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안정 - '결혼'이 만드는 꿈과 불안, 그 너머 관계의 기하학
안희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과 안정>

저자는 문화인류학 연구자이자 작가로 '감정이 개인과 사회에 무슨 일을 하는지에 관심 있다'. 전작 <증명과 변명>에서는 성과주의와 획일화된 생애 주기 강박 속에서 죽음을 계획했던 20대 남성 친구와의 인터뷰를 담았다. 능력을 증명해야만 생존을 허락하는 사회적 폭력과 그 이면의 좌절에 대해 입체적으로 써냈기에 제 66회 한국출판문화상 올해의 교양서 10종에 선정되었다. 이 책에서도 저자 특유의 대화의 해석, 구조적 통찰은 여전하다.


'결혼'에 대해 90년대생 아홉 명의 인터뷰를 "분해하여 이해해봄"(p.203)에 대한 이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있다. "하나, 만을 향하는 문", "둘, 만의 타원"이라는 1,2장을 읽을 때는 <사랑과 안정>이라는 평온한 단어들이 병치된 제목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이 90년대생들이 경제적 불확실성 속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적 정착지로 수렴하기 위해 필수조건인 '안정'의 실체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 마지막 3장 "셋, 세면 고개를 돌려"에서는 기존 정상가족 중심의 결혼 제도를 넘어, 제도 바깥에서도 서로를 지탱할 수 있는 책임과 돌봄의 새로운 '관계의 기하학'- 원뿔을 수직으로 잘랐을 때 생겨나는 열린 쌍곡선은 " 제도적, 사회적 감시로 고립된 둘 만의 세계가 아닌, 어떤 제도를 택하든 사회적 규범에 갇히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어 세계를 향해 자신의 독특함을 내어놓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p.221) -을 모색하며 대안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40대의 기혼 여성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90년대생이 온다>를 떠올렸다. 나에게 90년대생이란 탈권위와 '워라밸'을 따지며 조직의 구성원으로서든 소비자로서든 호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특성을 가진 현실주의적 태도를 지향하는 세대에 속한 이들이다. 이 책은 그 90년대생들의 결혼관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국가에의해 의무화된 "어른의 1인분"(p.170)에 대해 강박을 느끼고, 나에게는 생애 주기의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겼던 결혼에 대해, "가부장제에 대한 부역(p.176)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읽으며 "그들(90년대생)은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공감이 간다. 동시에 결혼이라는 "평범한 삶에의 지향은 규범을 어겼을 때 돌아올 처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근간으로 하고, 이 공포는 고유성과 평범함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만든 뒤 고유성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결국 본래의 목표를 좌절시키기까지 한다."(p.185) 라는 영화 <어쩔수가 없다>의 만수를 통해 저자가 얻은 교훈은, 부모의 잘못을 여과없이 보며 성장해온 자식의 속마음을 읽는 느낌으로 읽혔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그들의 눈에 얼마나 불행해보였던 것일까.

