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노래들 - 한 보편적 주제에 대한 근대 미국과 유럽의 변종들
마틴 제이 지음,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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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의 노래들




우리는 ˝그냥˝ 경험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고 마치 살아가며 얻게 되는 재산과 같이 더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여기 이책 [경험의 노래들]은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개념을 정의하고 해명하며 분석하는 것이다.
저자는 경험의 사유 지도를 그리기 위해 서구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종교사상과 현상학, 프랑크푸르트학파와 포스트구조주의까지 특정사상과 학파를 다루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주제와 패턴을 발견하고 경험의 지적 역사를 그려낸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참 힘들다.
많은 사상가들의 철학에서 경험이라는 특정 개념을 전제하며 이해해야 했고, 사상의 일반적 개념까지 의미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문
경험이라는 말이 정체성을 본질화하고 주체를 구체화하는 데 이용된다는 점에서 그 말을 완전히 포기하고픈 유혹이 들더라도, 경험이란 우리에게 없어도 되는 말이 아니다
결국 ‘경험‘이란 공적 언어와 사적 주관성 사이, 표현 가능한 공통성과 개인들 내면의 형언 불가능성 간의 교차로에 놓인 결절점이나 다름없다.
1장 경험의 재판
그리스인들에서 몽테뉴와 베이컨까지
‘경험‘은 삶이 제공하는 위험과 도전에 직면해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이전의 순수함을 떠나버린 세속성은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 몽테뉴와 인본주의적 경험
‘경험‘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어떤 삶도 역설과 아이러니, 실망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었다.
몽테뉴 자신의 놀라운 평온과 균형, 다시 말해 불확실성과 회의를 감내하고 모순과 모호함의 세계에서 위안을 찾는 능력은 인간 조건의 취약함을, 그리고 실제로 경험될 수 없는 한계점의 불가피함, 즉 죽음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긍정하는 데서 잘 드러난 듯하다.
2장 경험과 인식론
경험론과 관념론의 경쟁
경험의 역할에 대한 실현 가능한 이해를 제시
: 로크와 감각 경험
관념은 감각에 가해지는 외부대상의 작용에 의해 마음에 부여되었다. 빈서판이라는 자신의 은유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 - 관념이 아니라 해도 - 외적 자극에 의해 기록되기에 앞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경험 개념을 마음의 어떤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까지 확장한다면, 분명 어떤 정신적 내용은 경험에 의한 게 될 것이다.
: 회의주의와 자연주의 사이의 흄
흄에게서 경험은 축적된 학습이라는 시간적 차원을 획득했다. 넓은 의미에서의 관습, 습관, 반복은 모두 경험의 일부분으로서 일어날 일에 대한 믿음의 근거를 제공한다.
입증되지 않은 믿음들을 설명할 때 흄은 상상력에 주로 기댄다. 그러나 애매하게 정의된 ‘상상력‘을 설명하지도, 관습적인 압력이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증명해내지도 못하고 의문 만을 남겼다.
: 칸트와 인식적 경험의 초월론화
* 그는 흄이 마음을 심리학적 기능으로 환원하고 논리적 추론과 보편적 이성의 강력한 확실성을 공통감각의 취약한 합의와 습관적 반복으로 대체한 점을 우려했다.
칸트는 경험에 앞서거나 경험을 넘어서는 선험적인 관념들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칸트는 전적으로 경험에 의해 산출되지 않는 인식의 부분을 추적하기 위해 초월론적 방법을 도입했다. 연역적 추론은 외부로부터의 자료의 주입이나 단순한 습관적 반복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의 이러한 국면을 추출할 수 있었다. 특히 초월론적 연역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긴 하나 세계에 대한 모든 지각과 판단에 스며든, 지식의 형식적 측면을 해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것은 오성의 영역이며, 칸트는 오성을 순수한 선험적 이성 및 수수한 후험적 감성과 구별했다.
