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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젠더 트러블
내가 과연 성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고 제대로 알고는 있나? 하는 마음에 가볍게 들었던 책이다.
저자의 생각과 같기도 다르기도 한 주장을 보면서 좀 더 많이 알고 올바르게 생각해 보자는 욕심이 생긴다.
이 책의 내용은 성 담론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하지만 이제 개념만 개략적으로 이해하는구나 싶다.
특히 성 담론은 객곽적일 수 있는 관계에서 갖는 이해력보다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적용되는 자리에서 얼마나 실천적인가 가 중요할 것이다.
1.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
1. 페미니즘 주체로서의 ‘여성들‘
대체로 페미니즘 이론은 ‘여성의 범주‘ 를 통해 이해되는 어떤 현존하는 정체성이 있다고 가정해왔다.
푸코는 권력의 사법체계가 주체를 생산해내며, 그 주체들은 그 결과로 사법체계가 재현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체제에 의해 규제된 주체들은 그 체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체제의 필요조건에 따라 형성되고 정의 되고 재생산된다. 이 분석이 옳다면 여성을 페미니즘의 ‘주체‘ 로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적 사법적 구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이자 당면한 재현 정치학의 결과일 것이다.
페미니즘 비평은 페미니즘 주체인 ‘여성들‘ 의 범주가 해방을 추구하는 바로 그 권력체계에 의해 어떻게 생산되고 구속받는지도 알아야 한다.
페미니즘에 분명 어떤 보편적 원리가 있으리라는 정치적 가정은 여성의 억압이 보편적 체제나 가부장제, 혹은 남성 지배 구조에서나 발견되는 어떤 유일한 형태라는 생각을 수반하기도 한다.
나는 페미니즘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이, 주체가 작동되는 담론의 구속력 때문에 상당히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페미니즘의 법적 주체로 간주된 것을 생산하고 또 은폐하는 정치적 작용을 추적하는 일은 바로 여성 범주의 페미니즘 계보학이 맡아야 할 과제이다.
페미니즘에서 ‘재현‘ 이란 아마도 ‘여성‘ 주체가 그 어디에서도 가정되지 않을 때에만 의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섹스/젠더/욕망의 강제적 질서
가끔 여성의 정체성에 결속력을 부여하기 위해 ‘여성‘ 이라는 분명한 통일성을 끌어오기는 하지만 페미니즘 주체에 균열이 시작된 것은 섹스와 젠더의 구분 때문이다. 섹스와 젠더 간의 구분은, 섹스가 어떤 불굴의 생물학적 특성을 갖고 있든 젠더는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주장에 공헌했다.
젠더를 이미 정해진 섹스에 문화적 의미를 각인한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젠더는, ‘성적으로 구분된 자연‘ 이나 ‘자연적 섹스‘ 가 ‘담론 이전에‘ , 문화에 앞서서, 그 위에서 문화가 행해지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표면으로 생산되고 설정되게 하는 담론적/문화적 수단이기도 하다.
3. 젠더 --- 현대 논쟁에서 돌고 도는 유적
페미니즘 이론가들이 젠더는 섹스의 문화적 해석이라고 주장할 때 이렇게 구성한 방식이나 기제는 무엇인가?
어떤 면에서 젠더가 구성된다는 개념은 해부학상 서로 다른 몸에 각인된 젠더의 의미라는 어떤 결정론을 시사하며, 거기서 몸은 냉혹한 문화적 법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수용자로 이해된다.
젠더에 대한 담론적 분석의 한계는, 문화 속에서 상상과 인식이 가능한 젠더 지형의 가능성들을 미리 전제하고 선취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한계는 늘 보편적인 합리성의 언어처럼 보이는 이분법적 구조에 입각해 기술된 지배적 문화 담론의 관점에서 정해진다.
뤼스 이리가레는 여성들은 ‘하나‘ 의 성이 아니다. 대체로 남성적이고 남근로고스 중심적인 언어 안에서 여성들은 재현 불가능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하나가 아닌 성은 패권적인 서구의 재현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뿐 아니라, 바로 그 주체라는 개념을 구축하는 ‘본질의 형이상힉‘ 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인본주의적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젠더를 그 사람이라고 불리는, 본래 젠더화되기 이전의 본질이나, ‘핵‘ 을 가진 어떤 사람의 속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리가레는 여성적인 ‘성‘ 이 언어의 부재지점, 문법적으로 규정된 실체의 실현 불가능성, 따라서 그 실체야말로 남성적 담론의 지속적이고 근원적인 환영이라는 것을 폭로하려 했다. 이리가레에게 여성의 성은 남성적인 주체를 내재성이나 부정성으로 규정한 ‘결핍‘ 이나 ‘타자‘ 가 아니다.
젠더의 의미에 대해서 실상 젠더가 지금 논의되어야 할 용어인지, 아니면 섹스의 담론적 구성이 더 근원적인 것인지, 아니 어쩌면 그것이 여성들인지 여성인지 그리고/혹은 남성들인지 남성인지 첨예한 의견 대립의 결과 ‘극단적인 젠더 불균형의 관계들‘ 이 생긴 상황에서 정체성의 범주들을 근본적으로 재고될 필요가 있음을 확고해진다.
보부와르는 여성 혐오적인 실존주의 분석 안의 ‘주체‘ 가 언제나 이미 남성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것과 융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사실 실존적 주체가 될 여성의 권리를 주창한다고, 그렇기에 여성 또한 추상적인 보편성이라는 관점에 포함될 것을 주장한다고 이해되지만, 그녀의 입장에는 또한 추상적인 남성 인식론 주체의 비체현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암시되어 있기도 하다. 보부와르의 분석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즉 남성성은 어떤 부정과 부인의 행위를 통해 비체현의 보편성으로 노정되며, 또 여성성은 어떤 부정과 부인의 행위를 통해 부인된 육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인가?
보부와르는 여성의 몸이 여성들의 자유를 위한 상황이자 도구가 되어야 하며 규정되었거나 제한된 어떤 본질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공식적으로 보부와르는 여자의 몸이 남성적 담론 안에서 표식되며, 그로 인해 보편성과 융합되어 있는 남성적인 몸은 표식되지 않은 채 있다고 주장한다. 이리가레는 표식하는 자와 표식되는 자가 모두 남성적인 의미화 양식 속에 있으며, 그 안에서 여자의 몸은 소위 의미화가 가능한 영역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이리가레의 해석에서 여성을 ‘생물학적 성‘ 으로 보는 보부와르의 주장은 전복되어, 여성은 자신으로 지칭된 성이기보다는, 타자성의 양식으로 활보하는 또하나의, 체현된 남성적 성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4. 이분적인 것과 일의적인 것 이론화하기, 그리고 그 너머
젠더 불균형이 재생산되는 근본적 구조에 대해 보부와르와 이리가레는 분명 입장을 달리한다. 보부와르가 불균형적 변증법의 실패한 상호관계로 우회하는 반면, 이리가레는 그 변증법 자체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자기 독백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타자‘ 의 문화들을 세계적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다양한 확대 사례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은 일종의 전유 행위를 만든다. 그리고 이 전유 행위는 달리 말하면, 그 전체화된 개념이 문제시되었을 차이들을 바로 그 기호 아래 식민화시키면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자기 증식 제스처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
페미니즘 비평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전체화된 주장도 탐구해야 하지만,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 동향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본질주의에 대한 현대 페미니즘 논쟁은 여성 정체성의 보편성과, 다른 여러 방식의 남성적 억압의 보편성이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여성들은 ‘여성‘ 이라는 범주가 규범적이고 배타적이며, 표시되지 않는 계급이라는 차원과 본래의 인종적 특권을 환기시킨다고 주장한다.