하지만 3부에서 등을 기대고 측면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옆을, 주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안정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힘"(p.325)을 이야기하는 저자를 보며 결혼의 전제들 중 대부분이 우리 사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맺는 관계의 본질을 되묻고, 사적 결합을 넘어선 연대의 가능성을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랑과 안정을 추구할 90년대생들의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한편 이 책은 다른 지점에서 나를 울컥하게 했다. 나의 아이는 2010년 이후에 태어난 잘파세대고 이 90년대생들과 또 다를 것이다. 나도 저자의 부모님처럼 "네가 무엇이어도 괜찮다"는 멋진 말을 남길 줄 아는 부모가 되고싶다. 저자에게 <러시아 인형처럼>을 추천해주면서 외롭게 두지 않을 친구가 있길. 저자처럼 열린 쌍곡선의 사랑과 안정을 찾아가는 삶을 살길. 이 책이 우리 세대와 우리 아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사랑과안정#한겨레출판#하니포터#하니포터13기#안희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뇌를 바꾸려는 사람들 - 프랑켄슈타인에서 현대 신경기술까지, 뇌과학으로 만나는 신경윤리의 질문들
김명호.류영준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라는 흥미로운 사이언스 그래픽노블이 어크로스에서 출간되었다. 궤도가 뜨기 전부터 활약해온 과학 커뮤니케이터 하리하라님의 책 중 하나의 그림을 맡았던 김명호 저자님은 그 외에도 다양한 과학관련 책의 글과 그림을 그려왔다. 공저자 류영준님은 서울대에서 인문의학(의학 역사와 생명윤리)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병리과 전문의로 뇌 부검, 연구 및 진단 뿐 아니라 매년 특정 신경과학 기술을 주제로 인문학자·신경과학자와의 다학제 연구를 이끌며 꾸준한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를 이루는 등 이 분야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18세기의 개구리 다리 실험과 <프랑켄슈타인>에서 출발한, 전기라는 새로운 에너지가, 생명의 본질을 밝힐 도구에서 뇌 국소화 이론, 전기충격요법, 신경가소성의 발견을 거쳐 뇌심부자극술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로 구체화되며 인간의 뇌 회로를 조절하는 신경기술로 발전했다.

책 중 인상적인 부분은 갈바니와 볼타의 동물 전기 논쟁이다. 역사 속 수많은 학자들이 밝혀낸 이론에 대해 서로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발전시켜온 오늘날의 과학의 위치를 체감할 수 있었다. 한편, 갈바니의 조카 조반니 알디니의 에피소드는, 삼촌 덕분에 죽다 살아나 은혜를 갚기 위해 ‘갈바니즘’으로 삼촌의 이론을 명명하며 선전가가 되는데 이 동기가 생각보다 너무 비과학적이라 아이러니했다. 갈바니즘의 참을 밝히기 위해 수많은 조류, 양, 송아지, 소들과 사형수 시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동물 전기의 존재를 입증하고 갈바니즘이 의학적으로 유용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를 시연하기 위해 수많은 관객 앞에서 사형수의 시신에 전류를 흘려보내 얼굴이 일그러지고, 팔다리가 들썩이는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런 실험이 알디니의 목표와는 달리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생명의 비밀을 손에 쥐려는 괴상하다 못해 미친 과학자처럼 그려졌고, 그의 실험은 공포와 선정성의 영역으로 밀려났다.”(p.106)점이 안타까웠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치료’를 넘어 ‘향상’으로 나아가는 지점의 기술 윤리를 짚는다. 첨단 보조기구와 인지 향상 약물, 뇌 자극술은 정상성의 기준, 사회적 불평등, 강제성 여부와 같은 신경윤리학적 질문을 동반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를 떠올렸다. 원체 억만장자로 일론 머스크 개인의 인기가 높아 그의 빅팬이라면 선뜻 뇌도 갖다 바치지 않을까, 하는 오지랖 생각이 추가되었다. 한편 주인공의 뇌 안에 시리와 빅스비 같은 비서가 탑재되어 있는 SF를 몇 편 읽은 터라, AI처럼 뉴럴링크의 기술이 우리가 사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SF 소설의 내용이 현실화되는 예측이 약 40~50%라고 하니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단지 이 기술이 상용화되기 전에,

“과학과 기술은 윤리적 문제를 외주화하는 오랜 관행이 있습니다. 과학계는 발견과 개발에만 몰두할 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윤리적 책임은 사회로 떠넘기곤 했습니다.”(p.260)

이처럼 책임에 대한 논의가 먼저 되어야 한다. (“윤리적 성찰은 기술 발전의 일부가 아니라, 발전을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취급되었어.”(p.260)라고 비둘기가 말하는 장면이 나의 최애다. 조류도 아는 사실을 우리 인간은 너무 늦게 아는 관행 역시 있어왔다.) 1부에서 전기 에너지의 발견과 사용이 윤리적인 방향이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희생 값을 치루고 얻어낸 결과라면 앞으로의 뇌신경과학기술 만큼은 “연구와 개발의 과정 속에서 함께 고민”하며 발전해가야 하지 않을까? 뇌를 변화시켜 인류가 얻을 기술의 이익보다 사회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통제의 한계가 먼저임을 알려주는 책, <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었다.

