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에티켓 -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당신의 마지막에 관하여, 개정판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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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살면서 죽음을 가까이서 접하기란 쉽지 않다. 교회나 부모님으로부터 얼굴을 알았던 지인의 부고를 전해듣거나 장례식장을 찾아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오는 것이 전부다. 나는 죽음에 대한 무지를 채우기 위해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김형숙 간호사가 쓴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유품정리사의 기록,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등. 죽음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기록인 희정의 <죽은 다음>은 작년에 읽은 책 중 손에 꼽는 책이다. 이번에 접한 <죽음의 에티켓>은 지금까지 읽어온 죽음을 주제로 하는 책들과는 다른 결로 다가왔다.

저자 롤란트 슐츠는 ‘독일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테오도르 울프상’과 ‘독일 리포터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이다. 의사, 간호사, 장례지도사, 법의학자, 화장장 직원들을 수년간 취재해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는 “서사 방식이 죽음과 슬픔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점이 우려스러웠습니다”(p.322)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독자 자신의 죽어감과 죽음을 직접 서술하는”(p.321) 저자의 문장은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시선 사이를 오가며 죽음의 실체를 존엄하면서도 사실적인 탐사 기록으로 복기해냈다.

책의 줄거리는 인간의 소멸 단계를 네 단계로 쪼개어 임종 직전의 미세한 신체 변화부터 장례를 거쳐 애도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연대기 순의 파노라마로 추적한다. Part 1(임종)은 죽기 전 심장이 주요 장기로 에너지를 몰며 몸이 스스로 이별을 예비하는 생물학적 단계를, Part 2(죽음 직후)는 숨이 멎은 육체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폭풍 같은 세포 붕괴와 유족이 마주하는 사망진단서 등의 법적, 행정적 절차를 조명한다. 이어 Part 3(단장)은 시신을 정돈하여 온기 없는 실체를 직시하도록 돕는 장례지도사들의 실무적인 일들을 다루며 Part 4(장례)는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된 이후 유품을 정리하며 비로소 완성되는 기나긴 슬픔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죽음이 당사자부터 시작해서 가족 친지와 지인들, 그리고 죽음을 다루는 병원과 장례식장과 화장장을 거쳐, 사망신고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을 거쳐 완전한 죽음으로 이동하는 구성이다. 이 죽음을 맞이할 나의 신체적 변화에 대한 서술들이 나의 죽음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선물해주며 또한 이 죽음이 닿는 사람들이 하는 실무적인 일부터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까지 파고들며 기록한다.

죽마고우 친구의 어머니가 10년 전쯤 돌아가셨다. 오랜 투병 끝의 별세였고 연세도 많으셨다. 장례 후 만난 친구는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많은 사람이 어머니의 죽음을 '호상'이라 말했지만, 자신에게는 그 말이 너무 큰 상처였다는 고백이었다. 그런 친구가 작년 말, 아버지마저 떠나보냈다. 그때의 나는 친구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으나 끝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친구 혼자 슬픔을 감내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죽음은 당사자보다 남겨진 가족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며, 그 슬픔은 타인과 나눌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괴감에 스스로가 참 쓸모없는 친구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야 친구가 겪었던 감정들이 자세히 느껴졌다. 그리고 나에게도 곧 있을 일이며 나의 아이도 언젠가 마주쳐야 할 일이라는 것도. 이제야 이 책의 제목이 나에게 다가온다. ‘죽음의 에티켓’은 인간으로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할 때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과 예의다.

“당신을 기억하던 지상의 마지막 사람이 마침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당신의 죽음 또한 비로소 완연하게 완성됩니다.”(p.311)