여성 범주의 ‘통일성‘ 은 필요조건도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특정 형태의 공공연한 분열 양상으로 인해 어떤 연합 행위가 촉발될 수도 있다. 개념적 층위에서 제도화되는 ‘통일성‘ 의 전제나 목표가 없다면, 일시적인 통일성은 정체성의 명확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구체적 행동들의 맥락에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이다. 따라서 열린 연합은 당면한 목적에 따라 번갈아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을 주장할 것이다.
5. 정체성, 성, 그리고 본질의 형이상학
사회학적 논의는 사회적 가시성과 의미를 띠게 되는 다양한 역할과 기능에 대한 존재론적 우수성을 주장하는 행위주체성의 관점에서 사람이라는 개념을 관습적으로 이해하고자 애써왔다. 철학적 담론 자체로 ‘사람‘ 이란, 그 사람이 ‘처한‘ 모든 사회적 맥락이 어쨌든 사람됨을 정의하는 구조와 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전제에 입각한 분석적 연구를 수용해왔다. 그것이 의식이든 언어능력이든 도덕적 배려든 말이다.
‘사람‘ 의 ‘일관성‘ 과 ‘연속성‘ 은 그사람됨의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인 특질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인식 가능성의 규범들이다. ‘정체성‘ 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견고한 개념을 통해 확보하는 한 ‘비일관적‘ ‘불연속적‘ 인 젠더 존재의 문화적 등장은 ‘사람‘ 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심을 품게 만든다. 이런 젠더 존재는 ‘사람‘ 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 으로 정의되는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있는 젠더 규범을 따르는데 실패한 존재이다.
‘인식 가능한‘ 젠더는 어떤 의미에서 섹스, 젠더, 성 습관, 그리고 욕망 간에 일관성과 연속성의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한다.
욕망을 이성애적으로 만들면 ‘여자‘ 와 ‘남자‘ 의 표현적 특질로 이해되는 ‘여성성‘ 과 ‘남성성‘ 간의 분명하고 불균형적인 대립이 생산되어야 하고 또 제도화되어야 한다.
‘정체성‘ 이 담론적 관행의 결과라면, 젠더 정체성은 어느 정도까지 섹스, 젠더, 성 습관, 욕망, 즉 강제적 이성애로 규명될 규제적 관행들 사이의 어떤 관계로 구성될 것인가?
본질의 존재론에 따르면 여성들은 ‘있을‘ 수 없다. 여성들이야말로 차이의 관계이고, 배제된 것이며, 영역이 스스로를 소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또한 항상 이미 남성적인 주체의 단순한 부정이나 ‘타자‘ 로만 이해될 수 없는 ‘차이‘ 이기도 하다.
이러한 섹슈얼리티의 이분법적 규제는 이성애적, 재생산적, 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양성을 억압한다.
본질의 형이상학은 철학적 담론에 관한 현대비평에서 니체를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니체에 관한 해설에서 미셸 아르는 수많은 철학적 존재론이 ‘존재‘ 와 ‘본질‘ 이라는 어떤 환영에 갇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니체식 비판은 젠더 정체성을 둘러싼 다분히 대중적이고도 이론적인 사고를 지배하는 심리적 범주에 적용 가능한 지침이 되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어떤 젠더이다‘ 라는 결론으로, 즉 그 사람의 생물학적성, 심리적 자아감, 그 심리적 자아의 다양한 표현방식, 그중에서도 가장 겉으로 드러나는 성적 욕망의 양태를 가지고 ‘어떤 사람이다‘ 라는 결론으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
강제적이고 당연시된 이성애 제도는 이분법적 관계의 젠더를 요구하고, 남성적 관점과 여성적 관점을 구분하며, 또한 이성애적 욕망의 관행을 통해 이러한 구분을 가능케 하는 이분법적 관계라고 젠더를 규정한다.
푸코는 모든 성차의 범주화에 선행하는 성의 범주는 그 자체로 역사적으로 특정한 섹슈얼리티 양식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분명한 성의 범주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모든 담론적 설명 안의 근본적이고 인과론적 작용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원인‘ 같아 보이는 것이 실은 성적 경험을 규제하고자 하는 당대의 섹슈얼 리티 체제의 생산물임을 폭로한다.
푸코가 정체성을 가정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규제된 질서와 위계의 원칙이며 하나의 규제적 허구라고 폭로하는, 어떤 우연적 속성의 존재론을 주장한다.
영속적 본질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인 구성물, 즉 강제적인 속성의 정렬을 통해 일관된 젠더 연쇄로 생산된 구성물이라면, 본질인 젠더나 명사인 남성, 여성의 존속 가능성이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다. 인식 가능성의 연속적이고 인과론적 모델에 순응하지 못한 속성들의 불화 작용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명사가 아니며, 자유롭게 떠도는 일군의 속성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젠더의 본질적 효과가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형이상학이라는 물려받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 ˝행위, 수행, 과정 뒤에는 어떤 ‘존재‘ 도 없다. ‘행위자‘ 는 그 행위에 부과된 허구에 불과하다. 행위만이 전부이다. 이는 다음의 결과를 선언할 수 있겠다. 즉 젠더의 표현물 뒤에는 어떠한 젠더 정체성도 없다. 정체성은 결과라고 알려진 바로 그 ‘표현물‘ 때문에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6. 언어, 권력, 그리고 위치 변경의 전략
이리가레는 젠더 ‘표식‘ 을 남성 패권적 의미화 경제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다. 남성적 의미화 경제는 자아 연구의 사유기제를 통해 작동되며, 서양철학 전통에서 사실상 존재론의 영역을 결정지어왔다.그러나 위티그에게 언어는 구조상으로는 결코 여성 혐오주의적이지 않지만 그 적용상에서는 여성 혐오주의의 도구나 수단이 된다.
