덕에 뭔가 든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공학도였던 저자는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다가 진로를 변경하여 의사가 되었다.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의대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다양한 경험, 그리고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고 '살림의원'에 근무하면서 만나고 치료한 사람들의 이야기, 왕진을 시작하게 된 이유 등을 이 책에서 듣게 된다. 더불어 더 나은 의사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고심하는 저자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여러 추천사 내용처럼 읽는 동안 눈물이 나기도 하고,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자기만의 싸움의 기술을 전수하거나 동네 목욕탕에서 맘 편히 씻지도 못하는 저자의 모습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3,200세대가 넘는 조합원들이 함께 의원, 치과, 건강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통합돌봄센터를 준비 중이라고 하는데 안심하고 나이들 수 있는 마을,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의료 관련으로도 협동조합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 무엇보다 이런 조합과 의원이 존재하면 더 이상 마음에 맞는 의사나 병원을 찾아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전에 우스갯소리로 다들 결혼 안 하고 혼자 살게 되면 한 건물에 모여살자는 둥, 아침마다 방문을 두드리는 정도로라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자는 둥의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마을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

영화에서나 봤던 왕진, 그런데 우리 동네에 왕진을 다니는 의사가 존재했다. 덕분에 몸이 불편하거나 이동이 어려운 환자와 그 보호자들도 치료와 위로와 공감을 받을 수 있고, 집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의사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속성을 갖는 것도 가능했다.

 

 

공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통증의 이유를 찾아내 이름 붙이는 건, 그래서 환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주는 건 오직 의료인만이 할 수 있다. 통증에 단순한 공감을 넘어서는 '적절한 진단적 공감'이 필요한 때가 있다.


-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p.202

 

때때로 통증은 제대로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 공감을 얻는 것만으로도 나아질 수 있다. 잘 치료해야지 보다 환자들의 아픔에 잘 공명해야지를 먼저 고민하는 저자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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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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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中 p.51~52

 

페미니스트에 대한 저자의 명쾌한 정의를 보여주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2015년 스웨덴어판이 출간된 당시, '스웨덴 여성 로비'라는 단체가 출판사, 스웨덴유엔연맹, 스웨덴노동조합연맹 등의 후원으로 이 책을 스웨덴의 모든 16세 학생들에게 선물한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모든 16세가 읽을만한 책이라고 인정받는다는 건 어떤 일일까? 그것도 그 문제에 있어 인식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스웨덴에서 말이다.

 

 

첫 장을 폈을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읽으면서 내가 혹은 우리가 '페미니스트'를 너무 어렵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나이지리아에서 나고 자라서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후, 지금도 두 나라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원래는 테드 강의였던 이 책을 통해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그리고 제목처럼 왜 우리가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지를 쉽고 편안하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中 p.23

 

저자는 본인과 주변인들이 겪은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일상의 경험들을 예시로 들며 대부분 사람들이 작은 일이라고, 흔한 일이라고 심지어 문화라고 억울함을 삼키지만 이건 세계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성별의 문제를 떠나 사회가 은연중에 규정하는 타입에 맞추려고 자신의 모습이나 감정을 감추고 애써야 하는 모든 인간의 문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현재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고 계획하는 일에 함께 나서자고 요청합니다. 지금보다 좀더 공정한 세상을, 스스로에게 좀더 진실함으로써 좀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더 행복해진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딸들을 지금과는 다르게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들도 지금과는 다르게 키워야 합니다.


-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中 p.28

 

저자가 2003년에 쓴 소설을 두고 사람들이 페미니즘적이라고 수군거린다며 페미니스트는 남편을 얻지 못해서 불행한 여자를 말하는 것이니까 스스로를 절대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 말라는 한 저널리스트의 충고에 스스로를 '행복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로 결심한 뒤, 페미니즘은 비아프리카적인 거라는 한 여성 학자의 말 때문에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로 수정했다가 결국에는 '남자를 미워하지 않으며 남자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서 립글로스를 바르고 하이힐을 즐겨 신는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에 이르는 에피소드는 정말 웃겼다. 더불어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갖는 온갖 편견과 부정적인 의미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페미니스트냐고 물으면 왠지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거다. 그 이유를 저자의 경험이 바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친구였던 친웨 아줌마를 통해 '세상의 인정을 구하기 위해 나 자신을 억지로 변형시키는 일'을 하기 않고, '가장 진실되고 가장 인간적인 자아'로 살아내겠다고 결심하는 내용의 「여성스러운 실수」, 그리고 인터뷰 '이야기꾼'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와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고, 열린 마음과 생각을 가진 신중하면서도 유쾌한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테드 강의는 유튜브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은 데다 가수 비욘세의 노래 '***Flawless'에도 삽입되었다고 한다. 오빠의 거절할 수 없는 요청에 따른 강연이 이렇게 다방면의 영향력으로 돌아올 줄 작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사전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이 정의에 따른다면 우리가 페미니스트가 아닐 이유를 찾는 게 더 힘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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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일 - 재수 x 오은 그림 시집
재수.오은 지음 / 창비교육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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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클러버 활동 중에 가끔 클러버 서평단 모집 공지가 올라온다. 지난번에 『스노볼』도 그렇게 만났는데 이번에는 『마음의 일』을 읽게 되었다. 친구 사이라는 만화가 재수, 시인 오은 작가가 함께 그리고 쓴 그림 시집이라는 점이 끌렸고, 연필 질감이 듬뿍 느껴지는 컷 그림이 시와 어떻게 어우러졌는지도 궁금했다. 팀플레이는 참 쉽지 않은데 두 사람은 이 작업을 마치고 마침내 친구가 된 거 같다고 느꼈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다. :)

 

 

 

 

책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책을 다 읽으면 결말을 알 수 있겠지만

책을 아무리 읽어도

정작 우리는 책이 아니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당장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음 장에 무슨 풍경이 펼쳐질지

가늠할 수 없다


- 「딴」 中

 

『마음의 일』 속에서 무거운 가방을 멘 청소년기의 나를 만날 수 있는데 읽다 보면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크게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우리는 앞으로,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어디까지 자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딴짓을 하고 걱정을 한다. 그러면서 결말이 정해져 있는 책의 주인공 때문에 마음 졸이기도 한다. 나나 잘해야 하는데... ㅎㅎㅎ

 

사람과 사람이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했다.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이 늘 꼭 붙어 다니라는 말은 아님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사이를 적당히 둬야 상대가 더욱 잘 보였다.

