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노래들 - 한 보편적 주제에 대한 근대 미국과 유럽의 변종들
마틴 제이 지음,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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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의 노래들




우리는 ˝그냥˝ 경험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고 마치 살아가며 얻게 되는 재산과 같이 더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여기 이책 [경험의 노래들]은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개념을 정의하고 해명하며 분석하는 것이다.
저자는 경험의 사유 지도를 그리기 위해 서구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종교사상과 현상학, 프랑크푸르트학파와 포스트구조주의까지 특정사상과 학파를 다루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주제와 패턴을 발견하고 경험의 지적 역사를 그려낸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참 힘들다.
많은 사상가들의 철학에서 경험이라는 특정 개념을 전제하며 이해해야 했고, 사상의 일반적 개념까지 의미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문
경험이라는 말이 정체성을 본질화하고 주체를 구체화하는 데 이용된다는 점에서 그 말을 완전히 포기하고픈 유혹이 들더라도, 경험이란 우리에게 없어도 되는 말이 아니다
결국 ‘경험‘이란 공적 언어와 사적 주관성 사이, 표현 가능한 공통성과 개인들 내면의 형언 불가능성 간의 교차로에 놓인 결절점이나 다름없다.
1장 경험의 재판
그리스인들에서 몽테뉴와 베이컨까지
‘경험‘은 삶이 제공하는 위험과 도전에 직면해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이전의 순수함을 떠나버린 세속성은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 몽테뉴와 인본주의적 경험
‘경험‘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어떤 삶도 역설과 아이러니, 실망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었다.
몽테뉴 자신의 놀라운 평온과 균형, 다시 말해 불확실성과 회의를 감내하고 모순과 모호함의 세계에서 위안을 찾는 능력은 인간 조건의 취약함을, 그리고 실제로 경험될 수 없는 한계점의 불가피함, 즉 죽음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긍정하는 데서 잘 드러난 듯하다.
2장 경험과 인식론
경험론과 관념론의 경쟁
경험의 역할에 대한 실현 가능한 이해를 제시
: 로크와 감각 경험
관념은 감각에 가해지는 외부대상의 작용에 의해 마음에 부여되었다. 빈서판이라는 자신의 은유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 - 관념이 아니라 해도 - 외적 자극에 의해 기록되기에 앞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경험 개념을 마음의 어떤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까지 확장한다면, 분명 어떤 정신적 내용은 경험에 의한 게 될 것이다.
: 회의주의와 자연주의 사이의 흄
흄에게서 경험은 축적된 학습이라는 시간적 차원을 획득했다. 넓은 의미에서의 관습, 습관, 반복은 모두 경험의 일부분으로서 일어날 일에 대한 믿음의 근거를 제공한다.
입증되지 않은 믿음들을 설명할 때 흄은 상상력에 주로 기댄다. 그러나 애매하게 정의된 ‘상상력‘을 설명하지도, 관습적인 압력이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증명해내지도 못하고 의문 만을 남겼다.
: 칸트와 인식적 경험의 초월론화
* 그는 흄이 마음을 심리학적 기능으로 환원하고 논리적 추론과 보편적 이성의 강력한 확실성을 공통감각의 취약한 합의와 습관적 반복으로 대체한 점을 우려했다.
칸트는 경험에 앞서거나 경험을 넘어서는 선험적인 관념들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칸트는 전적으로 경험에 의해 산출되지 않는 인식의 부분을 추적하기 위해 초월론적 방법을 도입했다. 연역적 추론은 외부로부터의 자료의 주입이나 단순한 습관적 반복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의 이러한 국면을 추출할 수 있었다. 특히 초월론적 연역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긴 하나 세계에 대한 모든 지각과 판단에 스며든, 지식의 형식적 측면을 해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것은 오성의 영역이며, 칸트는 오성을 순수한 선험적 이성 및 수수한 후험적 감성과 구별했다.
3장 종교적 경험의 호소
슐라이어마허, 제임스, 오토, 부버
: 칸트와 도덕적 경험으로서의 종교
칸트는 종교가 기초해야 할 토대는 도덕적 경험이다. 신은 도덕적 이성의 요청일 뿐 신학적 교리가 아니다. 따라서 도덕적 명령에 유념하거나 저항한다는 의미에서의 실천은 이론과 인식에 우선하며, 이로부터 교리나 맹목적 믿음에 대한 단순한 동의보다 경험이 우월하다는 것이 결론으로 도출된다.
종교적 경험을 실천이성의 규정하에 포섭시켰던 칸트의 시도는 도전에 직면했다. 칸트가 이성을 이론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으로 구분한 데 불만을 느끼고 더 이상 도덕적 경험에 종속되지 않는 경험의 종교적 변형을 정립하고자 한다. 종교적 경험의 존엄과 가치가 회복되기를 바랐다.