이 책은 죽음을 앞둔 이들과 슬픔에 빠진 유족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이기에 생명이 있는 모든 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죽음의에티켓#롤란트슐츠#스노우폭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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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책사 - 한국사의 명암을 가른 관계의 힘
김준태 지음 / 믹스커피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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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성균관대학교 역사학자로 오늘날 조직 경영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인문학 콘텐츠가 담긴 저서를 써왔다. 개인적으로는 <왕이 절박하게 묻고 신하가 목숨 걸고 답하다>와 <공자가 AI시대를 산다면>을 읽어봤던터라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쳤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 신라와 고려, 조선 까지의 대표적인 40편의 군신 관계를 통해 역사의 흥망성쇠를 왕과 책사의 관계를 통해 되짚어본다. 흔히 역사는 위대한 군주 한 사람의 독무대로 기억되기 쉽지만, 저자는 왕의 곁에서 길을 밝혀준 책사의 역할에 주목한다. 충언을 받아들인 왕과 외면한 왕, 책사를 성장시킨 왕과 소모품으로 다룬 왕의 차이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갈랐는지 입체적으로 추적한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균형이 조직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이 책은 시대별 군신 관계를 3장으로 나누었다. 1장에서는 을파소를 파격 등용한 고국천왕, 김유신과 손잡은 무열왕 등 결핍을 채워 시대를 바꾼 고구려와 신라의 인재들을 다룬다. 2장에서는 굳건한 신뢰로 거란을 물리친 현종과 강감찬의 동행부터 소통 단절로 파국을 맞은 의종과 문극겸의 비극 등 고려의 역사를 살핀다. 3장에서는 재상 정치를 꿈꾸다 왕권에 쓰러진 정도전, 사심 없는 직언을 수용한 세종, 영조와 그의 유일한 벗 박문수 등 조선 왕조 500년 동안 펼쳐진 빛과 그늘의 이중주를 다룬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을 보며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세조(수양대군)와 한명회의 관계를 떠올렸다. 책사 한명회는 단종(이홍위)의 영월 유배를 계획하고 촌장 엄흥도와 마을 사람을 이용하여 감시와 압박을 가한다. 또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금성대군의 움직임을 명분삼아 단종을 제거하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이 책 <왕과 책사>에서는 거대 권력을 가진 한명회를 견제하는 세조와 성종 앞에서 취하는 한명회의 모습을 대조한다.

“한명회의 이 두 가지 장면은 높은 지위에 오른 성공한 참모일수록 처신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책사가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주군이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는 의미다. 게다가 한명회처럼 은밀한 업무를 다루고 주군의 약점과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참모는 언제든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기 편일 때는 든든하지만 돌아서면 그만큼 무서운 적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pp.183-184)

세조 때 납작 엎드려 화를 피한 한명회는 이후 성종 때 압구정에서 무너지고 만다. 왕과 책사라는 관계에서 서로 간의 신뢰를 잃는 순간 벌어지는 참사다. 권력 앞에서 서로를 신뢰하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반해 왕의 신뢰가 책사의 잠재력을 어떻게 폭발시키는가에 대한 서사를 보여주는 고국천왕와 을파소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고국천왕이 기득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미천한 출신의 을파소를 끝까지 보호해 주는 장면이 그렇다. 일론 머스크 역시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에 둔감한 사람이었으나 최근 "능력보다 인성과 선한 마음을 보지 못했던 것이 내 가장 큰 실수였다"라고 발언한 것이 회자되고 있다. 왕과 책사 둘 다 기본적인 인성을 갖춰야 신뢰감을 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조직내에서 리더와 참모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또한 조직 내에서 소통과 불통의 기로에 서 있는 리더에게 더욱 강력하게 추천한다. 올바른 방향의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이전에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인성을 갖추는 것은 리더에게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왕과책사#믹스커피#김준태#한국사#관계의힘#리더와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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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역설 - 역동과 통제, 첨단과 소외가 공존하는 복합 중국 읽기
박민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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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2008~2013년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지냈으며 현재 통일외교팀 선임기자이다. 이 책, <중국이라는 역설>은 현재 중국 내부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G2로 우뚝 서려는 미중 경쟁 양상과 세계 질서의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가 다면적이며 복합적인 중국을 어떻게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할 지에 대한 시도다.

총 3부로 1부에서는 안보 국가로 변신하며 거대한 군산 복합체가 된 시진핑 체제의 독재적 딜레마와 내부 통제를 다룬다. 마오쩌둥의 모습을 닮아가는 시진핑 사상과 군 숙청을 통한 권력 유지, 이에 따른 독재자의 딜레마와 한때 우리나라에 돌았던 시진핑 실각설을 다룬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국 사회 전반이 시진핑 실각설에 과몰입했던 것은 위험 신호다. 보고 싶지 않은 중국의 현실을 회피하고, ‘바라는 대로의 중국’으로 도피하는 음모론이 혐중 정서와 맞물려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p.103)”라고 말한다. 이 음모론은 중국군 2인자 장유샤 부주석이 숙청되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시진핑 실각설을 요란하게 보도했던 한국 언론이나 유튜브의 ‘중국 전문가’들이 그 어떤 반성적 태도가 없었다는 점에 아쉬운 점을 전한다.


2부에서는 미국-이란 전쟁과 트럼프의 재집권 속에서 미국을 넘어서려는 중국의 대장정을 파헤친다. 이에 대해 ‘싸우지 않고 이기기, 중국이 택한 전략’파트가 인상적이다.