3장 종교적 경험의 호소
슐라이어마허, 제임스, 오토, 부버
: 칸트와 도덕적 경험으로서의 종교
칸트는 종교가 기초해야 할 토대는 도덕적 경험이다. 신은 도덕적 이성의 요청일 뿐 신학적 교리가 아니다. 따라서 도덕적 명령에 유념하거나 저항한다는 의미에서의 실천은 이론과 인식에 우선하며, 이로부터 교리나 맹목적 믿음에 대한 단순한 동의보다 경험이 우월하다는 것이 결론으로 도출된다.
종교적 경험을 실천이성의 규정하에 포섭시켰던 칸트의 시도는 도전에 직면했다. 칸트가 이성을 이론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으로 구분한 데 불만을 느끼고 더 이상 도덕적 경험에 종속되지 않는 경험의 종교적 변형을 정립하고자 한다. 종교적 경험의 존엄과 가치가 회복되기를 바랐다.
: 슐라이어마허와 심정의 종교
슈래이어마허가 지지하는 것은,
와팅거가 직시하는 ˝경험은 삶의 정신들이 자신의 몫에 따라 형성될 때 내면화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발화의 도움으로 고조된 경험을 갖는 것이다˝
친첸도르프는 ˝이성은 경험을 약화˝시키고 ˝종교는 이성이 경험을 대립하는 한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은 그저 피조물인 우리가 우주를 불순하고 유한한 특수성의 수준에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실정 종교는 규정적 종교로서, 무한한 종교가 유한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하는 것이다˝.
바르트가 보기에 슐라이어마허는 ˝신에 대한 유의미한 진술에서, 신은 술어가 아니라 오로지 주어로만 사유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했다.
: 제임스와 종교적 경험의 심리학
제임스의 가장 근본적 혁신은, 어떤 하나의 전통에서 종교적 개념을 분리한 뒤, 종교적 경험을 그 아래 모인 모든 다채로운 현상들을 수용하는 좀더 넓은 범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경험의 현상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 신학적 범주나 해석적 틀을 통한 개념적 매개에 앞서는, 이른바 순수 경험에의 호소의 타당성을 인정한 것에 대해서도 일찍이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 오토 그리고 누미노제의 경험
오토는 종교적 경험의 초월론적 토대를 회복하고자 했고 신의 온전함을 재확립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저서 [성스러움]에서 신 안에서 ‘전적인 타자‘이자 신성으로 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인 ‘누미노제‘의 순간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종교 체계는 또한, 형언할 수 없는 신의 분노이자 무한한 매력의 원천으로 경험되는 강력한 힘의 감각도 보존하고 있다.
종교는 본유 관념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선험적인 경외감의 능력, 어떤 가능성에 대한 플라톤적 상기나 기억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종교의 측면에서 경험에 호소하는 것은 동시대의 담론에서는 명성을 잃어갔다. 종교적 진리들의 비교를 계속 파고드는 이들은 이제 경험보다는 상징이나 신화의 차원에서 유사성을 찾게 되었다.
: 부버의 체험에 대한 숭배
부버는 점차 경건한 신자의 내면성보다는 (하시디즘) 인간과 신사이의 관계적 영역을 선호하게 된다.
그는 [나와 너]에서 썼듯이, ˝물론 신은 ‘전적인 타자‘이지만 동시에 전적인 동일성, 즉 온전한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신은 모습을 드러내고 압도하는 전율적 신비이지만, 동시에 나 자신의 자아보다 더 내게 가까운 분명한 신비이기도 하다˝.
4장 미학적 경험을 통한 신체로의 회귀
칸트에서 듀이까지
경험은 미학의 근본적 조건이다. 즉, 감각에 기초한, 본유 관념의 대안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습관적 학습에 의해 생산되어 축적된 지혜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런 전제에서 이제 미학적 담론의 무게중심은 대상보다는 주체와 그의 경험 혹은 판단으로 옮겨 갔다.