: 슐라이어마허와 심정의 종교
슈래이어마허가 지지하는 것은,
와팅거가 직시하는 ˝경험은 삶의 정신들이 자신의 몫에 따라 형성될 때 내면화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발화의 도움으로 고조된 경험을 갖는 것이다˝
친첸도르프는 ˝이성은 경험을 약화˝시키고 ˝종교는 이성이 경험을 대립하는 한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은 그저 피조물인 우리가 우주를 불순하고 유한한 특수성의 수준에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실정 종교는 규정적 종교로서, 무한한 종교가 유한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하는 것이다˝.
바르트가 보기에 슐라이어마허는 ˝신에 대한 유의미한 진술에서, 신은 술어가 아니라 오로지 주어로만 사유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했다.
: 제임스와 종교적 경험의 심리학
제임스의 가장 근본적 혁신은, 어떤 하나의 전통에서 종교적 개념을 분리한 뒤, 종교적 경험을 그 아래 모인 모든 다채로운 현상들을 수용하는 좀더 넓은 범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경험의 현상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 신학적 범주나 해석적 틀을 통한 개념적 매개에 앞서는, 이른바 순수 경험에의 호소의 타당성을 인정한 것에 대해서도 일찍이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 오토 그리고 누미노제의 경험
오토는 종교적 경험의 초월론적 토대를 회복하고자 했고 신의 온전함을 재확립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저서 [성스러움]에서 신 안에서 ‘전적인 타자‘이자 신성으로 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인 ‘누미노제‘의 순간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종교 체계는 또한, 형언할 수 없는 신의 분노이자 무한한 매력의 원천으로 경험되는 강력한 힘의 감각도 보존하고 있다.
종교는 본유 관념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선험적인 경외감의 능력, 어떤 가능성에 대한 플라톤적 상기나 기억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종교의 측면에서 경험에 호소하는 것은 동시대의 담론에서는 명성을 잃어갔다. 종교적 진리들의 비교를 계속 파고드는 이들은 이제 경험보다는 상징이나 신화의 차원에서 유사성을 찾게 되었다.
: 부버의 체험에 대한 숭배
부버는 점차 경건한 신자의 내면성보다는 (하시디즘) 인간과 신사이의 관계적 영역을 선호하게 된다.
그는 [나와 너]에서 썼듯이, ˝물론 신은 ‘전적인 타자‘이지만 동시에 전적인 동일성, 즉 온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신은 모습을 드러내고 압도하는 전율적 신비이지만, 동시에 나 자신의 자아보다 더 내게 가까운 분명한 신비이기도 하다˝.
4장 미학적 경험을 통한 신체로의 회귀
칸트에서 듀이까지
경험은 미학의 근본적 조건이다. 즉, 감각에 기초한, 본유 관념의 대안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습관적 학습에 의해 생산되어 축적된 지혜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런 전제에서 이제 미학적 담론의 무게중심은 대상보다는 주체와 그의 경험 혹은 판단으로 옮겨 갔다.
: 칸트와 관조적, 반성적 판단으로서의 미학적 경험
미학적 판단에 대한 담론은 창조적 양식보다는 관조적이고 수용적인 양식에서의 경험에 놓였다.
미학적이란 사적이고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만족이다. 실제 대상에 대한 무관심이기 때문에 미학적 경험에서 듣고 읽고 고는 행위에서 실현된 실천적이거나 소유적인 의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 미학적 경험의 자율성에서 주권성으로
예술의 주권성은 이성 자체의 한계를 능가하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뜻했다. 미학적 경험은 궁극적인 형태에서 인간 발전의 모델로 이해됨에 따라 ‘삶‘인 감각 충동과 ‘형상‘인 형식 충동을 유희 충동으로 지양하는 것으로서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학적 경험은 세계에 반응하는 하나의 양식을 넘어, 세계를 변형하고 심지어 구원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양식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미학적 경험을 세계와의 모든 관계와 타인을 아우르는 것으로 확장하는 일이 문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정치의 미학화‘이고 삶을 예술작품으로 동일시한 지독한 나르시시즘이었다.
: 예술작품을 소멸에 맞서 지키기
미학적 경험의 모든 표상에서, 미학적 경험은 관조적이든 생산적이든 자기형성적이든 간에 예술작품을 넘어서 주체를 특권화하는 것을 시사했다. 작품은 주체의 역할에 비해 덜 중요해졌다. 그렇지만 주체쪽으로 기울어지고 상실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극구 찬양받는 미학적 경험조차 예술작품의 사물적 측면을 우회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 균형을 회복하기: 듀이와 경험으로서의 예술
경험은 사물들의 세계에서 투쟁과 성취로 유기체를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초보적 수준의 예술과 같다. 경험은 가장 기초적인 형태에서조차, 미학적 경험이라는 유쾌한 지각의 약속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5장 정치와 경험
버크, 오크숏 그리고 영국 마르크스주의자들
: 그 자체가 목적인 정치적 경험
정치적 경험의 고유한 가치는 그 위치를 공적 영역에 한정짓는 데 있다.
: 버크와 과거 경험의 지혜
경험의 암묵적인 공리주의 혹은 결과주의
: 오크숏과 정치적 합리주의의 신헤겔주의적 비판
모든 곳에서의 경험은 사유와 분리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사유의 형태를 지닌다.
