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의 여곡성 - 여귀로 읽는 한국 공포영화사
백문임 지음 / 책세상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곡성은 모호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새벽에 종구가 잠에서 깨어나며 시작합니다. 니체는 ‘아폴론의 정연한 꿈과 디오니소스의 흐릿한 현실’에서 ‘비극’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양자가 가장 질펀하게 교접하는 시간은 새벽이 아니던가요. 종구의 잠을 깨운 전화는 살인사건을 알리는 비보였습니다. 의도했겠지만, 새벽녘에 촬영된 분량이 많습니다. 결말의 시점도 새벽이네요. 잠에서 깨어나고, 다시 잠이 드는 장면도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상당한 분량의 씬에서 조명을 거의 자연광으로만 처리하는데 어슴푸레한 빛만으로 폐가나, 숲에서 인물이 또렷하게 구분될 리가 만무하죠. 확신을 어렵게 만드는 건조한 미장센이 적극적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요소가 적층되면서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갑니다.

 

곡성에서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건이 일어난 현장마다 광기가 서려있습니다. 경찰과 언론의 공식적 결론은 ‘야생 버섯 중독’에 의한 사고지만, 영화는 이 부분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습니다. 버섯 중독은 표면적인 층위의 사건이고, 영화에서 거의 무시되다시피 하는 이성의 영역입니다. 영화는 광기에 집중합니다.

 

 

블라블라 

 

 

마을에는 사건과 관련하여 외지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짐승같은 몰골로 산 짐승을 뜯어먹고, 성추행을 저지르고, 심지어 피칠갑한 얼굴에 붉은 안광을 가진 일본인으로 마을 사람들의 심상에 박혀 있습니다. 주인공 종구는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인데, 처음엔 몇 번이나 소문을 무시하다가도 딸이 피해자들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자 점점 소문에 젖어들게 됩니다. 이 것이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하며 영화의 갈등구조를 비이성의 영역으로 쏘아 보냅니다.

 

영화의 심층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자들은 모두 신적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이라는 외지인,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무명, 무당인 일광. 빙의된 효진. 이들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은밀한 커넥션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야바위를 방불케 하는 플롯을 구사하며 이들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일광이 굿판을 벌이며 사태의 원흉에 ‘살을 날리는’ 장면에서 일광, 외지인, 효진의 교차편집은 화룡점정입니다. 대체로는 일광과 외지인이 대립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장승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 외지인은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고, 배에 못을 박으면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굿 하는 동안 방에 누워있는 효진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걸로 묘사하죠. 게다가 외딴 집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외지인을 멀찌감치서 노려보는 무명의 시퀀스를 은근슬쩍 끼어 넣습니다. 모호합니다. 그 뿐 아니라 무명에 대한 의혹의 장치(머리삔, 야상), 일본인과 일광의 갈등(죽은 까마귀의 발견, 살 보내기), 일광과 무명의 갈등(코피), 일본인과 무명의 갈등(교통사고)에 더해 뜬금없이 일광과 외지인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부분(팬티)도 등장합니다. 이건 뭐, 혼돈의 카오스가 따로 없습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 저는 영화가 노골적으로 르네 지라르를 차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절정부에 이르기까지의 서사가 ‘폭력모방’, ‘스캔들’, ‘희생양 제의’ 등 지라르의 굵직한 이론들로 설명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거든요. 영화는 추측대로 외지인에 대한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스캔들이 발생하고), 집단 폭력의 광기가 야기됩니다. 도식적으로 외지인은 이 사태의 희생양이(지라르는 예수를 대표적인 희생양으로 보죠) 될 운명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건 사실, 지라르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영화의 서사적 궤적을 따라가면 무심결에 할 수 있(도록 의도된)는 생각이죠. 게다가 오프닝에서 인용하는 누가복음 24장은 애초에 이걸 노린 감독의 포석이 아니겠습니까. 부활한 예수가 자신을 제자들 앞에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고..

 

외지인은 내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는 둥 실존성을 의심받는데. 종구 무리에게 쫓겨 절벽에서 떨어지고 고통과 공포에 흐느끼는 장면은 그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반증이었죠. 결국 그가 희생(당)함으로서, 모방폭력의 순환이 해소되지 않을까하고, 낚였던 겁니다. 일광의 말을 빌리자면 ‘미끼를 삼’킨 것이라고 할까요. 

 

몇번이나 논리가 격절되고, 어렴풋한 단서들과,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만 망령처럼 떠돌아 다닐 때 종구와 관객들은 결국 자신이 의심하는 바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호함을, 불안을 타개하려는 인간의 본능이겠고, 또 인간이 짓는 죄의 근원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심증을 잔뜩 섞어 이 사태의 원인이 무엇이라는 결론을 내릴 때, 관객은 영화 에필로그의 부제처럼 어둔 동굴 속으로 들어가 해매는 되는 꼴이 될 겁니다. 그 동굴에서 어떤 존재를 마주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들여다보는 심연일 것이라고, 나홍진은 말하고 싶었겠죠.

 

결말부, ‘새벽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에 돌아간다면 가족이 몰살’당할 거라는 무명의 말과, ‘절대 현혹되지’말라는 일광 사이에서 번민하는 종구의 모습에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확신이라곤 1도 갖기 어려운 아수라장에서, 선택의 궤적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런지요. 그 상황에서도 어렴풋한 확신만으로 책임이 실린 선택을 보류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눈물겨운 인간 실존의 사태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혼돈의 끝에 잘못된(듯한) 선택을 한 종구의 모습에서 늘 거지같은 선택과 후회로 일관하는, '미모만 뛰어난 어떤 인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결국, 서사의 내부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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