: 칸트와 관조적, 반성적 판단으로서의 미학적 경험
미학적 판단에 대한 담론은 창조적 양식보다는 관조적이고 수용적인 양식에서의 경험에 놓였다.
미학적이란 사적이고 주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만족이다. 실제 대상에 대한 무관심이기 때문에 미학적 경험에서 듣고 읽고 고는 행위에서 실현된 실천적이거나 소유적인 의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 미학적 경험의 자율성에서 주권성으로
예술의 주권성은 이성 자체의 한계를 능가하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뜻했다. 미학적 경험은 궁극적인 형태에서 인간 발전의 모델로 이해됨에 따라 ‘삶‘인 감각 충동과 ‘형상‘인 형식 충동을 유희 충동으로 지양하는 것으로서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학적 경험은 세계에 반응하는 하나의 양식을 넘어, 세계를 변형하고 심지어 구원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양식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미학적 경험을 세계와의 모든 관계와 타인을 아우르는 것으로 확장하는 일이 문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정치의 미학화‘이고 삶을 예술작품으로 동일시한 지독한 나르시시즘이었다.
: 예술작품을 소멸에 맞서 지키기
미학적 경험의 모든 표상에서, 미학적 경험은 관조적이든 생산적이든 자기형성적이든 간에 예술작품을 넘어서 주체를 특권화하는 것을 시사했다. 작품은 주체의 역할에 비해 덜 중요해졌다. 그렇지만 주체쪽으로 기울어지고 상실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극구 찬양받는 미학적 경험조차 예술작품의 사물적 측면을 우회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 균형을 회복하기: 듀이와 경험으로서의 예술
경험은 사물들의 세계에서 투쟁과 성취로 유기체를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초보적 수준의 예술과 같다. 경험은 가장 기초적인 형태에서조차, 미학적 경험이라는 유쾌한 지각의 약속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5장 정치와 경험
버크, 오크숏 그리고 영국 마르크스주의자들
: 그 자체가 목적인 정치적 경험
정치적 경험의 고유한 가치는 그 위치를 공적 영역에 한정짓는 데 있다.
: 버크와 과거 경험의 지혜
경험의 암묵적인 공리주의 혹은 결과주의
: 오크숏과 정치적 합리주의의 신헤겔주의적 비판
모든 곳에서의 경험은 사유와 분리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사유의 형태를 지닌다.
오크숏의 결론에 따르면, 합리성은 ˝연민의 흐름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행위에 우리가 부여하는 자격증으로서,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것인, 활동의 정합성˝이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와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스트의 경험
대중의 경험이 새로운 평등주의 문화의 창출로 인정될 수 있는 ‘기나긴 혁명‘을 주창했다.
: E P. 톰프슨과 아래로부터의 역사
억압과 투쟁에 대한 자신들의 집단적 경험을 먹고 고통스럽게 자라난 계급의식을 획득한 이들의 유산에 대한 찬가였다.
: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에서의 경험에 대한 논쟁
‘경험‘의 매우 다양한 의미들과 형식들에 대한 개념적 해명과 각각에 함축된 저마다의 역사적 변형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필요하다.
: 최종적인 대차대조표
과거가 제공하는 신중한 교훈들과 현재의 ˝가장 충만하고 열려 있고 능동적인 의식˝이라는 의미를 창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6장 역사와 경험
딜타이, 콜링우드, 스콧, 앙커스마트
: 오크숏과 역사가의 경험으로서의 역사적 경험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 사람들에 의해 ‘경험된‘ 것에 접근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다.