오크숏의 결론에 따르면, 합리성은 ˝연민의 흐름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행위에 우리가 부여하는 자격증으로서,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것인, 활동의 정합성˝이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와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의 경험
대중의 경험이 새로운 평등주의 문화의 창출로 인정될 수 있는 ‘기나긴 혁명‘을 주창했다.
: E P. 톰프슨과 아래로부터의 역사
억압과 투쟁에 대한 자신들의 집단적 경험을 먹고 고통스럽게 자라난 계급의식을 획득한 이들의 유산에 대한 찬가였다.
: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에서의 경험에 대한 논쟁
‘경험‘의 매우 다양한 의미들과 형식들에 대한 개념적 해명과 각각에 함축된 저마다의 역사적 변형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필요하다.
: 최종적인 대차대조표
과거가 제공하는 신중한 교훈들과 현재의 ˝가장 충만하고 열려 있고 능동적인 의식˝이라는 의미를 창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6장 역사와 경험
딜타이, 콜링우드, 스콧, 앙커스마트
: 오크숏과 역사가의 경험으로서의 역사적 경험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 사람들에 의해 ‘경험된‘ 것에 접근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다.
역사란 총체성이 아니라 그렇게 나쁠 것까지는 없는 일종의 ‘악무한‘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경험‘ 자체가 역사를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역사가 ‘과거‘에서 경험을 회복하는 문제가 아니라, 손쉬운 균질화를 거부하는 다수의 상이한 과거들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 딜타이와 과거 체험에 대한 추체험
딜타이의 경험은 절대적인 내재성과 즉각성을 넘어서는 것을 포함하는 상관적인 개념이었다. 현재의 역사가들이 과거 행위자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추체험‘ ‘추구성‘이라고 불렀다. 추체험은 인식론적 이점에 더해, 인간의 가능성의 확장된 범위를 제시해 우리의 삶을 확장하며 변화된 삶을 출현시킨다. 다른 쪽에서는, 서로의 갈등 속에서 경험적으로 흐르는 삶에 대한 충돌과 구조적 거부는 피할 수 없다.
딜타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경험에 대한 반성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지만, 그러한 반성은 규정할 수 없고, 해석의 토대로도 기능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 콜링우드와 과거 사유의 재현
그는 ‘재연‘이라는 말을 지지했는데, 역사적 탐구의 목표로서 과거의 행위들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콜링우드의 재연은 행위 자체의 합리적 동기들과 사유의 의식적 반성성에 대한 편애를 의미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미론적으로 변하기 쉽고 문화적으로 걸러진 사유의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도록 한 초월적 유심론의 길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세대,계급,인종, 젠더 정체성에 관심을 둔 많은 역사가가 이용한, 경험의 집단적 성격은 고려하지 않았다.
: 역사와 매일의 삶: ‘일상적‘ 경험의 극복
우리가 최근 경험의 역사에서 특수한 사건들과 국면들에 대한 특정한 반응으로서의 경험을 외면하는 현상을 인식하고 검토하는 것은, 우리 현실의 자각에, 그리고 기억과 희망을 연결하는 역사가의 임무 완수에 본질적이다.
: 스콧과 언어적 전회
스콧의 주장에 따르면, ‘경험‘은 공감을 갖는 역사가에 의해 현재에 추체험될 수 있는 과거의 생생한 현실이라기보다, 항상 그 자체로 그것이 출현하는 담론적 맥락의 이데올로기적 잔여를 포함하는 하나의 구성된 범주였다.
˝지배적인 담론적 구성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고/자유롭거나 그것과 모순되는 경험˝을 통한 대항 헤게모니 담론의 형성 가능성을 배제한 채 오롯이 경험을 담론의 기능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하려는 그녀의 비변증법적인 시도에 우려를 표했다.
과거의 체험 그 자체에는 근본적 우선성이 결코 부여될 수 없었다.
: 앙커스미트와 경험적 숭고
역사적인 현현들은 우리를 경험에서 떼어놓을 수 있을 뿐인 과거에 대한 어떤 정합적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의 언어가 허용할 수 있는 만큼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과거의 ‘경험‘을 독자에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7장 미국 실용주의의 경험 숭배
제임스, 듀이, 로티
: 미국의 경험 문화
주관성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의 견고함을 약화시키는 어떤 근본적인 일이 발생한 반면에 경험개념은 삶의 공간 위에 새로운 경작지를 바여받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 제임스와 순수 경험의 요청
제임스는 ‘경험‘이라는 말이 근대세계에서 상실되었거나 억압된 것, 즉 통제하고 명령하는 현실의 관습적 방식에 의해 가려진 것에 대한 갈망을 종종 드러낸다.
철학적 관점에서 제임스의 탐구는 궁극적으로, ‘근본적 경험론‘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가 ‘순수 경험‘이라 부르게 된 것을 해명하는 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세계의 원초적인 재료나 물질, 즉 모든 것을 구성하는 재료˝와 동일시함으로써 ˝현재의 순간적인 영역˝이라고 불렀다.
