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루리가 책을 읽고 있었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일본어 원서였고 내 눈썰미로는 얼른 제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리가 나 모르는 책을 읽는 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인 바,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 거냐고 물어봤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책 표지의 가타가나를 가르키는 루리.
-휴, 이거 몰라? 도.스.토.예.프.스.키.
그러니까 제목이 뭔데?
루리 낯빛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번진다.
-..죄또벌. (罪と罰)
#. 2
가끔 썼던 얘기지만 루리의 운동능력은 초인적인데가 있다. 호텔리어 대신 유도를 진로로 선택 했다면 국제적인 명성을 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딸래미를 금지옥엽 키우신 모친께서는 루리가 개교 이래 최고의 체육성적을 받아 오건 말건 그저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만을 시켰더랬다. 사자한테 풀을 먹여 키운 격.
대신 루리는 격투스포츠를 즐기는 편이다. 가끔 운동 삼아 샌드백을 치기도 하고(‘김주임’.. 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치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김주임의 미래와 루리의 현재에 대해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한다.), K-1(망했지만) 같은 게 TV에 나오면 눈여겨 보기도 한다. 같이 채널을 돌리던 어느날, 밥샙이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최홍만에게 얻어터지는 장면이 나왔고, 루리는 울분에 차 허공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바보 녀석! 최홍만 따위한테 당하다니. 만나면 엉덩이를 걷어차 주겠어!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정말로 밥샙과 만난 루리의 주먹은 어쩐지 그 날의 분노를 잊은 듯,
수줍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