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며칠 전,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다가 ‘이론과 실천’출판사 김태경 대표의 부고기사를 발견했다.
 
김태경 대표는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사회과학 서적 출판과 보급에 힘쓴 출판인이다. 1990년 자본론 번역사건이 유명한데, 당시 금서로 지정되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생을 한 일이다. ('옥고'를 치렀다고 한 부고 기사가 많은데 실제로 '옥고'를 치르진 않은 것 같다. 프레시안 인터뷰에 따르면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 듯.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5378) 여하튼, 요즘 자본론이 교양서나 고전으로 잘 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의 남편으로도 유명했다. 강금실 전 장관에 대한 잡글, ‘강금실, 매혹의 카리스마’를 보면, 90년대 후반 출판사 부도로 어려워하던 김태경 대표의 빚을 떠안고 이혼을 한 사연이 서술되어 있다. 

김 대표는 책을 허투루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돈이 될 리 없는 예술, 철학, 사회과학류 도서만 출판하는 중소규모 출판사에서 표지 디자인이나 장정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신경을 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드는 책은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그런 노고를 인정받아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진정 대한민국 도서산업 발전에 이바지 한 인물이었다.
 
 
#. 2
 
4월 15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웹서핑을 하다 우연히 접속한 진중권 교수의 트위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지금 쓰는 '미학'은 출판사 하시는 미학과 선배가 10년 전에 청탁하신 원고. 5년 전에 좀 다른 주제로 쓴 원고를 들고 찾아갔더니, "이거 말고, 네 전문적 역량을 완전히 발휘해 써오라"고 거절. 그 원고가 다른 출판사에 나온 '교수대 위의 까치’.
 
그 분이 병에 걸리셔서 곧 돌아가실 모양입니다. 병원에서도 손 놓았다고 하더군요. 어제 병원으로 찾아봤는데, 거동은 물론이고 말도 거의 못 하십니다. 그런데도 절 보시면서 아주 힘겹게 겨우 한 마디 하시네요. “원고는...?”
 
병실을 나오면서 '다시 보자'고 했지만,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 분도 아시겠지요. 아무튼 선배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최고의 원고를 쓰겠습니다.“

 
며칠 사이에 돌아가신, 그가 ‘출판사 하시는 미학과 선배’라고 부를만한 출판인은 이론과 실천의 김태경 대표뿐일 게다. 
 
불황에 허덕이는 그 분야 출판계에서 진중권의 네임 밸류는 전자업계의 ‘삼성’과 같은 수준이다.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미학 오디세이’는 예술 교양서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세 군대를 바꿔가며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가 가지고 갔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교수대 위의 까치’도 인문분야 베스트셀러로 알라딘 세일즈포인트가 3800포인트가 넘는다. (반면, 그 이론과 실천에서 나온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 3000이 넘는 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내가 이래서 빨갱이들이나 보는 책은 안 된다고..)  
 
그게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김태경 대표는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출판인이었다.  
 
 
#. 3
 
그날 저녁 내 책장에서 이론과 실천의 책을 몇 권 찾았다. 모두 훌륭한 책들이다. 오래된 책들의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죽은 어느 출판인의 고집과, 나의 맥락을 잃어버린 ‘이론’과, 격절된 ‘실천’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내 세 배를 살고 죽었는데, 나는 그의 삼분의 일 만큼은 살아내고 있는가.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며칠 째 그의 부고 기사를 책상 옆에 붙여놓고 있다. 보람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표정이란 이런 것일까. 기사 속 조그만 사진의 그는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뇨리따 2014-05-14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그의 삼분의 일만큼 보람을 갖고 몰두하고 있는걸까요?
그 삼분의 일만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살고 있는건가요?

임박한 임종의 앞에서 죽음에 대한 넋두리나, 삶에 대한 예찬 대신
기력을 쥐어짜내 부르짖을 절실함은요?

가혹하시군요, 말미잘님.

뷰리풀말미잘 2014-05-15 18:30   좋아요 0 | URL
네, 목표보다 더 중요한 건 삶의 방향과 열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2기통의 엔진으로 400마력을 내는 것이 인생이라는 데 저는 마력은 커녕 저(猪)력 수준. 저는 저;;력이 있는 사람이지요. 흠.. 그건 그렇고. 저녁은 드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