니콜스 같은 논자들의 주된 곤란함은, 제임스가 심리학적 탐구에서 지속했던 것으로서, 삶의 흐름에서 선반성적으로 몰입하는 경험과 동일시되었던 것이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형이상학적 경험 개념이었다. 이는 자아와 타자, 의식과 물리적 실재, 사실과 가치의 이원론적 구분에 앞서는 ‘원초적 재료‘에 상응하는 것이다.
: 듀이와 실험으로서의 경험
듀이는 대상을 완성된 궁극성으로, 자료를 ˝더 나아간 해석을 위한 소재˝로 정의하면서, 실험적 방법이 ˝대상을 자료로 대체한다˝고 까지 했다. 따라서 경험은 실험으로부터 생기며, 이것이 우리를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미래로 나아가게 해준다.
진리는 대상이나 영원한 관념이라는 외적 세계와의 정확한 일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성공적 해결의 결과를 의미한다. 검증은 객관적인 타당성의 독립적인 진단에 의해 확정되는 주관적인 경험의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목적의식적인 계획과 환경적인 반응 간의 ‘상호 대응‘ 혹은 상호 재조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험은 교호적인 개념이 된다.
: 로티의 언어적 초월주의
경험이란 관념은 과거에서 얻을 수 있고, ˝과거 자체를 그것의 타협하지 않은 낯섦 속에서 대면˝ 할 수 있다.
언어의 핵심은 실재가 됐든 ‘경험‘이 됐든 그것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고 좀더 유용한 도구를 구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언어에 의해 매개되어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술을 포함해 상이한 기술들을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 외적인 어떠한 관점도 갖고 있지 않다.
8장 경험의 위기에 대한 유감
벤야민과 아도르노
벤야민은 ˝경험의 체계적 파괴˝에 비통해하며 경험이 그 구성 요소들로 양태화되는 것을 극복하려는 의지 주체와 객체의 단절을 치유하려는 의지에 메시아적 강렬함을 불어넣었다.
초월적 관념의 사고는 그것의 언어적 표현에 앞서 존재한다는 칸트의 믿음에 대한 요한 하만의 정통 종교적 비판에 따라, 벤야민은 신성과의 접촉이 언어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경험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이원론에 기초한 인식론의 영역으로부터 양자가 함께 관련돼 있는 언어적 매체로의 전환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야 현상계와 예지계, 유한과 무한, 인간의 실존과 절대자, 종교와 철학 사이의 연속성들이 회복될 것이다.
: 아도르노의 주체/객체의 비동일적 변증법의 복원
경험은 종종 주관적 관점에서만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더 이상 동일한 것으로 남을 수 없게 만드는 타자성과 조우하게 된다. 그 경험은, 손상되지 않으려면, 타자를 비지배적이고, 비포섭적이고 비균일화하는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
요컨데 경험에 대한 아도르노의 입장을 읽는 경험 그 자체는 손쉬운 조화에 대한 비동일적 거부들 중 하나로서, 경험이 위험과 장애를 동반한 예기치 않은 것으로 개방이라는 점, 즉 역사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항해를 떠나려는 이들을 기다리는, 타자성을 비롯한 새로운 것과의 조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9장 경험에 대한 구조주의적 재구성
바타유, 바르코, 푸코
구조주의는 경험을 문화의 토대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 즉 개인이 상이하게 구조화된 상징적 교환관계의 맥락에서 상이한 유형으로 사고하고 느끼고 지각하는 주체로 변모하는 방식의 산물로 바라본다.
: 바타유와 내적 체험
바타유 자신이 ‘내적 체험‘이라 부른 것에 대해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부적 경험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은 경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현전과도, 어떤 풍부함과도 관련이 없으며, 단지 그것이 고통 속에서 ‘겪는‘ ‘불가능‘과 관계 맺을 뿐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형성이나 함양의 점증적 과정을 겪을 수 있는 자아라는 전통적 개념 안에 위치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외부의 무언가를 찢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찢는다고 느끼며 번데기 상태에서 벗어나는 순간 내적 체험을 획득한다.
바타유는 고통과 자기 희생의 가치에 대한 니체의 확신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조를 삶 속에서 일관되게 실천할 수 없었다는 이 독일 철학자의 인정 또한 자신의 삶에서 깊이 공명했다. 그는 삶과 작업 사이의 어떠한 유기적 통일도 없었고, 근대적 삶의 ‘균질화‘되고 ‘제한 경제‘로 축소된 세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그가 부여했던 솔직히 불가능한 임무가 실현되는 것도 무망했다.
쉬리아가 언급했듯이 ˝[내적 체험]이 하나의 동기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모든 것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모든 것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내적 체험의 병폐들˝ 중 하나는 자기 맘에 드는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신비주의자의 ˝힘˝이다. 두번째 병폐는 내적 체험의 습득을 의도적인 계획. 행동 계획의 목표, ‘참여적 지성인‘이 되는 근거로 만드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내적 체험]을 싫어한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주관성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는 능동적 투사와 그것이 야기할 헌신의 유의미한 경험의 중요성을 그 책이 명백히 거부한 데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인간 자율성의 포기였고, 하이데거가 세인이라 불렀던 것의 진정성없는 실존에 대한 가치 부여였다.
