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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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작정단 마지막 도서다. 근 4개월 간의 대장정(?)을 끝내려니, 아쉬운 마음뿐이다. 마지막 도서는 10월 극장에서 영화로 개봉한 <펭귄 하이웨이>의 동명 원작 소설 《펭귄 하이웨이》. 한국에선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유명한 일본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의 판타지 성장 어드벤처 소설이다.


 스스로 '일본에서 메모를 가장 많이 하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자부하는 아오야마는 노트를 통해 모든 것을 연구하는 소년이다. 사건은 어느 5월부터 마을에서 갑작스레 펭귄이 나타나면서 발생한다. 펭귄의 종류와 서식지, 발생 이유 등을 조사하던 아오야마는 펭귄의 존재가 자신이 좋아하는 '치과 누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치과에서 일하는 누나에게는 기분에 따라 펭귄을 만들거나, 펭귄 이외의 박쥐나 식물을 만드는 능력이 있던 것이다. 이후 같은 반 친구 하마모토를 통해 숲속 초원에 있는 투명 물체 '바다'를 발견한 아오야마. '바다'는 지상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떠 있고 지름 5미터 크기에서 부풀거나 축소하는 우주선 모양의 구로, 아오야마는 초원에서 '바다'를 대상으로 친구 하마모토, 우치다와 함께 연구를 거듭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바다'가 펭귄, 누나, 마을에서 이상 현상을 일으키던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펭귄 하이웨이》라는 제목은 '펭귄들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올 때 으레 지나가는 루트'를 가리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이 단어가 아오야마가 성장하면서 겪어야 할 첫사랑과 모험, 아픔을 총칭하는 말이라고도 생각했다. 아오야마가 누나가 사라진 뒤 쓴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메타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또한, 아오야마의 아버지는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국면에 서 있다고 말하는 아오야마에게 '미지의 세계와의 조우'라고 표현하며 매일 많은 것을 기록하라고 말한 바 있다. 아오야마에겐 치과 누나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었을까. 첫사랑 누나와의 하루하루는 펭귄과 '바다', 재버워크 등의 이상 물체로 가득한 판타지만큼이나 기묘하고, '엄마와 다른 느낌을 가진 가슴'을 가진 누나의 정체는 소설 마지막까지 도통 수수께끼. 2차 성징을 앞두고 가슴에 여실한 흥미를 보이는 아오야마에겐 '누나'라는 첫사랑이 그렇게 다가왔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 극장에서 영화를 먼저 보고 왔다. 책을 더 재밌게 읽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펭귄 떼가 누나와 아오야마를 등에 업고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이 아름답고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누나의 '가슴'에 집착하는 몇 장면이 불쾌했던 기억도. 원작에서도 아오야마의 가슴 타령이 뜬금없이 등장해선 몰입을 방해할까 내심 걱정했지만, 소설 속 아오야마는 성에 눈뜬 호기심 많은 소년으로 적당히 그려진다. 그리고 아오야마의 '가슴 상상'은 아오야마가 누나를 동경하는 인물이나 이상 인물이 아닌 '여성'으로 인지하고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나 어림짐작 해본다.


 《펭귄 하이웨이》는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성장 소설을 펭귄을 위시한 다양한 판타지와 모험으로 가득 채워놓은 책이다. 내게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상상력 세계에 처음 입문하게 된 책이기도 했다. 흠뻑 빠져들고 나니, 모리미 도미히코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음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은 모리미 도미히코의 유명 작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해야겠다.

전철에서 나는 누나에게 여러 가지에 대해 얘기해줄 생각이다. 어떻게 펭귄 하이웨이를 달렸는지, 누나와 헤어진 후 내가 탐험한 장소와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눈을 본 것들, 내가 스스로 생각한 모든 것들. 그래서 누나를 다시 만나는 그 순간까지 내가 어떻게 얼마만큼이나 어른이 됐나 하는 것.
그리고 내가 얼마나 누나를 좋아했나 하는 것.
얼마만큼, 다시 만나고 싶어 했나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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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종사자를 위한 필수 도서와 참고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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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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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하는 마음
은유 지음 / 제철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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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세트 - 전4권- 개정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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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모험 - 플라톤에서 피케티까지 상상력을 불어넣는 경제학자들의 도전
니알 키시타이니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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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누구나 들어봤지만 가까이 가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편안하고 위트 있는 문체로 단 10페이지에!