언어는 개인의 선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선택하는 개인들의 집단행동으로 약화되기도 하는 구체적이고 우연적인 실천과 제도들 가운데 등급을 매긴다. 또한 ‘섹스‘ 라는 언어적 허구는, 이성애 욕망의 축에 따라 정체성의 생산을 규제하려 애쓰는 강제적 이성애 체계로 인해 생산, 순환되는 범주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라캉에게도 성차는 본질의 형이상학을 토대로 삼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다. 남성적 ‘주체‘ 란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이성애적 욕망의 무한한 위치 변경을 강제하는 법이 생산한 허구적 구성물이다. 여성성은 결코 주체의 표식이 아니다. 여성성은 젠더의 ‘속성‘ 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여성성은 상징계가 의미화한 결핍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남성적/여성적입장 모두,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젠더를 생산하는 금지법을 통해 제도화되지만 오로지 상상계에 재등장하는 무의식적 섹슈얼리티의 생산을 통해서만 제도화된다.
성차에 대한 페미니즘의 접근은 여성을 이론화하고자 한다. 이는 여성성을 본질의 형이상학의 표현물이 아니라, 배제를 통한 의미화 경제에 기반하고 있는 (남성적) 부인 때문에 발생한, 재현 불가능한 부재로 이론화하려는 것이다. 그 체제 안에서 거부/배제된 것으로서의 여성성은 헤게모니 개념체계를 비판하거나 붕괴할 가능성을 형성하게 된다.
법보다는 권력이 변별적 관계의 사법(금지와 규제) 작용과 (의도하지 않게 발생한) 생산 작용 둘 다를 포괄한다. 따라서 권력관계의 모태 안에서 발생한 섹슈얼리티는 단순히 법 자체를 복제하거나 복사한 것, 남성주의적 동일시 경제를 획일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생산물은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서, 문화적 인식 가능성의 경계를 벗어날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의 경계를 사실상 확장시키는 ‘주체들‘ 의 가능성을 작동시킨다.
‘남성 동일시‘ 의 섹슈얼리티 대신에 우리는 남근적 권력관계의 관점에서 구성된 섹슈얼리티 개념을 전개할 수 있다. 이 권력관계는 섹슈얼리티의 권력의 장에서 피할 수 없는 ‘동일시‘ 의 전복 작용을 통해 바로 그 남근 중심주의의 가능성들을 재상연하고 재분배한다.
젠더는 본질의 외관, 자연스러운 듯한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오랫동안 응결되어온 매우 단단한 규제의 틀 안에서 반복된 몸의 양식화이자 반복된 일단의 행위이다.
2.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
1.구조주의의 비판적 교환
구조주의 담론은 친족의 모든 체계를 특징짓는 교환을 규제하는 보편적 구조가 있다고 주장하는 레비 - 스트로스처럼 법을 단일한 것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레비 - 스트로스가 친족관계를 설명하면서 드러난 구조적 체계성은 인간관계의 구조를 정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보편적 논리에 호소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보편적 논리 속 정체성의 전제들이 갖는 위치 및 이런 정체성의 논리가, 이 논리가 기술하는 문화적 현실 속에 종속된 여성의 위상과 맺는 관계이다.
이리가레의 주장대로, 이 남근로고스 중심 경제는 결코 표명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전제되는 동시에 부정되는, 차연의 경제에 근본적으로 의존한다. 사실 부계 계승 씨족 간의 관계는 동성사회적 욕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리가레는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이를 ‘남성 간 - 섹슈얼리티‘ 라고 불렀다. 그것은 억압되고, 따라서 비난당하는 섹슈얼리티이다. 결국엔 남성들의 유대에 관한 남성 간 관계이지만 여성들을 이성애적으로 교환, 분배함으로써 발생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렇게 남성들 사이에 설정된 상호성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남녀 간의 비상호관계의 조건이자, 이른바 여성 간의 비관계의 관계의 조건이 된다.
레비 - 스트로스에게 근친상간은 사회적 사실이 아니라 확산된 문화적 환영이다.
금기의 존재는 차라리 근친상간의 욕망, 행위, 실은 널리 확산된 근친상간의 사회적 실천이 바로 그 금기를 성애화한 덕분에 효과를 발휘한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레비 - 스트로스를 라캉 식으로 전유하면 주로 일군의 언어구조와 의미를 뜻하는 문화가 재생산되는 한복판에 있는 족외혼의 법칙과 근친상간의 금기에 초점이 모아진다. 총체적으로 볼 때 상징계로 이해되는 언어구조는 자신이 작동되는 다양한 발화의 행위주체들과 별개로 존재론적 통합성을 유지하지만, 법은 문화로 진입하기 위한 모든 유아기적 통과의례라는 개념 안에서 스스로를 언명하고 개별화한다. 이런 금기에 입각해 있는 주체의 발화는, 회복할 수 없는 쾌락을 향한 환유적 대체물로 욕망을 전치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언어는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잔여물이자 대안적 성취물이며, 실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순화하기 위한 다채로운 문화적 산물이다.
2. 라캉, 리비어 그리고 가면의 전략
라캉은 서구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존재론에 주어진 우선성을 반박하면서 ˝존재란 무엇인가?/무엇을 가지는가?˝ 라는 질문이 ˝부권적 경제의 의미화 실천을 통해 어떻게 ‘존재‘ 가 제도화되고 배치되는가?˝ 라는 그 이전의 질문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존재와 부정,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은 아버지 법과 그것의 변별화 기제라는 구조를 갖는 언어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존재론적 성격은, 존재의 외관이나 효과라는 것이 언제나 의미화의 구조를 통해 생산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상징적인 질서는 팔루스 ‘가짐(남성의 위치)‘ 과 팔루스 ‘임(여성의 위치)‘ 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위치를 통해서 문화적 인식 가능성을 만든다.
라캉에게 주체는 존재가 되는 것, 즉 언어 속에 스스로 기반하는 근원적인 기표로 자리잡기 시작함을 뜻한다.
여성은 남성 주체가 스스로 기반하는 위상의 ‘실제‘ 를 반영하거나 재현할 힘과, 그 힘이 철회될 경우 남성 주체라는 위치의 근본적인 환영을 깨뜨릴 힘을 보유한다는 의미에서 팔루스 ‘인‘ 것으로 언급된다. 팔루스 ‘이다‘ 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남성 주체 ‘를 위한 존재‘ 를 의미하며, 그 남성 주체는 ‘~를 위한 존재‘ 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증폭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성은 어떻게 해서 팔루스처럼, 즉 팔루스를 체현하고 확증해줄 결핍처럼 ‘보이는가‘ ?
라캉은 또한 여성의 위치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보인다‘ 는 것이 개입하여 생긴 일인데, 이 ‘보인다‘ 는 것은 ‘가진다‘ 는 것을 대체한다. 그것은 한편으론 여성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것의 결핍을 위장하기 위해서이다.