역사란 총체성이 아니라 그렇게 나쁠 것까지는 없는 일종의 ‘악무한‘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경험‘ 자체가 역사를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역사가 ‘과거‘에서 경험을 회복하는 문제가 아니라, 손쉬운 균질화를 거부하는 다수의 상이한 과거들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 딜타이와 과거 체험에 대한 추체험
딜타이의 경험은 절대적인 내재성과 즉각성을 넘어서는 것을 포함하는 상관적인 개념이었다. 현재의 역사가들이 과거 행위자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추체험‘ ‘추구성‘이라고 불렀다. 추체험은 인식론적 이점에 더해, 인간의 가능성의 확장된 범위를 제시해 우리의 삶을 확장하며 변화된 삶을 출현시킨다. 다른 쪽에서는, 서로의 갈등 속에서 경험적으로 흐르는 삶에 대한 충돌과 구조적 거부는 피할 수 없다.
딜타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경험에 대한 반성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지만, 그러한 반성은 규정할 수 없고, 해석의 토대로도 기능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 콜링우드와 과거 사유의 재현
그는 ‘재연‘이라는 말을 지지했는데, 역사적 탐구의 목표로서 과거의 행위들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콜링우드의 재연은 행위 자체의 합리적 동기들과 사유의 의식적 반성성에 대한 편애를 의미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미론적으로 변하기 쉽고 문화적으로 걸러진 사유의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도록 한 초월적 유심론의 길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세대,계급,인종, 젠더 정체성에 관심을 둔 많은 역사가가 이용한, 경험의 집단적 성격은 고려하지 않았다.
: 역사와 매일의 삶: ‘일상적‘ 경험의 극복
우리가 최근 경험의 역사에서 특수한 사건들과 국면들에 대한 특정한 반응으로서의 경험을 외면하는 현상을 인식하고 검토하는 것은, 우리 현실의 자각에, 그리고 기억과 희망을 연결하는 역사가의 임무 완수에 본질적이다.
: 스콧과 언어적 전회
스콧의 주장에 따르면, ‘경험‘은 공감을 갖는 역사가에 의해 현재에 추체험될 수 있는 과거의 생생한 현실이라기보다, 항상 그 자체로 그것이 출현하는 담론적 맥락의 이데올로기적 잔여를 포함하는 하나의 구성된 범주였다.
˝지배적인 담론적 구성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고/자유롭거나 그것과 모순되는 경험˝을 통한 대항 헤게모니 담론의 형성 가능성을 배제한 채 오롯이 경험을 담론의 기능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하려는 그녀의 비변증법적인 시도에 우려를 표했다.
과거의 체험 그 자체에는 근본적 우선성이 결코 부여될 수 없었다.
: 앙커스미트와 경험적 숭고
역사적인 현현들은 우리를 경험에서 떼어놓을 수 있을 뿐인 과거에 대한 어떤 정합적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의 언어가 허용할 수 있는 만큼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과거의 ‘경험‘을 독자에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7장 미국 실용주의의 경험 숭배
제임스, 듀이, 로티
: 미국의 경험 문화
주관성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의 견고함을 약화시키는 어떤 근본적인 일이 발생한 반면에 경험개념은 삶의 공간 위에 새로운 경작지를 바여받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 제임스와 순수 경험의 요청
제임스는 ‘경험‘이라는 말이 근대세계에서 상실되었거나 억압된 것, 즉 통제하고 명령하는 현실의 관습적 방식에 의해 가려진 것에 대한 갈망을 종종 드러낸다.
철학적 관점에서 제임스의 탐구는 궁극적으로, ‘근본적 경험론‘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가 ‘순수 경험‘이라 부르게 된 것을 해명하는 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세계의 원초적인 재료나 물질, 즉 모든 것을 구성하는 재료˝와 동일시함으로써 ˝현재의 순간적인 영역˝이라고 불렀다.
니콜스 같은 논자들의 주된 곤란함은, 제임스가 심리학적 탐구에서 지속했던 것으로서, 삶의 흐름에서 선반성적으로 몰입하는 경험과 동일시되었던 것이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형이상학적 경험 개념이었다. 이는 자아와 타자, 의식과 물리적 실재, 사실과 가치의 이원론적 구분에 앞서는 ‘원초적 재료‘에 상응하는 것이다.