 상경계열 전공자지만 진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경제/경영 관련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부키에서 출간된 《경제학의 모험》의 서평단에 신청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제 경제/경영 책 좀 읽자! 그리고 서평단에 덜컥 당첨됐을 때는 약간의 우려가 있기도 했다. 내가 책을 잘 읽을 수 있을까, 너무 지루해서 힘든 독서가 되지 않을까. 《경제학의 모험》은 그런 나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준 책이었다. 


 경제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악명 높은 책이 있다. 바로 《맨큐의 경제학》. 하지만 '악명 높다'는 말은 경제학을 싫어했던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일 뿐이고, 사실 《맨큐의 경제학》은 경제학 입문자들을 대상으로 쉽게 쓰여진 경제 이론 책이다. 그리고 《맨큐의 경제학》보다 즐겁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맨큐의 경제학》은 전공책이다 보니, 그래프와 표로 가득하고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이론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강압으로 넘실댄다. 그에 비해 《경제학의 모험》은 표지 카피처럼 '플라톤에서 피케티까지' 유려하게 흘러가면서, 경제학의 기본 이론들과 경제학자들이 이론은 만들게 된 배경을 가독성 높은 문체로 설명한다. 덕분에 지하철에서 이동하면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쉴틈없이 읽었다.


 1부는 자본가와 노동자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이론을 밝힌 사람들, 이를 테면 프랑수아 케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카를 마르크스 등 이름만 들어도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유명 경제학자들이 먼저 등장한다. 최초의 경제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리스 철학자부터 성경 말씀이 진리였던 중세시대, 16세기 중상주의 시대, 산업혁명 시대, 자본주의 시대까지 굵직한 서양사를 이야기하며 경제학자들의 등장을 함께 다룬다. 2부는 소비자다. 그 유명한 경제 용어들 '한계 효용',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 완전 경쟁', '독점적 경쟁'들이 등장하고, 3부 '정부와 경제학자들의 관계와 역사'를 지나 4부 '투자자들의 등장과 현대 소비자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사회주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샤를 푸리에와 로버트 오언, 앙리 드 생시몽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1부에서 산업혁명 등장 이후 회의론자들을 언급하며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푸리에가 주창한 '마음껏 정념에 따를 수 있는 공간'인 '팔랑스테르', 오언의 '시범 마을', 생시몽의 과학자와 기업가가 다스리고 협동 정신으로 무장한 사회. 보면서 이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시초라고 말하는 문장을 읽고는 아차 싶었다. 그렇지, 사회주의가 이렇게 시작됐던 거였지 하고. 그렇게 보면 자본주의, 사회주의의 장점과 단점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놓여져 있는 듯하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더욱 재밌을 책 하나를 소개한다. 문소영 신문기자가 쓴 《그림 속 경제학》이다. 이 책과 비슷한 구성으로 경제학사를 다루고 있어,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를 복습할 수 있고 뒷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화를 보면서 프랑수아 케네의 중농주의를 다시 보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경제학의 모험》을 소개한 괜찮은 영상을 하나 보았다. 같이 첨부한다. (https://youtu.be/ESDc8TvDHy0) 그나저나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앵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꼭 읽어봐야겠다. 진짜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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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기분 1
윤파랑 지음 / 비아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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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순간에도 누군가는 나와 전혀 다른 기분을 가진다면 결국 모든 기분은 1인용이 아닐까.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던 만화가 단행본으로 나왔다. 현재 총 3권 세트로 완결 출간된 상태고, 나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1권만 우선 읽게 되었다. 


주인공은 치열하게 1인용 기분을 끌어 안으며 살아가는 젊은 출판편집자 '윤파랑'이다. 작가 윤파랑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 있는 웹툰으로 편집자 일에서 느끼는 피로와 걱정, 고양이 모모의 집사가 되는 과정, 친구와 인간 관계에서 겪는 고충도 함께 볼 수 있다. 평소 윤파랑이 어렵게 생각했던 차장의 '지쳤다는 신호'를 알아채고 파랑만의 방법으로 (차장은 디자이너였는데 편집자 파랑은 저자로부터 디자이너에게 보내는 사인을 받아다가 책을 따로 마련한다.) 차장을 위로하는 에피소드, 이후 그 차장이 파랑이 지쳤을 때 위로를 건네는 에피소드, 파랑이 친구들과 소설 쓰는 방식에 대해서 토의하다가 '우리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들은 각자가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었구나' 깨닫는 에피소드, 서로 원수라고 생각했던 팀장과 대리가 알고보니 연인 관계였음을 알게 되는 에피소드 등이 떠오른다.


