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종말 - 개정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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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한 단상

종말이라는 단어는 가소롭다. 실상, 종말은 것은 ‘인간의’ 종말 일 뿐이니까. 베이컨의 말을 빌리자면 ‘종족의 우상’이다. 천지에 사는 것이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오히려 다른 종에게 인간의 종말이란 긍정적인 사건에 가까울게다. 생각해 보건대 일상문법상 종말이라는 어휘가 담을 수 있는 함의는 매우 협소하다. 

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 세계 문명사를 상고해 볼 때 종말이 그 문명의 이슈가 되는 것은 헤브라이 문명 단 하나뿐이다. 그러한 헤브라이즘 문명의 판타지가 서구의 그레코-로망과 기독교 문명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개 문명의 찌꺼기가 세계사의 주류자리를 꿰 차고 그 사상을 좋은 면이든 좋지 않은 면이든 가리지 않고 여타 문명에 강제적으로 주입시키려는데 있다. 그 선봉이 바로 개신교의 전도주의다.

그 와중에 인간의 역사는 종말이라는 어휘를 둘러싸고 수 없는 종말적 폐혜를 겪었다. 종말론자로 몰려 죽은 사람, 종말론에 가담하지 않아 맞아죽은 사람. 이 범주에는 예수도, 가롯 유다도, 어쩌면 자본의 종언을 말한 맑스도, 반공주의로 먹고 산 박정희도, 그로부터 비롯한 인류의 근현대사의 소용돌이도 포함된다. 이러한 문제는 현실과 신화의 구분이 모호했던 인류 여명기의 관성이 인류 역사를 통털어 멈추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제, 종말에 대한 편견 없는 독해법을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을 대하는 두 개의 관점을 제시한다. 간단하다. 하나는 낡은 관점으로, 종말론과 협박자의 논리에 휘말려 간이고 쓸개고 빼다 바치는 것, 또 하나는 종말이 독선에 대한 신화적 비판자임을 알고 그와 조화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이 바로 본 글에서 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노동의 종말을 대하는 독해법이 될 것이다.

   

『제러미스트라다무스』

리프킨의 문제의식은 기술발전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자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발전이 인간 역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리라고 예언한다. 그러한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산업 혁명기에 발명된 증기기관과 그에 연계되는 컨베이어 벨트다. 그 전까지 수많은 노동력이 달려들어 해결해야 했던 일을 증기기관의 힘을 빌려 단축시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전까지 컨베이어벨트의 역할을 해 줬던 사람들에게 ‘기술실업’ 을 야기한다. 어떤 공장장도 비싼 노동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싼 값에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려는 선택을 할 테니까. 거칠지만 리프킨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기술발전으로부터 비롯한 대량 기술실업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종착역이 바로 노동의 종말이다.

제러미스트라다무스

 

책에서 리프킨은 근 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적 근거와, 무수히 많은 기술실업 사례들에 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러한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194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목화 생산업에서 기계에 밀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의 대 이동을 했으며 북부에서는 이미 자동화 된 생산기계들에 밀려 비숙련 일용직 노동자로 몰리게 되고 결국 하층계급으로 떠밀린 현상은 리프킨이 말하는 기술실업의 대표적인 예다. 또한 도요타를 필두로 한 일본의 자동차 기업들이 기계 가동시간을 최고조로 높이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제조공정이(린 생산방식) 미국 자동차 업계에도 전이되어 이른바 포스트 포디즘을 이끌어 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작업장의 리엔지니어링이 결국 공업,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계층을 파쇄시키고 결국 블루칼라의 종말을 가져오며, 나아가 서비스업의 노동력도 대폭 대체할 것이라고 본다.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강의방식 E-Edu, 사서가 필요 없는 정보 도서관, 음악가를 배재시키는 디지털 합성 음악, CG기술의 발달로 인한 영화 엑스트라의 퇴출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다.


그래서 2003년 미국의 경기 회복세는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고용회복을 동반하지 못했고, 2001년부터 2003년 9월 사이에만 유례없이 3백만 개 가까운 일자리가 소실되었으며, 장기실업자들은 질은 숙련된 노동자와 고학력층으로 높아져 가고 있다고 한다. 이 시대에 중졸이 설 자리는 도대체 어디인가. 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리프킨은 대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노동시간의 단축, 두 번째는 제 3부문의 강화, 세 번째가 사회적 경제의 세계화다. 과연 실효성이 있는 대안일까?

 

『아스트랄로피테쿠스』

뭔가를 주장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은 자신의 주장에 도취된다는 점에 있다. 가령 이명박이 주장하는 경부운하의 장대한 계획을 보라, 허경영의 바이칼 호수를 이용해 수자원을 충당하자는 옹골찬 계획을 보라. 그들은 이미 사바의 번뇌를 넘어 아스트랄의 세계로 향해 가는 자들이니.. 그들을 일컬어 신 인류, 아스트랄로피테쿠스라 하자.