“중국은 이란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하지 않았지만 (...) 중국의 상업 위성 운용사 미자르 비전은 미군과 동맹군의 기지와 군사 배치를 정밀하게 보여주는 고해상도 위성 사진을 제공했다. 중국은 500기 이상의 첩보, 정찰 위성으로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에 전개된 미군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있고, 이를 이용해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에 반격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p.175)

시진핑이 원하는 것은 대만을 침공하여 ‘하나의 중국’에 이르는 것이지만, 만약 실패하면 권력을 내주는 것과 다를바 없는 상황에서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트럼프가 저지른 이란 전쟁을 통해 많은 것을 학습하고 있다.

3부에서는 주변국과의 관계에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려는 중국에 대해 담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4월 미국 플로리다 마라라고 별장에서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 회담을 가진 뒤 인터뷰에서 “시진핑 주석은 (...)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다.”(p.231)라고 밝혔다. 당시에는 트럼프의 헛소리라고 여겼지만 중국교육부는 2018년도부터 새 교육과정에 따라 역사교과서가 바뀌기 시작했다. ‘속국’, ‘종주권’, ‘종번 체제’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20세기 이후의 맥락에서 왜곡하고 의도적으로 재창조하기 시작한다.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는 대만침공이 성공한다면 그 다음 대상은 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외에 러시아와 유럽과의 관계를 들며 ‘천하삼분지계’ 전략을 펴는 중국의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중국에 대해 너무 쉬운 답을 내놓고 있는 것 아닌가. 항상 ‘중국은 악당인가, 우리 편인가’ 같은 흑백의 답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중국의 휘황한 발전과 능력을 직시하되, ‘승리 서사’ 아래에 있는 불안과 불만을 함께 살피지 않으면 중국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p.17) 중국에 대해 혐중이냐 친중이냐라는 이분법 잣대는 실제적인 우리나라의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말도 이젠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 외교적, 경제적으로 냉철한 생존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큰 흐름을 읽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중국이라는역설#한겨레출판#하니포터#하니포터12기#박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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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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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작가는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오즈〉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2024년에는 <혼모노>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하였다. 2025년, 작가의 다른 여섯 편의 단편과 함께 묶어 <혼모노>란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배우 박정민님의 추천사와 함께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번 책 <인비인(人非人)>은 기담집 형식을 띈다. 제목 ‘인비인’은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사람이기를 스스로 멈춘 이들을 뜻한다.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세 가지 시간의 축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위태로운 경계를 아홉 편의 기묘한 이야기로 펼쳐내는 구성이다.

‘어제’에 담긴 세 편은 친일 유산에 얽힌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과 고종의 하사품으로 알고 있던 가보, 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그리고 일본 교수에게 인정받기 위해 ‘오야지’라 부르며 따랐으나, 731 부대에서 동포를 실험해야 했던 <인비인>이다. 책의 제목으로 쓰인 이 단편에는 주인공이 가진 죄의식의 실체로 ‘가타마리’가 등장한다. 책 표지가 인상적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림이 계속해서 겹쳐진 사각형 프레임 정중앙에는 불의 원인으로 보이는 ‘가타마리’가 그려져 있다. 처음 이 표지를 볼 때는 관세음보살의 머리 부분이 없는 건가 싶었는데 <인비인>에서 주인공이 땅을 파 가타마리를 묻어버린 후에야 안정을 찾는 모습을 읽고나서야 작가의 의도가 정반대였음을 이 표지를 통해 알게 된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인 노인이 이 내용을 편지로 영화감독에게 전달하는데 그 감독이 아무렇지 않게 직원을 시켜 파쇄기에 갈아버리도록 한다. 그 파쇄기 속에서 두 번 죽는 1,800명의 희생자들이 떠오르는 표지였다.