탐구력이 필요한 학생과 넘치는 학생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특히 메디컬 계열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경우, 그래픽 노블이라 가독성이 좋아 짧은 시간에 읽어내려갈 수 있으면서 많은 윤리적인 문제를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다.
#어크로스#뇌를바꾸려는사람들#김명호#류영준#신경윤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상처에 시럽 뿌리기 - 셋셋 2026
이영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4년부터 한국문학의 샛별이 될 작가들을 소개해온 ‘셋셋’시리즈의 세 번째 문학 앤솔러지 <상처에 시럽 뿌리기>를 소개한다. 작가, 독자, 출판사 이 셋의 만남을 ‘셋(set)’한다는 뜻으로 한겨레교육과 한겨레출판이 함께한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들의 첫 작품이라 더 의미있다. 6명의 시와 소설들이 메인이지만, 맨 마지막의 ‘상처와 시럽-당신에게’라는 편지형식의 글들도 참 좋았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스팸아닌 편지이기도 하거니와 이들의 작품을 하나씩 읽은 터라 그 감정들을 공유한 특별해진 사이로 느껴져서 일까, 이분들의 글들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상처에 시럽 뿌리기>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엥?스럽(!)다. 상처에 시럽을 뿌려, 약이 아니고? 소금이 아니어서 다행인가? 아닌가? 설탕도 소금처럼 아프지 않나? 시럽이 코팅처럼 굳으면 그 속에 상처는 나을까? 체온이 36.5도라 코팅이 안되지 않을까? 점점 소설과 상관없을 것 같은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문 채 책을 넘긴다.

살인당한 주인보다 초코라는 개를 더 안쓰럽게 여기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줌마,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는 한 남자, 피에르를 무작정 기다리고 빌리를 위로하는 시적 화자, 10년만에 장미희에서 장은혜로 바뀐 이름의 엄마를 만나게 되는 재연, 눈이 안보일수록 동생과 사이는 더 멀어지지만 두정언니와는 더 가까워지는 지영이와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상처 가득한 사람들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는 시인도 만난다.

최근 나는 문학보다 비문학을 더 선호한다는 성향을 눈치챘다. 세상에는 더 알아야 할 일들이 많고, 내 자신의 내면보다 외부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다고 해석해왔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내가 문학을 멀리한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여름의 갈래에서’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어머니가 포터를 몰아 아버지를 찾아내는 해피엔딩의 순간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부모님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릴 적 읽던 책들과 달리 어른이 되어 접하는 책들은 더 이상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나는 새가 없는 공원과 현종이, 빌리같은 사람, 두정언니, 남는 의자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이 익숙한 상처를 내 눈 앞에 들이민다. 내 삶 속 어떤 사람들과 닮아있는 이 이야기들이 익숙하니 아프고 미웠다. 문학은 보고 싶지 않은 일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저는 이 소설이 누군가에게 대단한 위로나 해답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 소설을 읽고 당신의 아버지를 더 미워하게 된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자녀를 안쓰럽게 여겨도 좋고, 어머니의 쓸쓸함을 오래 생각하거나 무심함을 탓해도 좋습니다. 저는 소설이 반드시 누군가를 용서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사람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p.185)

