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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진보적 성향을 가진 ‘더 네이션’ 잡지의 편집자로 일했던 저자 마거릿 주혜 리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연구소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펠로십을 받아 봉인되어 있던 가족의 역사를 추적했다. 언론학을 전공한 저자는 할아버지 이철하 선생의 독립운동적 공적을 밝혀냈고, 사후 60여 년 만에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이 책은 할머니와의 세 차례에 걸친 깊은 인터뷰를 축으로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3부 구조를 취한다. 저자의 아버지가 두 살 때 돌아가신, 중년은 커녕 할아버지가 된 적이 없었던 스물 일곱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항일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활동을 이끌었으나 공산주의 이력으로 인한 수감생활로 집안이 숨겨야 했던 인물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조부라는 한 명의 개인 일대기를 넘어, 두 자녀를 홀로 키워내기 위해 남편의 책을 불태워야 했던 할머니의 침묵, 그리고 한국전쟁과 도미를 거치며 후손들이 짊어져야 했던 소외의 역사를 저자는 담담하게 기록했다.
“아무도 일제강점기 기록에 담긴 정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시절에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자기 가족이 식민 지배 세력, 즉 일제에 협력한 인물로 지목될지 모를 기록을 누가 밝히고 싶어 하겠는가? 그것은 아무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오점이다.”(pp.290-291)
이 책 한 권으로 그동안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한국 역사의 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저자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역사가, 개인에게는 애도되지 못한 과거가 되고 어떻게 현재의 후손에게 미치는 파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대물림된 침묵을 깨뜨림으로써 개인의 치유가 어떻게 사회적 역사의 복원과 연결되는지를 증명하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됨을 일깨운다.
개인적으로는 <비밀의 들판>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아스포델 들판이나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명계의 들판이 떠올랐다. 억울한 사연의 영혼들이 숨겨진 공간으로서의 ‘들판’.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원제 ‘Starry Field’와 한국어 제목인 <비밀의 들판> 사이를 오갔다. 아버지가 되찾고자 했던 할아버지의 서사를 저자가 이어갈 때, 그리고 할아버지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내던 부분을 읽으며 제목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가려진 들판의 풀숲을 헤쳐나가며 비로소 드러나는 뿌리는 정체성의 근원과 연결되어 비밀이 해소되고 수많은 별들이 가득한 들판을 비춘다.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은 ‘비밀의’와 ‘별이 빛나는’ 이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었다. 또, 맥클린의 ‘Stary Night’의 멜로디가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이 싱어송라이터가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을 기리기 위해 이 노래를 지었듯, 이 책이 저자의 가족의 삶과 정체성을 기리기 위한 책임을 밝히는 상징이었음을 깨닫는다.
한 여배우가 ‘4대째 의사집안’이라고 말했다가 알고보니 조상이 친일파였던 안상호였던 점을 네티즌들이 파묘해내 연예계 뉴스로 시끄러운 요즘이다. 침묵의 세월동안 부를 축적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를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이 배우가 잘한 점도 없지만 몰랐었다면,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건강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조부처럼 비밀의 들판에 묻힌, 항일을 했던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밝혀져야 한다. 이대로 묻혀있는 억울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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