: 듀이와 실험으로서의 경험
듀이는 대상을 완성된 궁극성으로, 자료를 ˝더 나아간 해석을 위한 소재˝로 정의하면서, 실험적 방법이 ˝대상을 자료로 대체한다˝고 까지 했다. 따라서 경험은 실험으로부터 생기며, 이것이 우리를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미래로 나아가게 해준다.
진리는 대상이나 영원한 관념이라는 외적 세계와의 정확한 일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성공적 해결의 결과를 의미한다. 검증은 객관적인 타당성의 독립적인 진단에 의해 확정되는 주관적인 경험의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목적의식적인 계획과 환경적인 반응 간의 ‘상호 대응‘ 혹은 상호 재조정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험은 교호적인 개념이 된다.
: 로티의 언어적 초월주의
경험이란 관념은 과거에서 얻을 수 있고, ˝과거 자체를 그것의 타협하지 않은 낯섦 속에서 대면˝ 할 수 있다.
언어의 핵심은 실재가 됐든 ‘경험‘이 됐든 그것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고 좀더 유용한 도구를 구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언어에 의해 매개되어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술을 포함해 상이한 기술들을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 외적인 어떠한 관점도 갖고 있지 않다.
8장 경험의 위기에 대한 유감
벤야민과 아도르노
벤야민은 ˝경험의 체계적 파괴˝에 비통해하며 경험이 그 구성 요소들로 양태화되는 것을 극복하려는 의지 주체와 객체의 단절을 치유하려는 의지에 메시아적 강렬함을 불어넣었다.
초월적 관념의 사고는 그것의 언어적 표현에 앞서 존재한다는 칸트의 믿음에 대한 요한 하만의 정통 종교적 비판에 따라, 벤야민은 신성과의 접촉이 언어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경험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이원론에 기초한 인식론의 영역으로부터 양자가 함께 관련돼 있는 언어적 매체로의 전환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야 현상계와 예지계, 유한과 무한, 인간의 실존과 절대자, 종교와 철학 사이의 연속성들이 회복될 것이다.
: 아도르노의 주체/객체의 비동일적 변증법의 복원
경험은 종종 주관적 관점에서만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더 이상 동일한 것으로 남을 수 없게 만드는 타자성과 조우하게 된다. 그 경험은, 손상되지 않으려면, 타자를 비지배적이고, 비포섭적이고 비균일화하는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
요컨데 경험에 대한 아도르노의 입장을 읽는 경험 그 자체는 손쉬운 조화에 대한 비동일적 거부들 중 하나로서, 경험이 위험과 장애를 동반한 예기치 않은 것으로 개방이라는 점, 즉 역사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항해를 떠나려는 이들을 기다리는, 타자성을 비롯한 새로운 것과의 조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9장 경험에 대한 구조주의적 재구성
바타유, 바르코, 푸코
구조주의는 경험을 문화의 토대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 즉 개인이 상이하게 구조화된 상징적 교환관계의 맥락에서 상이한 유형으로 사고하고 느끼고 지각하는 주체로 변모하는 방식의 산물로 바라본다.
: 바타유와 내적 체험
바타유 자신이 ‘내적 체험‘이라 부른 것에 대해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부적 경험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은 경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현전과도, 어떤 풍부함과도 관련이 없으며, 단지 그것이 고통 속에서 ‘겪는‘ ‘불가능‘과 관계 맺을 뿐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형성이나 함양의 점증적 과정을 겪을 수 있는 자아라는 전통적 개념 안에 위치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외부의 무언가를 찢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찢는다고 느끼며 번데기 상태에서 벗어나는 순간 내적 체험을 획득한다.
바타유는 고통과 자기 희생의 가치에 대한 니체의 확신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조를 삶 속에서 일관되게 실천할 수 없었다는 이 독일 철학자의 인정 또한 자신의 삶에서 깊이 공명했다. 그는 삶과 작업 사이의 어떠한 유기적 통일도 없었고, 근대적 삶의 ‘균질화‘되고 ‘제한 경제‘로 축소된 세계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그가 부여했던 솔직히 불가능한 임무가 실현되는 것도 무망했다.