상처에 시럽을 뿌린다는 의미가 뭔지 알 것 같다. 이 책을 읽는다고 상처들이 낫진 않는다. 하지만 내 상처에 나도 모르게 뿌려둔 나만의 시럽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렇게 다른 이들의 상처를 보고 ‘너만 아픈거 아니야, 다들 그렇게 살아’ 대신, ‘아프겠다’, 라는 말을 할 줄 아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셋셋#한겨레출판#하니포터13기#하니포터#이영주원영원강다운김나은신은솔이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숨은신 - 전래된 한국의 미의식
강병우 외 지음 / 히스테리안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과학이 판치는 오늘날, 숨어버린 우리나라의 전통 ’신‘’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는 부채를 흔들고 칼춤을 추는 무당을 떠올렸더랬다.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 이 책은 하나의 '신'을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유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숨은 '신'의 얼굴을 살펴보는 연구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p.12)

10인의 공저를 눈여겨 봤어야 했다. <숨은신—전래된 한국의 미의식>은 10명의 예술가와 독립 연구자들이 만들어낸 공동 연구 결과물이다. ‘신’이라는 동음이의어를 공유하면서 의미는 다른 다섯 개의 한자- ‘불탄 끝 신’, ‘걷는 모양 신’, ‘아이 밸 신’, ‘나아갈 신’, ‘믿을 신’-이 펼치는 변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불탄 끝 신’에서는 신이 사라진 자리를 찾는 저자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 수용소, 3.1운동이 일어났던 광화문과, 이름없는 민중들이 함께 했던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졌던 공간의 비극을 주시한다. 이 공간 속 존재들은 나로 하여금 "세월을 맞으며 모서리가 둥글게 마모"(p.25)된 돌들이 쌓여 미세하게 흔들리는 돌탑을, "탁 트인 부여의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그리는 아지랑이"(p.65)를 감각하게 만든다.

"저 먼 옛날에도 생이 시작되는 순간마다 있었을 어떤 힘이 나를 관통한다."(p.65)

2장 ‘걷는 모양 신’의 처음 글에서는 방싯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한 명창의 소리를 듣는다. 이 목소리는 평창, 홍천, 의성, 동두천, 목포, 서산, 부여로 독자를 끌고 다닌다. 그곳에서 들은 소리, 즉, 음악에는 이야기들이 실려있고 각각의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불현듯 허공에 고한 소리"(p.142)를 남긴다.

3장 ‘아이 밸 신’에서는 '한'에 대해 "애도를 통한 슬픔의 해소가 스스로 차연(differance)함을 받아들이는 태도"라 정의하며, "애도들이 지연"(p.207)되었기에 한이되었다고 설명한다. "들을 수 없을 것을 들으려는 이 고통스러운 태도들"(p.217)을 우리의 숙제로 남긴다.

4장 ‘나아갈 신’ 에서는 우리의 미래, 어린이에 대한 글이다. 저자는 ‘어린이 다시 쓰기'에서 신분에서 나이로 바뀐 오늘날의 불평등함을 찾아내며 자신의 학급 어린이들에게 '예의있는 반말'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하기도 하지만, 빠른 성찰과 사과를 통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지막 5장 ‘믿을 신’에서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미를 '비애'로 해석하며 굳어진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미의식을 어떻게 다룰지 질문으로 던지며 시작한다. 김지하 시인이 '한'을 '흰 그늘'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 것과 앞서 4장까지의 저자들이 찾아냈던 '숨은 0'들은 5장의 질문에 대한 실마리로 읽혔다.

" '흰'을 어둠을 품은 빛으로 은유" 하고, "삶의 결을 온몸으로 통과한 자의 감각으로 재해석"(p.282)하며 "우리는 어둠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함께 서 있기 위해 대화를 이어간다"(p.289).

또 각설이 품바의 말과 소리 사이에서 찾아낸 신명과 녹음이라는 매개를 통해 재현된 메아리의 변주는 이 과정에서 지연된 애도들이 해소되는 경험으로 읽혔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기록을 통한 이야기가 남겨온 무수한 "시간의 무게와 두께"(p.334)가 ‘이어’짐을 느꼈다.