라캉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것, 즉 이렇게 팔루스인 것 ‘처럼 보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가면이라고 함으로써 모든 젠더의 존재론은 외양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가면은 그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 나 존재론적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면으로 가려지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에 많은 차이가 있다. 가면은 부정되어야 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야 할, 결핍으로 구성된 여성 욕망의 결과인가? 아니면 팔루스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이같은 결핍을 부인한 결과인가? 조건이 달랐더라면 가면은 흠 없이 매끈한 이성애적 여성성의 구성을 파괴했을 수도 있는 양성적 가능성을 감추기 위해서 여성성을 팔루스의 반영물로 구성한 것인가? 리비어의 주장대로 가면은 공격성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유혹과 교태로 바꾸어내는가? 가면은 남성 주체에 저항하는 타자성을 확고히 하고 남성성의 필연적인 실패를 폭로할, 어떤 주어진 여성성 또는 여성적 욕망을 우선적으로 감추거나 억압하는 작용을 하는가? 아니면 가면은 여성성 자체가 최초로 설정되는 수단, 즉 남성성이 효과적으로 배제되고 여성적 젠더 위치의 경계 밖이라고 선언되는, 정체성 형성의 배타적 실천인가?
라캉은 ˝가면의 작용은 (---) 사랑의 거부가 해결되는 방식인 동일시를 지배한다˝ 고 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다. 다시 말해 가면은 우울증적 합체 전략의 일부이고, 사랑의 거부 결과 상실이 발생하슨 곳에서 상실한 대상/대타자의 속성을 몸에 걸치는 것이다.
리비어의 논문 <가면으로서의 여성성> 은 공격성과 갈등 해소라는 이론적 관점에서 ‘가면으로서의 여성성‘ 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리비어는 한 사람의 성적 특질을 표현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또 그 분명한 특성들이 어떻게 그럴듯한 성적 지향을 반영하거나 표현한다고 추측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일련의 고정관념을 갖고 출발한다.
그러나 리비어는 혼합된 젠더 특성의 의미를 ‘갈등의 상호 작용‘ 으로 가져가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에 호소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특질과, 이성애나 동성애 경향의 습득은 갈등의 해소를 통해 생산되며, 이 갈등 해소의 목표는 불안을 억누르는 것이다.
라캉의 분석은 동성애 남성이, 분명한 이성애적 속성으로 간주된 것을 ‘과장‘ 하려는 것이 팔루스를 ‘가지려는‘ 시도라고, 즉 능동적이고 이성애적인 욕망을 가진 주체 위치를 ‘가지려는‘ 시도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남성성을 소망하는 여성들‘ 의 ‘가면‘ 은, 팔루스를 획득했을 때 거세한 사람들이 가할 보복을 피하기 위해 팔루스 ‘갖기‘ 를 거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성서은 남성적 동일시를 지배/해결하는 가면이 된다. 남성과의 동일시는 이성애적 욕망의 모태라고 가정되는 것 안에서 여성인 대상, 즉 팔루스를 향한 욕망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성을 가면처럼 쓴다는 것은 여성적 동일시의 거절을 의미할 수도 있고, 동시에 거절된 여성 타자의 과장된 합체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분법적 규제는 여전히 섹슈얼리티의 틀을 만들고 정형화하는 작용을 하며, ‘실재계‘ 라는 저항의 형식을 미리 결정해둔다. 배제는 억압에 속한 것의 영역 자체를 없애면서 억압에 앞서서 작동한다. 즉 법과 법에 복종하는 대상의 경계선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당대의 지배적 형식으로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되고자 하는 상징계의 요구는 다양한 정체성의 실패라는 드라마와 이런 환영들의 힘을 효과적으로 강화한다.
아버지의 법을 이렇게 피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권위, 성별화된 주체가 그 앞에서 실패하게끔 되어 있는 권위에 비유하는 것은, 그것을 작동시키려는 신학적 충동으로 읽어야 하며, 또한 그 너머를 지칭하는 신학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야 한다.
3. 프로이트와 젠더 우울증
프로이트는 상실한 대상의 내면화와 유지과정은 에고의 형성과 ‘ 대상 선택‘ 에 있어 결정적인 요건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우리는 상실된 대상이 (그 대상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에고의 내면에 다시 세워진다고 가정함으로써 우울증의 고통스러운 혼란 상태를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즉 대상 - 카섹시스는 동일시로 대체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과정의 완전한 의미를 알지 못했고, 얼마나 일반적으로 또 얼마나 전형적으로 이 과정이 나타나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후 우리는 이런 종류의 대체가 에고가 취할 형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또 그것이 ‘성격‘ 이라고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성격 형성이나 젠더 형성과정의 근원적인 양성애를 하나의 복합적 요소로 가정한다.
이성애적 목표를 의도적 상관물로 갖는 남성적, 또는 여성적 기질의 관점에서 양성애를 개념화하면, 프로이트에게는 양성성이 하나의 심리 안에 있는 두 개의 이성애적 욕망의 공존으로 드러난다.
우선 내면화의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젠더를 형성하는 데 있어 내면화된 동일시 상태를 고찰해보고, 두번째로 내면화된 젠더 유사성과 내면화된 동일시의 자기 처벌적 우울증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프로이트는 우울증 환자의 자기 비판적 태도야말로 상실한 애정의 대상을 내면화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엄밀히 말해 대상의 포기는 카섹시스의 부정이 아니라 내면화이고, 따라서 그 카섹시스의 보유이다.
내면화 행위 가운데 분노와 비난은 반드시 상실 자체 때문에 고조되고 내부로 들어와서 유지된다. 에고는 그 내면화된 대상과 위치를 변경하고, 따라서 내면화된 외형에 도덕적 작동원인과 권력을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에고는 자신의 분노와 효력을 에고 이상에게 박탈당하고, 이 에고 이상은 자신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는 에고에 적대적으로 선회한다.
에고 이상은 허가와 금기의 어떤 내적 작인으로 작용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내적 작인은 욕망의 적절한 방향 변화와 승화를 통해서 젠더 정체성을 통합하는 일을 한다.
일련의 허가와 금기로서의 에고 이상은 남성적 동일시와 여성적 동일시를 규정하고 결정한다. 동일시는 대상관계를 대체하는 상실의 결과이기 때문에, 젠더 동일시는 금지된 대상의 성이 하나의 금지로서 내면화되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여성적 기질이나 남성적 기질이 그 금기를 효과적으로 내면화한 결과라면, 또 동성 대상을 상실한 것에 대한 우울증적 해답이 합체라면, 그래서 사실상 에고 이상의 구성을 통해 그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젠더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입증된 금기를 내면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런 정체성은 그 금기의 지속적인 적용 때문에 구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분명한 성의 범주와 조응하는 몸의 양식화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성적 욕망의 생산이나, ‘기질‘ 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말이다. 기질이라는 언어는 동사의 형성(기질을 발한다)에서 명사의 형성(기질이 된다)으로 이동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응결된다(기질들을 가진다). 따라서 ‘기질‘이라는 언어는 거짓 근본주의로서, 금지의 결과를 통해 정서적으로 형성되거나 ‘고정‘ 된다. 그 결과 기질은 심리의 근원적인 성적 사실이 아니라, 에고 이상의 공모와 가치 전환의 행위 및 문화가 부과한, 법으로부터 생산된 효과이다.
