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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나는 이제 알았지만, '서스펜스의 여제'라고 불리며 작품들이 50여 차례나 영화, 연극, 뮤지컬, 드라마로 옮겨졌다는 대프니 듀 모리에! 나름 장르소설을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이렇게 모르는 작가들은 넘치는지... ㅎㅎㅎ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 모음집인 『인형』에는 그녀가 19살 때 쓴 「동풍」부터 스무 살에 쓴 「인형」 등 총 13작품이 탄생 순서대로 실려있다. 그녀가 아직 영국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를 받기 이전의, 그러니까 정말 초기 단편들을 모은 건데 다 읽고 나면 대체 이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를 생각하게 된다.

| 셀럽 가족의 삶
대프니 듀 모리에는 저명한 예술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명 만화가이자 작가인 할아버지, 유명 연극배우였던 부모. 게다가 아들을 간절히 바랬지만 딸만 셋을 둔 아버지를 위해 대프니는 유년 시절에 스스로 남자 옷을 입고 자신의 내면은 남자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런 남편과 딸의 유대관계에 어머니 뮤리엘은 둘 사이를 시기하고 의심까지 했다는데 실제로 아버지 제럴드가 딸인 대프니를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고... 대프니는 아버지의 장례식 참석도 거부했다고 한다.(옮긴이의 말 참고)
작가의 내력을 읽고 나니 비로소 이 단편들의 내용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문학적 재능을 물려받았다면 감수성이 정말 남달랐을 텐데 그녀에게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셀럽 가족으로서 외부에서 받는 압박에다 집안,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이걸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가 엄청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친아버지의 성적 학대라니...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이성을 잃을 뻔했다.
|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는 작품의 빛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겪었을 삶의 어두운 그림자는 결과적으로 작품의 빛이 되었다. 순박했던 외딴섬의 사람들이 높은 파도와 동풍 때문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외부인들로 인해 어떻게 어디까지 미쳐(?) 가는지를 보여준 「동풍」 같은 작품이 평탄한 일상 속 19살의 머리에서는 나오지 않을 거 같으니 말이다. 수록작 「집고양이」는 그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관계를 그대로 투영한 듯한 작품이고, 「주말」과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마지막 「인생의 훼방꾼」에서는 남들에게 공감하지도 자신의 잘못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은 좋은 사람이고 설득력 있는 사람이라며 남들의 인생을 망치고 다니는 주인공을 보며 전에 읽었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가 생각이 났다.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문체 덕분에 더 모든 상황과 감정이 직설적으로 다가왔고, 절망, 공포, 설렘, 고통 등 인물들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스릴러의 거장이라는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 <자메이카 여인숙>, <새>는 대프니의 작품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보지는 못했어도 영화 제목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많을 듯하다. <레베카>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져서 사랑받고 있다. 1969년 문학적 공헌을 인정받아 데임 작위를 하사받았고, 1977년에는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로부터 그랜드 마스터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녀의 빛나는 작품만큼은 제대로 인정받았고 할 수 있겠다.
책을 덮으면서 문득 작가가 종국에는 행복한 마음으로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부디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하면서 쉽게 끊어낼 수도 없는 가족으로 인한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났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