쉬리아가 언급했듯이 ˝[내적 체험]이 하나의 동기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모든 것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모든 것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내적 체험의 병폐들˝ 중 하나는 자기 맘에 드는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신비주의자의 ˝힘˝이다. 두번째 병폐는 내적 체험의 습득을 의도적인 계획. 행동 계획의 목표, ‘참여적 지성인‘이 되는 근거로 만드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내적 체험]을 싫어한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주관성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는 능동적 투사와 그것이 야기할 헌신의 유의미한 경험의 중요성을 그 책이 명백히 거부한 데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인간 자율성의 포기였고, 하이데거가 세인이라 불렀던 것의 진정성없는 실존에 대한 가치 부여였다.
: 바르트와 경험의 계략
바르트는 그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ㆍ구조주의적 국면에 영향을 미쳤던것인 ˝과학성이라는 행복한 꿈˝에 대한 신념을 이내 버렸고. 욕망과 쾌락의 경험들의 텍스트적 표현을 초과하는, 좀더 직접적으로 신체적인 그러한 경험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텍스트의 즐거움] 같은 그의 저작들은 세계의 살 속에 자리한 현상학적 신체를 넘어서 세계나 타자와의 감각적 조우에 굶주린, 욕망하는 신체였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타자를 구별해주는 그 결정에 에로틱하게 열려 있는 것은 정합적인 서사적 재구성을 거부하는, 덜 조직되고 덜 통합된 무엇, 어떤 분산된 자아였다.
드 세라토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경험‘이라는 용어는 이 관계를 함축한다. 창조 행위와 동시발생적인, 불가해한 역사의 외부에 있는 것인 ‘유토피아적‘ 공간은 새로운 이성 능력에게 텍스트로서의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할 비-공간을 제공한다. 즉, 신비적 공간은 지식의 영역 밖에서 구성된다. 타자에 대한 욕망에 의한 언어의 활기를 통해 탄생되는 글쓰기 노동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그곳이다.˝
: 푸코와 한계경험
초기 저작의 어딘가에서 푸코는 ˝주체, 진리, 경험 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전개했다. 하지만 최종 작업에서, 푸코는 관심의 초점을 경험이 인식적 담론이든 권력 장치든 그런 조건들로 환원되는 것에 다시금 저항하는 방식으로 앎의 주체가 구성되는 문제에 두기 시작했다.
경험은 특정 문화에서 지식 영역들, 규범성의 유형들, 주관성의 형식들 간의 상관관계로 이해된다. 그것은 인식적 담론이나 규범적 규칙들의 파생적 결과로서의 구조가 아니라, 그것들이 주관성의 상이한 형식들과 연관을 맺을 때 발생하는 무엇으로서의 구조다.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현상학이 일상적 경험 안에서 궁극적으로 통합된 초월적 주체를 찾으려 애쓰는 반면에 그가 따르는 인물들은 경험에 ˝주체를 그 자체로부터 ‘찢어내는‘ 임무˝를 부여했다. ˝주체가 더는 주체 자체일 수 없는 방식으로, 혹은 주체가 그 자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결국 그것의 전멸 혹은 분열에 이르고 마는 방식으로˝ 말이다. ˝주체를 그 자체로부터 찢는 것은 이렇듯 주체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일, 어떤 ‘한계경험‘의 관념이며,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 저자들에게 배운 근본적인 교훈이다.˝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다. 그는 대상들의 영역을 정의함으로써 주체로서 자신을 동시에 바꾸고, 변형하고,.변환하고, 변모시키는 그런 과정 속에 무한히 관계하는 존재인 것이다.
: 결론
경험이라는 관념은 죄책감을 느끼는 지식, 불가피한 누추함과 불완전함의 기대, 필연적인 실망과 엇갈리는 결과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라는 관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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