: 바르트와 경험의 계략
바르트는 그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ㆍ구조주의적 국면에 영향을 미쳤던것인 ˝과학성이라는 행복한 꿈˝에 대한 신념을 이내 버렸고. 욕망과 쾌락의 경험들의 텍스트적 표현을 초과하는, 좀더 직접적으로 신체적인 그러한 경험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텍스트의 즐거움] 같은 그의 저작들은 세계의 살 속에 자리한 현상학적 신체를 넘어서 세계나 타자와의 감각적 조우에 굶주린, 욕망하는 신체였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타자를 구별해주는 그 결정에 에로틱하게 열려 있는 것은 정합적인 서사적 재구성을 거부하는, 덜 조직되고 덜 통합된 무엇, 어떤 분산된 자아였다.
드 세라토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경험‘이라는 용어는 이 관계를 함축한다. 창조 행위와 동시발생적인, 불가해한 역사의 외부에 있는 것인 ‘유토피아적‘ 공간은 새로운 이성 능력에게 텍스트로서의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할 비-공간을 제공한다. 즉, 신비적 공간은 지식의 영역 밖에서 구성된다. 타자에 대한 욕망에 의한 언어의 활기를 통해 탄생되는 글쓰기 노동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그곳이다.˝
: 푸코와 한계경험
초기 저작의 어딘가에서 푸코는 ˝주체, 진리, 경험 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전개했다. 하지만 최종 작업에서, 푸코는 관심의 초점을 경험이 인식적 담론이든 권력 장치든 그런 조건들로 환원되는 것에 다시금 저항하는 방식으로 앎의 주체가 구성되는 문제에 두기 시작했다.
경험은 특정 문화에서 지식 영역들, 규범성의 유형들, 주관성의 형식들 간의 상관관계로 이해된다. 그것은 인식적 담론이나 규범적 규칙들의 파생적 결과로서의 구조가 아니라, 그것들이 주관성의 상이한 형식들과 연관을 맺을 때 발생하는 무엇으로서의 구조다.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현상학이 일상적 경험 안에서 궁극적으로 통합된 초월적 주체를 찾으려 애쓰는 반면에 그가 따르는 인물들은 경험에 ˝주체를 그 자체로부터 ‘찢어내는‘ 임무˝를 부여했다. ˝주체가 더는 주체 자체일 수 없는 방식으로, 혹은 주체가 그 자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결국 그것의 전멸 혹은 분열에 이르고 마는 방식으로˝ 말이다. ˝주체를 그 자체로부터 찢는 것은 이렇듯 주체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일, 어떤 ‘한계경험‘의 관념이며,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 저자들에게 배운 근본적인 교훈이다.˝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다. 그는 대상들의 영역을 정의함으로써 주체로서 자신을 동시에 바꾸고, 변형하고,.변환하고, 변모시키는 그런 과정 속에 무한히 관계하는 존재인 것이다.
: 결론
경험이라는 관념은 죄책감을 느끼는 지식, 불가피한 누추함과 불완전함의 기대, 필연적인 실망과 엇갈리는 결과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라는 관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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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철학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27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 돈의 철학



짐멜을 인물편람으로 찾아 보면,
그는 사회를 개인을 초월하여 실재하는 실체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하고, 사회를 각각 분야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였다. 그에게 있어 실재하는 것은 통일체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개개 인간의 상호작용일 뿐이며 따라서 사회학의 대상도 개인간의 ‘심적인 상호작용‘에 두었고, 심리적인 측면도 중시하였다.
이 책 역시 돈의 문화적 측면과 상호 작용의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철학적 연구의 대상이 아닌 ‘돈‘을 주제로 삼고 그 성격을 물질 문화와 정신 문화로 논의의 촛점을 맞추어서 사회학 주저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짐멜은 돈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면서 추구하는 의미와 목표는 경제적 현상의 외면적인 차원으로부터 심층적 차원으로 뚫고 들어가 모든 인간적인 것의 궁극적 가치와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다. 단지 돈은 가장 외면적이고 현실적이며 우연적인 현상들과 현존재의 가장 이념적인 힘들, 즉 개인적 삶과 역사의 심층적인 흐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기술하기 위한 수단,재료 또는 실례에 불과하다.
돈의 철학적 의미는, 그것이 실천적 세계에서 모든 존재 형식의 가장 결정적인 가시화이고 가장 명백한 현실화라는 점에 그리고 이에 따라 사물들이 공통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사물들 서로 간의 관계가 그것들의 존재와 상존재를 결정한다는 점에 있다. (p164)
이 돈에 대한 연구에서 비킬 수 없는 것은, ‘돈의 양이 곧 그 질이다‘ 즉 현대인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접하는 양적인 가치가 질적인 가치로의 변화는 학문적 논의이고 현실이다. 그리고 돈은 교환의 수단이고 목적이며 절대적인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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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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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내용인데 리뷰쓰기가 버거우니 내가 참 못났다!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의 말에 많이 공감하지만 책으론 처음이다.