‘오늘’ 에는 경매장이나 이베이에서 손쉽게 타인의 인생을 사서 갈아 끼우는 과정의 이야기인 ‘매일(買日)’과 ‘프랭크 오자와’와 다큐 소재를 찾고 있는 감독을 주인공으로 하는 ‘윤회 (당한) 자들’ 세 편이 실렸다. 자신의 생일에도 갖고 싶은 것이 없어 남편의 물건을 사는 여자가 경매장에 가서 삶의 이력이 깨끗한 인생을 낙찰 받거나 이베이에서 산 프랭크 오자와의 삶을 크리스마스에 누리면서 ‘왜 내게 자기 인생을 넘긴 걸까.’(p.134) 궁금해하는 주인공, 그리고 전생을 믿게 되어 ‘윤회당한’ 다큐 감독을 보며 이 세 단편 모두 현재의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여기고 타인의 인생을 욕망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이것이 작가가 보는 오늘날의 초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내일’의 세 편이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아미고’는 영화 스턴트맨이 주인공이다. 영화제작 과정에서 큰 사고를 당한 후 4개월만에 출근하게 된 영화세트장에서 자신을 대체할 야키마 H1 휴머노이드를 만나게 된다. 두 번째 작품 ‘#유령’에는 한 부부가 등장한다. 여자의 이름이 0, 남자의 이름은 1로, 이름 설정부터 인간이 디지털로 전환되어가는 과정 임을 암시하며 시작한다. 여자의 직업은 감정노동자 ‘터크’였다가 3주전에 ‘태거’로 승진한 상황이다. 터크는 “혐오 단어로 꽉 찬 쓰레기통을 비워낸다면 태거는 깔끔하게 비워진 통을 태그와 데이터로 채”(p.241)우는 직업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전자는 이야기에서 창조한 직업이고 후자는 있는 직업이라고 한다. ‘고(蠱)’는 작가의 최신작으로 AI에 대체되어가는 의료시스템의 과정을 배경으로 주인공 한의사 이익이 ‘고’라는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옵티머스 ‘도윤’과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 때문에 ‘기담’이라는 수식어구가 붙었구나 싶다. 옛것과 미래를 잇는 작가의 기묘한 서사가 인상적이다. 대체로 작가가 예견하는 미래에는 인간을 대체할 안드로이드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아미고’과 ‘고’ 소설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와 옵티머스는 인간보다 의리있다. 오히려 인간이 더 그것들에 대체될까 두려워하는 동시에 하대하며 파렴치한 행동을 보인다. 인공지능과 안드로이드에 밀려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다.

각 소설마다 인간 스스로 인간이 되길 포기하고 괴물이 되어가는 궤적이 섬찟하다. 역시나 넷플릭스는 왜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라는 말이 나온다. 알고리즘의 큐레이션 속에서 주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 앞에 서늘한 자극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한다.

#인비인#성해나#한겨레출판#하니포터#하니포터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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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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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 번역가이자 작가인 신유진의 <나를 균열내기>는 자신과 타자의 삶에서 발견하는 '균열'을 통해 고정된 자아를 ‘해체’하고 ‘유예’의 시간을 거쳐 자아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 열 여섯명의 작가를 만난다. 이 작가들이 관찰한 균열-해체-유예-재구성의 지점을 신유진 작가가 짚어낸다.

개인적으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 대한 에세이가 인상적이었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작가가 이민자로서 프랑스어를 '적어(敵語)'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생존을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고 쓸수록 모국어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적의 언어'라고 한다. 작년에 이 책을 처음 읽고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이렇게 간결하게 썼다는 점이 놀라웠는데 그 이유가 <나를 균열내기> 이 책에 써있었다.

“그는 한 번도 적어에 복종한 적이 없다. 모방과 흉내 내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정복한 것도 아니다. 끝까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는 못했으니까. 대신 그는 그 불완전한 언어를 감추지 않고 썼다. 그의 문장은 짧고 묘사는 부연 없이 간결하다. 복잡한 감정 표현도 생략되고 좁은 어휘로 이루어진 단순한 문장들이 이어진다.(p.70)”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썼기 때문이었구나, 라는 점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꽤 벽돌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이 잔인하고 긴 소설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마음에서 일어났을, 균열과 붕괴, 유예, 재구성의 과정이 스쳐지나간다. 이 책의 완성이, 작가에게 ‘다만, 새로운 자신이 되기 위해’ 어떤 의미였을지 회상하게 되는 독서시간이었다.

또,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는 주변에서 추천을 많이 받아 관심있던 책이었다. 모로코 출신의 이 작가에 대해 <나는 불을 가져가리라>의 책과 연관하여 프로메테우스의 불씨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슬리마니의 불은 세계의 어둠을 가차 없이 비추고, 그 안에는 솔직한 만큼 폭력적인 진실이 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문명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이중적 선물이었듯, 슬리마니의 불도 다르지 않다. 진실과 고통은 언제나 함께한다. 그러니 마지막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이 불을 가져가겠는가.(p.131)”

진실과 고통이 수반하는 이 불에 대해 생각해본다. “몰리나르가 그랬듯이(...)다만, 내가 되기 위해.(p.199)” 이 불을 선택한 이 책 속 열 여섯명의 작가들과 이들의 작품을 번역해온 신유진 작가를 통해 나 자신을 균열낼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웠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불을 내 손에 쥘지 선택하는 것 뿐이다.


이 책은 ‘읽고 싶다’는 마음을 부풀려주는 풍선 같은 책이다. 작가가 한 명씩, 한 명씩 호명하여 통찰하고 마지막페이지에 그 작가만이 가진 통찰을 짚어주며 마무리하는 부분마다 당장 ‘읽고 싶다’라는 마음의 풍선이 점점 더 커진다.

#나를균열내기#하니포터#하니포터12기#한겨레출판#신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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