정신분석학적 서사에서 기질은, 규제되지 않은 동성애적 카섹시스 때문에 야기된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 뒤늦게 문화라는 이름으로 오는 금지에 의해 훈련받고, 굳어지고, 통합된다.
4. 젠더 복합성과 동일시의 경계
젠더 복합성과 불일치가 문화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다양한 동일시의 확산과 수렴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니면 모든 동일시가 그러한 동일시를 문제시하는 섹슈얼리티의 배제를 통해 구성되는 것인가? 첫번째 물음의 경우, 다변화된 동일시는 변화하면서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비위계적 동일시의 배치를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동일시는 모든 단일한 젠더 속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라캉의 틀에서 동일시는 팔루스 ‘가지기‘ 나 팔루스 ‘이기‘ 라는 이분법적 구분 안에서 고정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결과 이분법에서 배제된 개념은 어떤 것이든 일관된 워치 속에 끊임없이 출몰해 그 위치를 분열시킨다. 배제된 개념은 배제된 섹슈얼리티이며, 주체가 자기 욕망의 원천과 대상을 알고 있다는 주장은 물론, 주체가 자기 자신에 토대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에도 저항한다.
이처럼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등장한 동일시에 관한 대안적 전망은 아버지 법과 관련해서 남성적, 여성적 위치의 고정성에 저항하는 젠더 배치상의 갈등, 수렴점, 혁신적 불협화음을 생산해내는 여러 공존하는 정체성들을 주장한다.
내투사는 애도의 과정으로 이해되지만, 상실의 마법 같은 해결을 의미하는 합체는 우울증의 특징이다. 내투사는 은유적 의미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반면, 합체는 반은유적이다.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 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될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자 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 을 갖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이성애적 동일시가 설정되는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의 경우, 상실은 슬픔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동성애적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경우, 상실은 우울증적 구조를 통해 유지된다.
동성애적 카섹시스, 욕망과 목적을 다 거부하는 것, 사회적 금기에 의해 강제되고 발달 단계들을 통해 전유된 거부의 결과는 우울증의 구조로 귀결된다.
합체가 환영이라는 말은 동일시의 합체가 자구적 의미화의 환영이거나 자구적 의미를 만드는 환영이라는 의미이다.
자구적 의미의 환영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젠더 변별화가 근친상간 금기와 그에 앞서 동성애 금기를 따르는 것이라면, 어떤 젠더가 ‘된다‘ 는 것은 자연스러워지려는 수고로운 과정인 셈이다.
욕망의 환영적 본질은 욕망의 토대나 원인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욕망의 사건이나 대상으로서의 몸을 드러낸다.
환영으로 만들어진 몸은 실재로서의 몸과 관련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 환영은 문화적으로 제도화된 다른 환영과의 관계 속에서만, 즉 ‘문자적 의미‘ 의 장소와 ‘실재‘ 의 장소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환영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실재‘ 가 갖는 한계는 당연시된 몸의 이성애화 안에서 생산되며, 그 몸 안에서 신체적 사실은 그 신체성의 가차없는 결과를 반영하는 원인이자 욕망으로 작동한다.
몸의 성별화된 표면은, 따라서 자연스러운(것이 된) 정체성과 욕망을나타내는 필연적인 기호로 등장한다.
5. 금기를 권력으로 재공식화하기
프로이트와 마르쿠제 모두 문화적 인공물이나 제도란 에로스의 승화된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며, 승화의 생산적 효과를 밝힌다. 그러나 푸코는 이런 승화 이론들과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원형적인 욕망을 가정하지 않는 어떤 생산적인 법을 주장한다. 이 법의 작용은 법 자신이 권력관계에 몸담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은폐하고 자신의 계보학에 대한 서사적 설명을 구성해냄으로써 정당화되고 강화된다.
특히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 즉 생물학적 남녀를 분명하고도 위계화된 젠더로 변형시키는 규제된 문화기제야말로 즉각적으로 문화제도(가족, ‘여성 교환‘ 의 잔여 형태들, 강제적 이성애등)의 명령을 받는 것이며, 또한 개개인의 심리 발달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가속화하는 법이 주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물학적 다성욕성을 문화의 명령을 받은 이성애로 바꾼 문화적 변형물이 젠더인 만큼, 또한 그런 이성애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명징하고 위계화된 젠더 정체성을 펼치는 만큼, 루빈에게 이성애의 강제적 성격이 붕괴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서 젠더 자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억압의 목적은 표면상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욕망이 아니라 권력 자체의 다변적 배치, 즉 사법적이고 억압적인 법이 갖는 외양의 필연성과 보편성의 위치를 바꾸는 바로 그 다변성이다. 사실 보편성을 법에 귀속시키는 것은, 법이란 단순히 사회괸계가 발생하는 지배틀로 작동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분명 정신분석학 이론은 언제나 근친상간 금기의 생산적 작용을 인식해왔다. 즉 금기는 이성애적 욕망과 분명한 젠더 정체성을 생산한다. 이성애를 분명한 사회형식으로 온전히 보존하려면 인식 가능한 동성애 개념이 필요하고, 그것을 문화적으로 인식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성애 개념의 금지 또한 필요하게 된다.
기존 문화형식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고 해서 꼭 그것이 그런 형식의 인식 가능성의 모태에서 배제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주변화된 것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나, 최소한 사회적 허가의 손실을 요구하는 문화적 가능성이다.
근친상간 금기의 경우, 라캉은 (욕구와 대립하는) 욕망이 그 법을 통해 제도화된다고 주장한다. 라캉은 법 이전의 쾌락이란 환영에 불과하며, 욕망의 무한한 환영 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외양의 질서‘. 그 설명의 토대가 되는 시간성은 주체의 균열과 욕망의 실패를 가져오면서, 서사의 일관성에 저항하는 시간 전개의 층위에서 일관성을 재규정한다.
3. 전복적 몸짓들
1.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몸의 정치학
라캉에 따르면 아버지 법은 ‘상징계‘ 로 이름 붙여진 모든 언어적 의미화 구조를 이루고, 따라서 문화 자체를 조직하는 보편 원리가 된다.