글쓰기가 어렵고 볼펜을 잡으면 늘 움츠려든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자랑이 아니라고 하니 편하게 접근하려고 한다.
글쓰기 요령은, 주제를 확실히 전달하라고 한다. 단문으로 문장을 짧게 하며 이해하기 좋은 쉬운 어휘를 사용하라고 한다.
지금보다 조금 더 잘 썼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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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권리 한길그레이트북스 108
로널드 드워킨 지음, 염수균 옮김 / 한길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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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과 권리

드워킨에게 법이 무엇인가를 정하는 과정은 구성적 해석과정이다. 법적 권리의 의무의 원천은 과거의 결정들이기 때문에 각각의 사안에서 법에 따른 결정은 과거의 결정들과 일치하는 결정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명시적인 결정들과의 일관성이 아니라 그러한 결정들을 전제하거나 그것들을 정당화해주는 도덕원칙들과의 일관성도 포함한다. 드워킨은 그러한 일관성을 통합성이라고 부른다. 그는 통합성을 법의 생명이라 말하고 자신의 법이론을 ˝통합성으로서의 법˝이라고 부른다. (p21)

‘통합성‘의 원칙으로 그는 연합된 법적 인격체들이 서로를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의 정치적 이상을 특징짓는다. 그것은 입법기구나 판결기관 만이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한 배려와 평등한 존중이라는 기본규범을 사회의 관행과 제도 속에서 실현할 것을 의무로서 부과하는 원리이다. (하버마스의 ‘사실성과 타당성‘)

드워킨은 이 책에서 평등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이론과 사회적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많은 사례들을 언급하며 펼지는 논변과정은 실제 재판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으로 간주된다.
더불어 독자에게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판단을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신박약 항변
제한 : 실수로 또는 정신이상인 상태로 행위한 어떤 사람에게 보복함으로써 얻어지는 만족은 없기 때문이다.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 범죄를 줄일 수 있다 하더라도 잘못일 것이다. 오직 그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위험이 명백할 때에만 그렇게 해야 한다.
포기 : 항변이 소송과 법교육의 비용을 늘리고, 남용의 소지가 있으며, 계몽된 형법체계에서는 그 변호의 목적이 모호해 보인다. 법이 오직 비난받을 만한 행위만을 유죄로 간주하는 일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그것이 정신박약 성립근거가 될 수 없다. 형법의 목적은 선도하고 막는 것이지 처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관례적 태도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항변은 포기되어야 한다.
*항변의 일반적인 정당화 : ˝인간사회는 인격체들의 사회이다. 그리고 인격체들은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때때로 해가 되고 막아야 되거나 변경되어야 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신체로 보지 않는다. 그와는 달리 인격체들은 서로의 움직임을 의도의 표시로 해석한다.˝ 그것과 다른 곳에서 동일한 취지로 그는 법은 만일 그것이 이런 변호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집단에 대한 판단이 아무리 정확하다 하더라도 그 판단에 기초해 어떤 사람을 구속한다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개인으로서 평등한 존중을 받아야 할 권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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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윤순식.원당희 옮김 / (주)교학도서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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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나는 누구인가

저자는 어떤 주제에도 뚜렸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얘기하는 것 외에도 ˝왜?˝하고 궁금해야 되지 않겠어!
생각해 봐.
를 기다리는 것 같다.

1.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인간의 인식은 어떻게 동물과 다른가?
찰스 다윈이 발표한 <종의 기원>으로 인간은 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숭고한 진리는 두가지 생각으ㅣ리로 나뉘었다. 하나는 인간이 숭고한 존재라는 믿음이 흔들린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은 영리한 동물이라는 단순한 진리가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관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은 진화론적 적응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되었다. 그래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진화의 경쟁에서 생겨난 인식이라는 도구가 인간의 인식 능력에 허용하는 것뿐이다.
4)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내가 아는가
내 생각이 내 존재에 대해 유일하게 어떤 관념이나 상상을 부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 생각의 현존재 ‘나‘란 대체 누구인가?
5) ‘나는‘ 누구인가?
에른스트 마흐는 ˝자아란 명확하게 한계가 있는, 불변의 특정한 단위가 아니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 흄은 자아란 ‘모든 지각의 합성물‘이라는 생각이었다.
뇌 연구에서 입증도고 있는 것은, ‘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고 있는 ‘나‘는 뇌 속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6)감정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사고는 언제나 감정에 의해 채색된다.
의식이 결합하는 접착물질이 감정으로 구성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 감정이 모든 본질적인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7)무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 뇌 속에서 진행하는 것들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연상 기능을 지닌 피질이 관여하고 있을 때만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기능은 철저하게 무의식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다. 인격 발달에서도 무의식이
의식에 앞서서 형성되고, 무의식은 의식이 점차 깨서나기 훨씬 전에 특질을 결정한다.