웹툰을 찾아보는 편이 아니라서 《1인용 기분》 역시 이번에 알게 되었다. 《1인용 기분》은 네이버에서 연재 당시 20~30대 독자층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웹툰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 역시 공감하고 긍정하게 됐고 당시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웹툰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사회초년생이자 20대로서 너무도 익숙한 주제였기 때문에 그랬을까. 한편으론, 한겨레출판편집학교의 수업을 수강하고 있는 입장에서 편집자의 하루를 엿볼 수 있어 소중한 책이었고, 더불어 일부 악질적인 문단 술자리 에피소드를 피할 수 없어 슬픈 책이기도 했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문장들이 참 예쁘고 좋았다. 그 문장들 몇 개 남겨둔다. 단행본 마지막까지 읽어보고 싶다.


가치와 가격은 동의어가 아닌데 남들이 왜 자꾸 나를 재단하는 걸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저울에 올려지는 지긋지긋한 기분들.

늦은 밤, 집에서 언니가 준 손편지를 읽다가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마음, 그게 바로 다정함이라는 생각을 했다.

집 열쇠를 예쁜 것으로 고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열쇠에 거는 키링은 다들 자신의 기준에서 예쁜 것으로 고르려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집 열쇠를 보며 예쁘다고 웃을 일은 없지만 열쇠고리를 보며 예쁘다고 웃을 일은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순간들, ‘잘‘ 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들도 내게는 이런 키링 같은 것이었다. 화분에 물을 주는 일, 굳이 손편지를 쓰는 일, 혼자여도 예쁘게 차려놓고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일.
나는 믿는다. 예쁜 쓰레기들이 가끔은 나를 버티게 한다고, 그러니까 쓸모없다는 게 꼭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고.

내일에 대한 불안과 어제의 근심이 뒤섞였지만
느리고 쓸모없어서 고마운 쉼표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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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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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 읽은 페미니즘 도서는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였다. (그전에 읽었던 《월경의 정치학》은 페미니즘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읽었던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성의 월경 억압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에 익숙지 않은 분들도 읽기 좋은 페미니즘 책이다.) 다음으로 읽었던 책은 《빨래하는 페미니즘》,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였고 그 다음이 이 책이었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종종 인용되는 혁명적인 단어 '맨스플레인'. 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한 단어다. 리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을 정의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이 책에서 유명한 맨스플레인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한다. (리베카 솔닛에게 리베카 솔닛 책을 맨스플레인했던 그 남자!) '맨스플레인'은 2010년 <뉴욕 타임스>에서 '올해의 단어' 중 하나로 선정됐고, 2012년 미국 언어 연구회의 '가장 창조적인 단어' 후보에도 올랐다. 또한 2014년온라인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 


 책은 맨스플레인 에피소드를 담은 표제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포함하여 산문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가부장 한국을 벗어나면 내가 여성으로서 조금 더 인간다워질 수 있을 거라고 희망했지만, 어쩌면 그건 일종의 망상에 가까웠던 것 같다. 리베카 솔닛이 통계로 설명해주는 미국 역시 여성에겐 지독히도 폭력적이고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한국보다 몇 십년은 앞섰고 그에 대해 올바르게 자각하고 있는 사람도 한국보다 많으니 현재 대한민국보단 그나마 나은 '허랜드'란 건 변함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베카 솔닛 같은 작가를 통해 끊임없이 여성의 이야기가 화두에 오르고 전해지는 양상 자체가 우선 중요하다고 본다. 저술가이자 비평가, 역사가, 여권운동가인 리베카 솔닛은 뛰어난 통찰을 지닌 작가이자 뜨거운 문장을 쓸 줄 아는 작가다. 덧붙여, 재밌는 글을 쓰는 작가다. 산문을 차례차례 읽다보면 저절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페미니즘 입문서로도 좋지만, 재밌게 읽기도 좋은 인문 책이다. 


 리베카 솔닛은 여자들의 입을 막고, 여자들을 가르치려 들고, 신뢰하지 않고 종국에 여자들에게서 자유를 뺏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해 일갈한다. '지성은 자지에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타인을 통제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여태 약자 위치에서 눈 감고 귀 막고 버텼던 우리는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지니의 호리병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므로 수많은 장애물을 넘느라 다소 느리게 걸어갈지언정 이상을 향하는 발걸음을 되돌리진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권리를 알게 되었다. 나는 정체성을 잃는 과정에서 내 정체성을 찾고 싶어졌다. 나는 방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고 밤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내게 안전하게 확보해줄 평등 사회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 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여자라면 누구나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확신을 키운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1986년에 작가 마리 시어(Marie Shear)가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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