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산책을 했다. 어둑어둑한 저녁, 게으른 밤 고양이처럼 눈을 뜨는 가로등 사이로 오래 걸었다. 실타래 같은 골목길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뒤엉켜 새 길을 열었다. 나는 길 사이로 내 몸을 밀어냈고, 서릿발 선 찬 공기와, 낮 모르는 사람들과, 본 적 없는 주택단지들이 내가 몸을 밀어내는 속도로 다가왔다.

송곳 낫으로 고등어 아가미를 퍽퍽 찍어대는 아저씨의 어물전과, 갓 구워낸 식빵을 파는 빵집 앞에서 머뭇거렸다. 잡화점에서는 플라스틱 다라이와 밀폐용기, 다림질 판 머리를 샀다. 노점 구둣방에서는 망가진 구두를 고쳤다. 망치와 작은 모루로 금방 구두를 고쳐준 아저씨는 돈을 받지 않았다. 희끗 거리는 머리에 툭툭 불거진 팔 힘줄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시장을 지나 커다란 은행을 끼고 한 바퀴를 빙 돌았다. 밤은 깊었고, 나는 길치라 돌아가는 길을 되짚어 갈 수 없었다. 집이 있는 방향을 짐작해 그 쪽으로 무작정 걸을 뿐이었다. 꼭 집이 나오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헤맨다는 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일이니까.

그래, 그건 정말로 사소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아주 긴 헤메임의 과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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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8-03-08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하셨나요?
저도 길치이므로, 가는 길마다 빵가루라도 뿌려놓고 싶은 지경이에요. 고로, 직선으로 가거나 기억하기 쉬운 상점들을 외워둬야 해요. 저는 그런 헤메임을 굉장히 불안해 하거든요. 아무리 많았던 불안도, 또다른 불안을 이겨내지 못하나봐요. 그 곳과 빨리 친해지세요.
그리고 주말 잘 보내세요~^^

뷰리풀말미잘 2008-03-09 10:06   좋아요 0 | URL
네, 어쩌다 보니 사는 곳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얼마전까지는 대저택에 살았는데 지금은 옥탑 단칸방의 주민이 되어버렸답니다.^^ 빵가루는 새가 쪼아먹기 쉬우니 자갈을 한 주머니 준비하는게 좋겠어요. 하나씩 되 주우며 돌아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겠군요. 상점 외우기 스킬은 저도 열심히 시전하는 중입니다. 이게 다에요님도 좋은 주말 보내세요!

Mephistopheles 2008-03-0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래시장 풍경은 다 비슷비슷한가 봅니다. 제가 사는 곳 건너편에 있는 재래시장도 사진 속의 모습과 그닥 틀리지 않으니까요.^^ (설마...우리 동네는 아니겠죠?)

뷰리풀말미잘 2008-03-09 10:19   좋아요 0 | URL
서울에 재래시장 남아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은데.. 라고 생각했으나. 검색해 본 결과 아직도 꽤 많은 재래시장이 남아있네요. 25개 구 중에서 강남구, 강북구, 강서, 관악, 광진, 구로, 마포, 성동, 성북, 양천, 종로, 중구, 중랑. 이렇게 13개 구에 재래시장이 있답니다. 메피스토님과 제가 같은동네에 살 확률은 대충 1/169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