크리스테바는 문화적 의미란 모체에 대한 기원적 관계의 억압을 필요로 한다는 라캉의 서사에 도전한다. 그녀는 ‘기호계‘ 가 기원적 모성의 몸 때문에 생겨난 언어의 한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라캉의 기본 전제를 반박하는 것일뿐더러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크리스테바에게 기호계는 바로 문화의 관점에서, 더 정확하게는 다원적 의미와 의미의 비종결성이 지배적인 시적 언어 안에서, 근원적인 리비도의 다원성을 표현한다. 사실 시적 언어는 아버지 법을 파열하고 전복하고 대체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관점에서 모성적 몸을 회복하는 것이다.
기호계의 특징인 다성적 욕구는 전담론적 리비도 조직을 구성하고, 이 유기조직은 가끔씩 언어 안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언어 자체보다도 앞선 존재론적 위치를 유지한다.
라캉과 달리, 크리스테바는 시적 언어가 기원적 충동의 억압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시적언어란, 충동이 언어에 대한 일상적이고 일의적인 관점과 단절되어, 억압할 수 없는 다성적 소리와 의미의이질성을 드러내는 언어적 사례라고 주장한다.
상징계가 억압하고 기호계가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이 일차적 충동은 이제 모성적 충동으로 이해된다. 상징계가 어머니의 거부를 단정하고 있다면 기호계는 리듬, 유운, 억양, 소리 작용, 반복 등을 통해 시적 발화 속에서 모성적 몸을 재현하고 회복한다.
크리스테바는 기호계가 상징계를 파괴하거나 침식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시적 언어는 일관되고 의미 있는 주체를 모성적 몸이라는 일차적 연속체 안으로 용해시켜 버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신의 토대가 되는 법에 저항하는 상징적 언어와의 단절이나, 이와 똑같이 그 자신의 내적 본능 안에서부터 언어 속으로 파열되는 현상은 단지 리비도의 이질성이 언어로 폭발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에고의 개체화에 앞서 있는 모성적 몸에 의존하는 육체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적 언어는 항상 모성적 영역으로의 회귀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모성이란 리비도적 의존성과 충동의 이질성 둘 다를 의미한다.
크리스테바는 시적언어는 상징계에 참여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유지되며, 그에 따라 언어적 소통의 규범으로 유지된다는 데 동의하기는 했지만, 동성애도 똑같이 정신병이 아닌 사회적 표현물이 될 수 있다고 허용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동성애가 정신병이라는 혐의는 아버지 법과 비록 빈약할지언정 여성적 ‘에고‘ 의 토대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데서 온다. 그 에고는 모체와의 분리에 우울증적으로 반응한다. 따라서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여성 동성애는 문화 안에 등장하는 정신병이다.
크리스테바에게 시와 모성성은 부권적으로 허가된 문화 속의 특권적 실천을 재현한다. 따라서 부권적으로 인가된 문화의 전복은 다른 형태의 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억압된 문화의 내부로부터, 문화의 감추어진 토대를 구성하는 충동의 이질성으로부터 나온다.
크리스테바는 분명 이성애야말로 친족과 문화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그녀는 레즈비언의 경험을 부권적으로 허가된 법을 수용하는 대신 택할 수 있는 정신병적 대안으로 규정한다.
크리스테바가 아버지 법을 물화하는 것은 여성 동성애를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모성성의 다양한 의미와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크리스테바가 주장하는 기호계와 상징계의 대립은 여기서 비대립의 혐의를 벗어나는 다양성의 원칙과, 그런 다양성의 억압에 근간한 정체성의 원칙 사이에 있는 형이상학적 분쟁으로 환원된다.
모성 본능이 아버지 법에 선행하는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 것처럼 개념화하는 한, 크리스테바는 욕망을 억압한다고 일컬어지는 법이 바로 욕망의 원인이 되는 방식을 생각하지 못한다. 부권화되기 이전의 인과론의 발현보다는 이러한 욕망들이야말로, 모성성이란 친족의 긴급성이 요구하고 재현하는 사회적 관해이라는 점을 입증할 수도 있다.
푸코에게 몸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본질적인 성 ‘관념‘ 이 투여되는 담론 안에서의 결정에 선행하는 의미로는 ‘성별화‘ 되지 않는다. 몸은 오로지 권력관계의 맥락에서만 담론 안의 의미를 획득한다. 섹슈얼리티는 권력, 담론, 몸, 정서성이라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조직이다.
모성적 몸이란, 여성의 몸이 모성성을 자신의 본질이자 욕망의 법칙으로 간주하기 위해 필요한 섹슈얼리티 체계의 효과나 결과물로 이해될 것이다.
피억압자의 이름으로 억압자를 해방시키는 것을 피하려면 법의 전체적 복합성과 미묘함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법을 넘어선 진정한 몸이라는 환영으로부터 스스로를 치유할 필요가 있다.
2. 푸코, 에르퀼른, 그리고 성적 불연속성의 정치학
푸코는 ‘섹스‘ 를 기원보다는 하나의 결과로 간주하는 역담론을 끌어온다. 그는 육체적 쾌락의 기원적이고 연속적인 원인이자 의미였던 ‘섹스‘ 대신에 담론과 권력이라는 열려 있는 복합적인 역사체계로서의 ‘섹슈얼리티‘ 를 제안한다.
푸코에 따르면 ‘섹스‘ 는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 맥락을 다시 설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에 따라 사법 권력도 자신의 생산기제를 감추는 생산 권력이 산출한 하나의 구성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푸코는 ‘성‘ 의 범주와 성차가 어떻게 담론 안에서 몸의 정체성의 필수요소로 구성되는지를 탐구하는 게 자신의 프로젝트라고 여긴다.
한편 푸코는 담론과 권력의 복합적 상호 작용으로 생산되지 않는 ‘섹스‘ 란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다른 한편으로 푸코는, 섹슈얼리티와 권력은ㅈ동시 공존하는 것이므로 섹스를 긍정함으로써 권력을 반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한다.
푸코가 처음 성의 범주에 반대한 이유는, 그것이 일련의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성적 기능과 요소에 인공적 통일성과 단일성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코가 주장하는 이질성은, 그 자체가 바로 푸코가 억압적인 사법적 법으로 설정한 의료 담론 때문에 구성된다.
법은 단순히 다르게 자연화된 이질성에 부과하는 문화적 과제만은 아니다. 법은 ‘자연‘ 이라는 자신의 개념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고 이분법적, 비대칭적 몸의 자연화를 통해 그 합법성을 획득한다. 그 안에서 팔루스는 페니스와 분명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페니스를 자신의 당연한 도구이자 기호로 사용하게 된다.