8)기억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회상한다고 하면, 우리 뇌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어떤 것, 즉 이미 생각해 보았던 것과 이미 느껴 보았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캔들의 결정적인 업적은 학습체험이 뇌에 흔적을 남기는 것, 즉 변화한 시냅스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 있다. 시냅스의 입체적인 가변성(시냅스가 효율적)은 체험을 단기적으로 저장하게 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이에 반해 장기 기억은 시냅스 연결 숫자가 증가하면서 형성되었다.
어떻게 기억하는가? 는 생리의학적 연구에 즈음한다.
명확하게 밝혀진 것처럼 보이는 점은, 내가 무엇인가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회상해 내고 그것을 혼자 힘으로 기억의 서랍에서 끄집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 이 체험을 언어로 포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9. 언어란 무엇인가?
한 단어의 의미는 언어 생활에서 사용되면서 규정된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고심해야 할 문제는 단어의 의미와 문장 구조를 논리적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용 규칙을 이해하게 하는 것, 즉 여러 다양한 ‘언어 유희‘인 것이다. 언어학은 그때그때의 문맥 속에 들어 있는 언어 행위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였다. 문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문제는 무엇인가가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질문이 아니라, 의도했던 대로 문장을 이해했느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 되었다. 언어를 통해 진리를 구하는 이론에서 사회적인 의사소통이론이 되었던 것이다.
2.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0)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가?
로버트 와이스는 고독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베푸는 동정심의 결여보다 자신을 더 좌절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베풀 수 있는 동정심의 결여라는 주장이었다.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겠다는 마음가짐,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자신의 제한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베푸는 기쁨과 선한 일을 행하는 기쁨은 매우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것은 인류의 뿌리에까지 다다른다.
11) 우리는 왜 남을 돕는가?
상호 간의 이타주의가 인간이 지닌 도덕성의 원천에 꼭 들어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12) 나는 왜 선해야만 하는가?
칸트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선한 행동을 보장하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이나 성격이 아니었고 형편이 괜찮은 삶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의지였다. 인간의 선한 의지야말로 인간에게 유일하게 선한 것이다.
13)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나는 원할 수 있는가?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장을 가차 없이 펼쳐 나갔다. 즉 우리 뇌의 명령 통제 본부는 이성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이다. 의지는 무의식적인 것이며, 무의식적인 것이 우리의 현존재와 성격을 규정한다. 의지가 주인이며, 그리고 이성은 그의 노예다.
‘선해야 하는 당위성‘은 결국 ‘선해야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다고 하면, 인간의 뇌 속에 ‘선함에 대한 의지‘를 작동시키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14) 도덕은 뇌 속에 존재하는가?
도덕적인 감정은 도덕적인 통찰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가 행동하는 이유와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철저하게 구별된다. 분명히 감정과 이성은 서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 매우 상이하게 반응한다.
15) 선한 것은 보답을 받는가?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자기 존중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 존중 때문에 이런 즐거움의 경험을 일반적이고 우호적인 행동 규칙의 기초로 삼을 때야 비로소 도덕이 되는 것이다.
선행하면 얼마만 한 보답이 있는지, 그것은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사회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16) 도덕은 타고나는 것인가? 길러지는 것인가?
언어를 습득할 때처럼 도덕적인 감정도 완전할 정도로 타고나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가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수용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한 하나의 교육 계획안과 그 정보를 어떻게 조직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몇몇 전제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
도덕적인 행동을 얼마나 강하게 사용할 것인지, 이것은 넓게 보면 자기 존중의 문제이며, 이 자기 존중은 다시금 교육의 문제가 된다.
17)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
인간에게는 정당성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 원칙이 존재한다.
18) 낙태는 도덕적인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타인의 생명에 대해 비자발적으로 부여받은 의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도덕적인 규칙을 위한 최후의 토대는 도덕 주체의 소망과 의지이지 인식이나 지식이 아닌 것이다!
19) 안락사는 허용되어야 할까?
첫째로 국가는 통증완화의학을 장려하고 간접적 안락사(강력한 진통제)를 가급적 인간적이고 투명하게 실행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능동적 안락사(독극물 주사)를 바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불치병에 시달리는 중환자가 임종을 며칠 앞두고 겪는 결정적인 문제는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능동적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경우 최종적 수단으로 능동적 안락사가 ‘정상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20) 우리는 동물을 먹어야 될까?
인간의 삶을 동물과 달리 평가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도덕은 항상 문화적 감수성의 문제다. 따라서 도덕을 좌우하는 것은 인간이 제시하는 추상적인 정의가 아니라 한 사회의 감정 상태다.
어느 정도까지 육식을 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숙고해보면 육식을 반대하는 논거가 육식을 찬성하는 논거보다 더 설득력있고 명료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동물의 문제를 자기 존중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21) 우리는 유인원들과 어떤 관계로 지내야 할까?
인간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생명체가 있으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22) 왜 자연을 보호해야 할까?
후세에 태어난 관찰자로서 우리가 거대하다고 느끼는 암석과 협곡, 황무지와 계곡은 자연 속에서 강력한 참사가 만들어 낸 흔적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종의 다양성이 생태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한 물음에 완전하게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을 보호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에 대한 물음은 생태학적인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희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삶에 대한 애착을 지녔기 때문이다.