"예술가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경험을 연구의 재료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삶은 다시 사회와 역사, 문화의 맥락 속으로 확장됩니다."(p.11)

열 명의 저자들이 남긴 이 책이 내 삶의 맥락에서도 확장되기를, 돌탑을 쌓듯 이 책을 책장에 꽂아본다. 다른 책들과 함께 어둠을 밝히기를. 흰그늘을 만들어내기를. 또 다른 책으로 시간의 무게와 두께가 이어지길.

#숨은신#전래된한국의미의식#강병우강정아김민주김수환남궁예은손혜림오윤주유은이연화이인현 #히스테리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보적 성향을 가진 ‘더 네이션’ 잡지의 편집자로 일했던 저자 마거릿 주혜 리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연구소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펠로십을 받아 봉인되어 있던 가족의 역사를 추적했다. 언론학을 전공한 저자는 할아버지 이철하 선생의 독립운동적 공적을 밝혀냈고, 사후 60여 년 만에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이 책은 할머니와의 세 차례에 걸친 깊은 인터뷰를 축으로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3부 구조를 취한다. 저자의 아버지가 두 살 때 돌아가신, 중년은 커녕 할아버지가 된 적이 없었던 스물 일곱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항일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활동을 이끌었으나 공산주의 이력으로 인한 수감생활로 집안이 숨겨야 했던 인물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조부라는 한 명의 개인 일대기를 넘어, 두 자녀를 홀로 키워내기 위해 남편의 책을 불태워야 했던 할머니의 침묵, 그리고 한국전쟁과 도미를 거치며 후손들이 짊어져야 했던 소외의 역사를 저자는 담담하게 기록했다.

“아무도 일제강점기 기록에 담긴 정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시절에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자기 가족이 식민 지배 세력, 즉 일제에 협력한 인물로 지목될지 모를 기록을 누가 밝히고 싶어 하겠는가? 그것은 아무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오점이다.”(pp.290-291)

이 책 한 권으로 그동안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한국 역사의 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저자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역사가, 개인에게는 애도되지 못한 과거가 되고 어떻게 현재의 후손에게 미치는 파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대물림된 침묵을 깨뜨림으로써 개인의 치유가 어떻게 사회적 역사의 복원과 연결되는지를 증명하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됨을 일깨운다.

개인적으로는 <비밀의 들판>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아스포델 들판이나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명계의 들판이 떠올랐다. 억울한 사연의 영혼들이 숨겨진 공간으로서의 ‘들판’.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원제 ‘Starry Field’와 한국어 제목인 <비밀의 들판> 사이를 오갔다. 아버지가 되찾고자 했던 할아버지의 서사를 저자가 이어갈 때, 그리고 할아버지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내던 부분을 읽으며 제목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가려진 들판의 풀숲을 헤쳐나가며 비로소 드러나는 뿌리는 정체성의 근원과 연결되어 비밀이 해소되고 수많은 별들이 가득한 들판을 비춘다.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은 ‘비밀의’와 ‘별이 빛나는’ 이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었다. 또, 맥클린의 ‘Stary Night’의 멜로디가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이 싱어송라이터가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을 기리기 위해 이 노래를 지었듯, 이 책이 저자의 가족의 삶과 정체성을 기리기 위한 책임을 밝히는 상징이었음을 깨닫는다.

한 여배우가 ‘4대째 의사집안’이라고 말했다가 알고보니 조상이 친일파였던 안상호였던 점을 네티즌들이 파묘해내 연예계 뉴스로 시끄러운 요즘이다. 침묵의 세월동안 부를 축적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를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이 배우가 잘한 점도 없지만 몰랐었다면,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건강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조부처럼 비밀의 들판에 묻힌, 항일을 했던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밝혀져야 한다. 이대로 묻혀있는 억울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다.

#비밀의들판#하니포터#하니포터12기#한겨레출판#마거릿주혜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