3. 모니크 위티그 --- 몸의 해체와 허구적 성
보부와르는 오히려 사람은 어떤 성을 갖고, 어떤 성으로서, 성별화되어 태어나는 것이며, 성별화되는 것과 인간이 되는 것은 동시 공존하면서 동시 발생하는 것이라고 기꺼이 단언하고자 했다. 즉 성이란 인간의 어떤 분석적인 특성이며, 성별화됮 않은 인간이란 없고, 그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속성에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섹스가 젠더를 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젠더도 섹스를 반영하거나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보부와르에게 섹스란 불변의 사실이지만 젠더는 획득되는 것이므로, 섹스는 변할 수 없어도, (혹은 그것은 그녀의 생각일 뿐일 수도 있지만) 젠더는 섹스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구성이자 성별화된 몸이 야기하는 문화적 의미의 무수히 열린 가능성인 것이다.
‘여성‘ 은 여성적인 몸의 문화적 구성이 될 필요가 없고, 남성도 남성적인 몸으로 해석될 필요가 없다. 섹스/젠더 구분의 급진적인 형성은 성별화된 몸이 수많은 다른 젠더들의 사례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젠더 자체가 통상 두 가지로 제한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모니크 위티그는 성의 범주는 불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재생산적 섹슈얼리티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자연 범주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용례라는 주장이다. 섹스와 젠더는 아무 차이가 없으며 ‘섹스‘ 의 범주는 그 자체가 젠더화된 범주이고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부과된 것이며, 자연화되어 있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위티그는 이 일련의 강제적인 사회관계에서,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성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주장한다. 여성들이 그들의 성이다. 그리고 뒤집어 말해 성은 반드시 여성적이다.
위티그는 ‘섹스‘ 같은 담론적 범주를, 사회적 장에 강제적으로 부과된 추상적 관념으로 생각하며, 이차적인 질서나 물화된 ‘실제‘ 를 생산하는 추상적 관념을 이해한다.
‘섹스‘ 는 담론적이면서도 지각적인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우연한 인식체계를 표시하며, 물리적인 육체가 지각되는 상호관계를 강제로 형성함으로써 지각을 만드는 어떤 언어를 의미한다.
성을 ‘명명‘ 하는 것은 지배와 강제의 행위이며, 성차의 원칙에 따라 담론적/지각적인 몸의 구성을 요구함으로써 사회적인 실제를 창조하고 또 합법화하는 하나의 제도화된 수행문이다.
담론이 의사 전달을 위해서, 발화 주체로 하여금 바로 그 억압의 관점에 개입하라고 요구하게 되면, 즉 발화 주체 자체의 불가능성이나 인식 불가능성을 다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 담론은 억압적인 것이 된다.
이런 언어 ‘체계‘ 에 따르면 힘이 막대하다는 데는 위티그도 동의한다. 또한 개념, 범주, 추상적인 관념들은 그들이 만들어내고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몸에 대해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언어는 발화 행위를 통해 현실에 작용하는 권력윽ㄴ 가정힌기도 하고 또 변화시키긷ᆢ 하는데, 이런 작용이 반복되면서 관행을, 궁극적으로는 제도를 침해하게 된다.
위티그는 발화 주체란 ‘나‘ 를 말하는 행위에 있어서 ˝모든 언어를 사용할 능력을 갖고 자신으로부터 홀로 나아가면서, 전체로서의 언어를 새롭게 전유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즉 말은 ‘주체성의 절대적 행위‘ 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주체성으로의 진입은 효과적인 섹스의 전복이자 여성성의 전복이다. 즉 ˝스스로 전체적인 주체, 즉 젠더가 없고, 보편적이며, 전체적인 주체가 되지 않고서, 나를 말할 수 있는 여성은 없다˝.
위티그에게 언어의 근원적 존재론은 모든 사람에게 주체성을 확립할 동등한 기회를 준다. 발화를 통해 주체성을 확립하고 하는 여성이 직면하는 실질적 과제는, 여성에게 부과된 성적 물화를 벗어버릴 수 있는 총체적 능력에 달려 있다.
이상적인 의미에서 보면, 위티그에게 발화는 어떤 잠재적익 행위이고, 동시에 말하는 다른 주체들과의 평등한 관계를 함축하는 어떤 주관적 주장이다. 이 이상적이거나 기원적인 언어 ‘계약‘ 은 암묵적 층위에서 작동한다. 언어는 이중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 즉 언어는 진실하고 포괄적인 인간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오직 몇몇 사람들만이 적절히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밑에서 권위가 제거되지 않으면 ‘말할‘ 수도 없는 어떤 위계질서를 구성할 수도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관점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기에 대한 이 불균형적 관계에 선행하는 것은 이상적인 사회계약이며, 그 사회계약 안에서 모든 일인칭의 발화 행위는 발화 주체들 간의 절대적 상호관계를 전제하고 확증한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발화 상황에 대한 위티그의 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적인 상호관계를 왜곡하고 은닉하는 것이 이성애적 계약이다.
이성애는 섹슈얼리티를 알려주는 유일한 강제적 권력의 표현이 아니다. 위티그가 이성애 계약의 규범과 기준으로 기술하는 일관된 이성애라는 이상은 어떤 불가능한 이성이며, 그 자신도 지적하듯 하나의 ‘페티시‘ 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애주의는 애초에 체현이 불가능한 규범적 성의 위치들을 제시한다.
위티그의 제안은, 섹스의 범주를 전유한 뒤 재배치함으로써 특정한 게이의 성적 정체성을 증식시키는 게이와 레즈비언 문화 안의 담론들을 전복시킨다. 퀸, 부치, 팸, 소녀 같은 용어, 심지어 다이크, 퀴어, 패그 등의 패러디로 재전유된 용어들이 성의 범주 및 원래 경멸적이던 동성애적 정체성의 범주를 재배치하여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모든 용어들은 ‘이성애 정신‘ , 즉 피억압자의 정체성에 대한 억압자적 관점에서의 동일시 양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실천에 대한 규범적 핵심은 권력의 완전한 초월이라는 불가능한 환영보다는, 권력의 전복적이고 패러디적인 재배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티그의 유물론은 사회적인 제도와 실천을, 특히 이성애주의 제도를 비판적 분석의 토대로 간주한다. <이성애 정신>과 <사회적 계약> 에서 위티그는 이성애 제도를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질서의 근본적 토대로 이해한다. ‘자연‘ 과 물질성이라는 영역은 관념이며,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다. 그 괸념과 구성물을 생산하는 것은 이성애적 계약의 정치적 관점을 지지하고자 하는 이러한 사회제도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티그는 자연을 정신적 재현으로 이해하는 고전적 이상주의자이다. 강압적 의미를 가진 언어는 성적 지배라는 정치 전략을 조장하기 위해, 또 강제적 이성애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이러한 재현물을 생산한다.