인간은 사이[間]가 있어야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 『마음의 일』 中 p.90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을 때 그 관계가 오래간다는 건 나이를 먹을수록 크게 깨닫는 부분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고 알고 싶을 때 숨을 고르고 한 번씩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뜬금없는, 다소 이기적으로 느껴지는 연락에 짜증이 나는 건 아직 마음이 더 자라야 하기 때문일 거다.
괜찮지 않을 때는 최대한 괜찮지 않다고 말해보리라 다짐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고 여전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스트레스 받는 자신을 발견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괜찮은 척하며 받는 스트레스가 클까, 괜찮지 않을 때 괜찮다고 말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더 스트레스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어쩔 수 없이 하던 대로 살아야 하나보다 했었다. ^^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심장이 뛸 때마다

속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발끝에 고인 눈물이

굳은살로 박이는 아침

바깥이 밝다고

안까지 찬란한 것은 아니다


- 「아침의 마음」 중

 

우리 사회는 특히 감정,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는 사람을 미성숙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마음을 드러내는 건 이상하거나 미숙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받을 때도 있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내 마음이 따뜻해질 때도 많다. 감정을 숨기면 결국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상처받거나 주기 싫다고 감추기만 하면 나와 그 사람 사이에는 무감각한 거리만 남는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이 없고 잘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중요한 순간의 감정, 마음을 너무 꼭꼭 숨기지는 않아도 된다. 그게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말이다.

『마음의 일』은 규정할 수 없는 책이다. 시집이기도 하고 만화책이기도 하고, 그림책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의 이야기인 거 같지만, 어른들에게도 유효하다. 그땐 그랬지 싶다가도 여전히 이런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마 마음은 계속 자라고 어떤 마음은 아직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고 해서일 거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아직도 -프롤로그에서처럼- '선선히 움직이고', '기꺼이 방황하고', '내 안에 있는 무수한 나를 만난다'.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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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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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알았지만, '서스펜스의 여제'라고 불리며 작품들이 50여 차례나 영화, 연극, 뮤지컬, 드라마로 옮겨졌다는 대프니 듀 모리에! 나름 장르소설을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이렇게 모르는 작가들은 넘치는지... ㅎㅎㅎ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 모음집인 『인형』에는 그녀가 19살 때 쓴 「동풍」부터 스무 살에 쓴 「인형」 등 총 13작품이 탄생 순서대로 실려있다. 그녀가 아직 영국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를 받기 이전의, 그러니까 정말 초기 단편들을 모은 건데 다 읽고 나면 대체 이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를 생각하게 된다.

 

 


| 셀럽 가족의 삶
대프니 듀 모리에는 저명한 예술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명 만화가이자 작가인 할아버지, 유명 연극배우였던 부모. 게다가 아들을 간절히 바랬지만 딸만 셋을 둔 아버지를 위해 대프니는 유년 시절에 스스로 남자 옷을 입고 자신의 내면은 남자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런 남편과 딸의 유대관계에 어머니 뮤리엘은 둘 사이를 시기하고 의심까지 했다는데 실제로 아버지 제럴드가 딸인 대프니를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고... 대프니는 아버지의 장례식 참석도 거부했다고 한다.(옮긴이의 말 참고)

작가의 내력을 읽고 나니 비로소 이 단편들의 내용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문학적 재능을 물려받았다면 감수성이 정말 남달랐을 텐데 그녀에게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셀럽 가족으로서 외부에서 받는 압박에다 집안,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이걸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가 엄청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친아버지의 성적 학대라니...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이성을 잃을 뻔했다. 
 
|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는 작품의 빛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겪었을 삶의 어두운 그림자는 결과적으로 작품의 빛이 되었다. 순박했던 외딴섬의 사람들이 높은 파도와 동풍 때문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외부인들로 인해 어떻게 어디까지 미쳐(?) 가는지를 보여준 「동풍」 같은 작품이 평탄한 일상 속 19살의 머리에서는 나오지 않을 거 같으니 말이다. 수록작 「집고양이」는 그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관계를 그대로 투영한 듯한 작품이고, 「주말」과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마지막 「인생의 훼방꾼」에서는 남들에게 공감하지도 자신의 잘못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은 좋은 사람이고 설득력 있는 사람이라며 남들의 인생을 망치고 다니는 주인공을 보며 전에 읽었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가 생각이 났다.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문체 덕분에 더 모든 상황과 감정이 직설적으로 다가왔고, 절망, 공포, 설렘, 고통 등 인물들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스릴러의 거장이라는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 <자메이카 여인숙>, <새>는 대프니의 작품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보지는 못했어도 영화 제목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많을 듯하다. <레베카>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져서 사랑받고 있다. 1969년 문학적 공헌을 인정받아 데임 작위를 하사받았고, 1977년에는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로부터 그랜드 마스터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녀의 빛나는 작품만큼은 제대로 인정받았고 할 수 있겠다.

책을 덮으면서 문득 작가가 종국에는 행복한 마음으로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부디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하면서 쉽게 끊어낼 수도 없는 가족으로 인한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났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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