 

노니는 아스트랄로피테쿠스 한쌍


 

리프킨의 첫 번째 아스트랄계 여행은 스러져 가는 노동시장에 대한 분석은 치밀하지만 새로 창출된 노동력에 대한 분석은 전무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분석의 결여는 다품종 소량생산 사회로 넘어가는 현대사회의 과도기를 과도기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리프킨의 두 번째 아스트랄은 기술진보에 대한 너무도 확고한 믿음이다. 아무리 디지털 샘플링이 발달한다고 해서 베토벤이 죽는 건 아니다. 아무리 AI가 발달하고 인공지능에 의한 실험적인 글쓰기가 성공했다고 해도 소설가들 밥줄이 끊어졌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다.

 

 

결국 기계가 인간의 마인드까지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인지과학이 정상과학의 고지로 올라 선 후에. 또, 신경생리학, 컴퓨터 공학, 인공지능학, 전산언어학, 심리학의 연구성과가 한데 묶여 미녀 로봇을 만들어 내고 그 미녀 로봇이 쓴 책의 마지막 구절이 이제 리프킨 즐. 을 선언하는 그 날, 그러니까 최소한 향후 100년 후에나 가능할 거라는 얘기다. 따라서 리프킨의 귀여운 주장에 기술낙관주의자나 SF틱 기술결정론적 사고라는 무시무시한 딱지는 붙이지 않겠다. 본업인 사회학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컴퓨터 공학에 대해서 높은 이해를 쌓지 못했기 때문일 테니까. 

  

리프킨의 세 번째 아스트랄은 세계사적 통시성의 결여다. 그는 미국에 대한 이해가 곧 세계사회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듯이 주장한다. 기실, 기술실업의 영향을 받고 있는 미국인구가 세계 인구의 몇 프로나 되는가 하는 문제는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 인구의 가장 큰 덩어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권에 있다는 점과, 일본을 제외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분석이 없다시피 하다는 점도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유럽이나 제 3세계의 논의조차 새발의 피 수준이다.

그래서 그의 대안인 제 3부문의 강화가 와닿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제 3 부문이라 함은 교회나 지역사회, 사회단체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지불되는 ‘그림자 임금’(예컨대, 1시간 봉사를 하면 30분 봉사 받을 권리를 화폐화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사회구조가 조밀하게 지역경제를 떠받히고, 이러한 사회적 경제가 뭉쳐 세계적인 구조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현실성이 있는 얘긴가.

도시화 율과 아파트화가 고도로 진척된 한국 사회에서는 지역사회도 없고, 사회단체의 수준은 한심하고, 교회나 종교집단도 없느니만 못한 형국이다. 그림자 임금도 역시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의 공급은 넉넉한 편이다 개인의 기본의식 구조가 공동체 의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 필립이 사는 가나의 경우를 보자, 무려 인구 8000만이 복작거리는 그곳에서는 모두가 지역사회의 일원이고, 삶이 봉사활동이고, 국가 전체가 사회단체이자 종교단체다. 가나가 꼭 미국사회처럼 발전하게 될까? 인도도?  


『결론- 리프킨과 꿈을 꾸자』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예언서를 들고 우리를 무섭게 다그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은 노동의 종말에 있지 않다. 책에는 종말이 닥쳐왔을 때 지리산에 들어 가라던가, 정도령을 찾으라던가 따위의 언급도 없다. 그의 고민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경제적인 인간 사회구조의 밸런스를 깨뜨리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개척할 수 있을지에 맞닿아 있다. 즉, 앞으로 닥쳐올 변혁을 올바로 맞아들이기 위해 제 3부문을 확대하고, 제 3부문에 대한 국제적 연합을 통해 신자유주의라는 리스크에 대해 경계하자는 요지다.

하지만 리프킨의 전망과 진단은 나에게 있어서 체감온도가 높지 않다. 앞서 지적했듯이 리프킨의 견해가 미국사회에 최적화 된 것이며, 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그의 견해도 내게는 그다지 설득적이지 못하다. 제 3부문에 대한 언급도 자원봉사단체, 종교단체 등의 여러 제 3부문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본인에게 별로 깊게 체감되는 바가 없다. 특히 그림자 임금에 대한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요원해 보인다.

또 그의 견해처럼 자동화가 우리사회의 실업문제를 위협하는 요소이고, 노동시간 단축과 제 3부문의 확대가 그러한 위협에서 우리를 기적처럼 구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실질적인 저임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노동업무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의 진짜 노동자 계층에 대해 그러한 견해가 희망적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시장 경제의 작동을 너무 과시’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떤 사회학자가 그랬다. '리프킨이여 꿈을 꾸어라.' 가당찮은 소리 하지 말라는 얘기다. 어쩌면 노동의 종말은 사회학적 예언서에 불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언서가 보여주는 파국적 미래를 현실이 진보하도록 하는 채찍질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무분별한 신자유주의의 지랄발광과, 제 3부문, 국제적 연대, 실업문제에 대해 별 생각 없기가 체계적이기까지 한 우리 사회에 따끔한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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