그녀의 목적은 자연스러운 몸이라는 관념이 하나의 구성물임을 폭로하려는 것이고, 이성애 권력에 대항할 몸을 형성하기 위한 일련의 해체/재건의 전략들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위티그의 서사 전략이 남성성을 차별화하거나 배제하려는 전략을 통해 여성성을 규명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념하자. 위티그는 원래 남성적인 영역에 속하던 것으로 보이는 바로 이런 ‘가치들‘ 을 전복적으로 배치하고 재전유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레즈비어니즘은 이성애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이성애와의 근본적인 단절 속에서 자신을 규명하는 레즈비어니즘은, 바로 그 이성애적인 구조를 재의미화할 능력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게 된다.
더 교활하고 효과적인 전략은 정체성의 범주 자체를 전유하고 재배치하는 가운데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성‘ 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정체성‘ 의 자리에 다양한 성적 담론이 집중된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다. 이는 어떤 형식이 되던 간에, 성의 범주를 영원히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4. 몸의 각인, 수행적 전복
푸코의 글에서도, 몸은 문화가 각인된 하나의 표면이자 장면에 비유된다. ˝몸은 사건이 각인된 표면이다.˝ 계보학의 임무는 ˝몸이란 역사에 의해 완전히 각인된 것임을 폭로하는 것˝ 이라고 푸코는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는 몸의 종속을 요구하는 의미화 실천이 창조하는 가치와 의미들이다. 이러한 몸의 파괴는 발화 주체와 그 주체의 의미를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푸코는 에르퀼른에 대한 분석에서 이따금 담론 이전의 몸, 그 몸의 힘이 갖는 다양성에 대해 동의한다. 이런 몸의 힘은 ‘역사‘ 의 흥망성쇠로 이해되는 어떤 권력체계가 그 몸에 부과한 문화적 일관성이라는 규제적 실천들을 파열시키기 위해 몸의 표면을 돌파해나아가는 것이다.
내면성에서 젠더 수행성으로
젠더의 규율적인 생산은 재생산 영역에서의 이성애적 구성과 섹슈얼리티 규제라는 관점에서 젠더를 잘못 안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행위, 제스처, 그리고 욕망은 내적 핵심이나 본질이라는 결과를 생산하지만, 또 정체성의 조직 원칙이 어떤 원인이 된다고 암시하지만, 결코 그 원인을 드러내지 않는 의미화의 부재들이 작용을 일으키며 그것을 몸의 표면 위에다 생산한다. 보통은 그 의미가 해석되는 이런 행위, 제스처, 실행들은 수행적이다. 달리 표현하고자 하는 본질이나 정체성이란 육체적 기호나 다른 담론적 수단을 통해 꾸며지고 유지된 조작물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원본적이거나 기원적인 젠더 정체성에 대한 관념은 때로 드래그, 옷 바꿔 입기, 그리고 부치/팸의 정체성에 대한 성적 양식화라는 문화적 실천 속에서 패러디된다.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원본없는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이런 패러디적 양식으로 취해진 젠더의 의미들은 분명 패권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문화의 일부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미들은 자신을 패러디하는 재맥락화를 통해 당연성을 상실하고 유동성을 얻게 된다.
젠더는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작인의 장소나 안정된 정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만일 젠더가 내부적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본질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수행적 성과물이 된다.
젠더의 속성과 행위들, 몸이 자신의 문화적 의미를 보여주고 생산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수행적인 것이라면, 어떤 행위나 속성이 재단될 수 있는 선험적 정체성이란 없다.그리고 진정하거나 거짓된 젠더 행위, 사실적이거나 왜곡된 젠더 행위 또한 없다. 결국 진정한 젠더 정체성이라는 가정은 규제가 만든 허구임이 드러날 것이다. 즉 본질적 섹스와 진정하거나 고정된 남성성 혹은 여성성의 개념 자체도 젠더의 수행적 성격을 감추는 전략의 일부로서 구성된 것이며, 남성의 지배와 강제적 이성애라는 규제적 틀 바깥에 있는 젠더 배치를 증식시킬 수행적 가능성을 감추려는 전략의 일부로 구성된 것이라는 말이다.
결론 ---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
페미니즘의 ‘우리‘ 는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환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 환영적 구성물은 자신의 목적이 있지만, 그 용어의 내적 복합성과 불확정성을 부정하고, 또그것이 동시에 재현하고자 하는 구성물의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구성한다.
‘행위주체성‘ 의 위치를 결정하는 문제는 보통 ‘주체‘ 의 생존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주체‘ 는 그것이 타협해나가는 문화의 장에 선행하는 어떤 안정된 존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니, 만일 주체가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에는 행위주체성이 부과된다. 미리 앞서 존재하는 주체에 자격을 주고 그 주체를 어떤 궁지에 빠뜨리는 방식의 설정에는, 그 문화와 담론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 것이 아닌 행위주체성의 지점을 수립하고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사실 정체성을 하나의 실천으로, 그리고 어떤 의미화 실천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주체를 ‘규칙에 갇힌‘ 담론의 결과로 나타난 효과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때 담론은 스스로를 언어생활에 널리 퍼진 일상적 의미화 행위들 안으로 밀어넣는다.
의미화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안에 인식론적 담론이 ‘행위주체성‘ 이라고 지칭한 것을 품고 있다. 인식 가능한 정체성을 지배하는 규칙, 즉 ‘나‘ 에 대한 인식 가능한 주장을 규제하는 규칙, 젠더 위계와 강제적 이성애의 모태를 따라 일부 구성되는 규칙은 반복을 통해 작동한다. 위계적 이분법의 단단한 코드에 저항하는 새로운 젠더의 가능성을 주장할 수 있게 만든다면, 정체성의 전복은 오로지 반복된 의미화 실천의 내부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패러디의 실천들은 특권화되고 당연시된 젠더 배치와, 파생되고 가상적이며 모방된 것, 말하자면 실패한 모방본의 구분에 재개입해서 그것을 재통합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젠더의 패러디적 반복은 단단한 심층과 내적 본질이라는 젠더 정체성의 환영 또한 폭로한다.
페미니즘의 비평적 과제는 이런 구성물들이 가능하게 만든 전복적 반복 전략의 위치를 결정하는 일이다. 또한 이런 정체성을 구성하고 경합시킬 내적 가능성을 제시하는 반복적 실천에 참여함으로써, 그 실천에 개입할 공간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과제는 이미 존재하는, 그러나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지정된 문화 영역 안에 존재하는 이런 가능성들을 재기술하는 것이다. 만일 정체성들이 어떤 정치적인 논법상의 전제로 더이상 고정될 수 없다면, 그리고 정치성도 더이상 일련의 기성화된 주체에 속하는 추정된 이해관계가 파생시킨 일련의 실천들이라 생각할 수 없다면, 분명히 옛 정치성의 잔해로부터 새로운 정치성의 배열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제 섹스와 젠더에 대한 문화적 배치는 증폭될 것이다. 아니 그 배치의 당대적 증식은 인식 가능한 문화적 삶을
설정하는 담론 안에서 표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