23) 인간을 복제해도 좋을까?
복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복제는 인간이 ‘인간 자체의 가치‘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목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복제 인간의 겉과 안에 관해 관심 있는 호기심 많은 연구자의 유용성과 영적으로 불행해질 위험이 지극히 높은 인간의 운명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의 목적일 때에는 영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연구를 위해 손상된 죽은 초기의 배아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양심에 따라 공리주의적인 방식으로 숙고해 볼 수도 있다. 요컨대 고통없이 죽어 버린 배아세포들이 수십만 또는 수백만의 치유된 환자에게 무한한 행복을 선사한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 재생의학은 어디로 향하는가?
삶에서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교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절대로 어떤 손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25) 뇌 연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뇌 연구와 이를 실천하는 기술은 적어도 도덕 과제를 이중으로 지니고 있다. 뇌 연구는 우선 오용의 위험에서 인간을 보호해야하며, 가급적 사회는 뇌와 관련된 특정한 기술이 초래할 수도 있는 인간과 세계 이해를 붕괴할 가능성에 대비하게 해야만 한다.
사회는 가급적 빨리 이 문제를 윤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뇌 연구자와 뇌 신경학자들은 철학과 심리학, 사회학 분야의 동료들과 함께 그들이 진행하는 연구를 평가하고 추후의 발전방향을 사전에 검토해야만 한다.

3. 내가 희망해도 좋은 일은 무엇인가?
26)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우리는 신을 삼라만상을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원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글쎄,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것이 무에서 생겨날 수 없다는 확증이 최초의 원인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라지만, 이 최초의 원인이 반드시 신이어야만 한단 말인가?
우리가 충분히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확정적으로 보편타당하다고 규정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신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될 뿐이거나 경험을 못할 뿐이라는 것이 바로 사태의 본질이다.
27) 자연에도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생동하는 세계를 원인과 결과의 기반 위에서 설명할 것인지, 자기조직화의 기반 위에서 설명할 것인지에 대해 생물학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다.
28) 사랑이란 무엇인가?
루만은 사랑이란 ‘타인의 행복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는‘ 아주 정상적인 비개연적 성격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미소만을 보며, 빠진 이빨은 보지 못하는 법이다. - 변함없는 사랑의 고유한 특성 -
29) 자유란 무엇인가?
내 의지, 내 관념, 내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ㆍ정치적 이념과 문화적인 표본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전적으로 많은 일을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수많은 경험이다. 우리는 자신이 거쳐 온 삶의 역사로 둘러싸인 존재다. 따라서 인간은 경험이라는 자신의 틀에 의해 규정된다.
30) 우리에게 재산은 필요할까?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법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자아감정은 자신의 직접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간접적으로만 관련 있는 대상으로 옮겨 간다. 이는 소유 자체의 의미가, 인격이 대상의 내부로 확장돼 들어가 대상을 지배하는 가운데 자신의 확장 영역을 회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입증한다.˝
31) 정의란 무엇인가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공리주의자들이 자유로운 개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에서 정의로운 사회가 어떻게 성립되는지를 묻고 있다면,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가 어떻게 모든 사람을 자유와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오로지 평등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인간의 본성과 대립하면서 정체되거나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바로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초석이다.˝
하지만 행복이 선에서 싹트지 않는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32)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
˝내 행복은 나 자신과 가장 깊이 일치하는 순간˝
어떤 사람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며 살 수는 없다.
지속적인 행복은 기대가 현실적일 때만 실현될 수 있다. 행복과 불행의 상태가 본질적으로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행복과 불행의 문제는 오로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달려 있다.
마틴 셀리그만이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우선 즐겁고 쾌적한 삶, 나아가 참여와 개인적 동경의 실현으로 이루어진 선한 삶, 끝으로 ‘추구할 가치를 지닌 첫 번째 목표에서 이루어진 특정한 일의 성취‘, 즉 의미가 실현된 삶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자산의 증식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보다 자신을 잃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에, 산업국가의 정책은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완전고용과 사회적 균형이 국민총생산의 증가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33)행복은 배울 수 있는가?
좋은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주제에 도스토예스키는 ˝다 좋은 일이야. 모든 것이.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지. 단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야. 그게 다야! 그걸 아는 사람은 금방 행복해질 거야. 그걸 깨닫는 순간에 즉시!˝
자신의 감정을 판단할 때 이성의 역할이 얼마나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부정적인 것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것일까? 물론 어떤 사물을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느끼는 것은 나에게 자유롭지 않지만,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행복의 심리학이 알려 주는 지혜는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웃어 넘겨라!˝이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한, 당신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34)인생은 의미가 있는가?
˝내 삶은 의미가 있었던가?˝
˝대답을 찾는 과정이 대답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그거 뭐 정말 별것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굴고요, 기름진 음식은 피하세요. 가끔은 좋은 책을 읽고, 누군가 차자오면 좋겠지요. 모든 종족이나 국가가 ㅎ화목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아음속으로 빌어도 보고요. -- 영화 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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