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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평점 :
◇ 정희진처럼 읽기
다독에 대한 욕심은 누구나 있다. 작가는 공개적으로 다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도 욕심을 버려야지.
작가의 논리가 거침없다. 고개 푹 숙이고, 나는 아는 만큼만 이해해야겠다.
둥글게 알기보단 모서리를 세우고 치라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속이 뜨끔하다.
삶을 잘 아는 거 같다. 나는 모르고 지나가는데 모르는 줄도 모른다.
자기가 원하는 시각으로 읽는데, 나는 작가가 말하는 걸 찾기 바쁘다.
제1장 고통
분노와 평화는 그 자체로는 뜻이 없다.
누구의 분노, 누구의 평화인가가 의미를 결정한다. 따라서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삶이란 나는 남고 내게 의미있는 관계자들은 떠나는 과정이다. 시간은 그들을 태우고 멈추지 않고 나를 앞지른다. 건강, 능력, 기억, 사람, 중독..... . 이들을 제때,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할 때 몸에 남아 병이 된다.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벼랑에서 만나기를 원한다. 벼랑을 긍정하면,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이고 나를 서럽게 한 사랑일지라도 다시 믿어보며 억울한 사회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자유의 가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되어야만 하는 조건이 좌우한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삶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곁에서 경험하고 잘 아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이동되어야 한다.
2장 주변과 중심
내가 약자의 삶을 ‘선택‘하면, 즉 ‘일부러‘ 얼룩진 옷을 입으면 얻게 되는 인식론적 자원이 있다.
얼룩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 얼룩이 이물감, 분노 조절 실패, 사회적 시선과의 싸움...
구조와 개별 남성이 변해야 하는데, 남성성으로 조직된 가족, 사회, 국가, 시민사회가 먼저 변할 리 없다. 누리는 자 입장에서는 지금 상태가 좋고 성 차별은 어디서나 ‘상식‘과 ‘미풍양식‘으로 합의되기 때문이다. ‘사자‘의 자신감은 자기들은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변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시인은 고뇌한다. 이때 변화는 저항이 아니라 자기 채찍질이다.
인간은 요구나 투쟁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존과는 다른 반작용을 행사할 때 변화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주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끔찍한 이유는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안녕이 타인을 억압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회적, 개인적 믿음 때문이다. 누군가 유복하려면 누군가는 야만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혐오로 괴로워하는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한다. 자신의 안위는 타인의 파멸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인과론은 원인을 규명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악의 정치에서 인과론은 잠시 피해자를 위로해준다. 원인을 알고 상대를 파악하면 덜 상처받고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원인은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대단히 복합적이다. 혹 인과 관계가 밝혀졌다 치자. 하지만 그 뒤에는 ˝왜 하필 나지?˝라는 더 치명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다.
희망은 마음의 욕망이다. 현실이 아니다. 사람은 희망 없이 못산다고 하지만 착각 없이, 이데올로기 없이, 통념 없이 못 살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완전한 승리는 적의 언어를 통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표현할 언어(생각)가 없는 것이다. ‘일베‘와 ‘할 말은 하는 신문‘이 만끽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표현의 권력이다.
어떤 글을 읽고 즐거움, 의문, 성찰을 경험했다면 글의 소속(?)은 중요하지 않다. 논문은 칼럼보다 우월하고 논픽션은 픽션보다 사실에 가까운가? 혹은 그 반대인가? 문제는 글의 내용과 정신이다.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무지가 이니라 무지를 깨달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할 때, ‘걸어 다니는 재앙‘이 따로 없다.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 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세상 그 누가, 이 권력을 포기하겠는가. 식사 준비의 번거로움, 귀찮음, 먹는 사람의 평가, 남은 음식과 치우기 걱정은커녕 아예 그런 발상 자체와 무관한 삶. 누가 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권리와 ‘마음의 평화‘, 자유를 포기하겠는가.
3장 권력
사람들이 폭력을 선택하는 이유는 저항과 자유를 포함한 ‘무질서‘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비인간적 규정, 억압적 관료주의, 무신경, 군기, 일벌백계는 무질서에 대한 매력적인 대응책이다.
선함과 강함, 힘과 정의는 양립할 수 없다. 선과 정의는 객관적인 가치가 아니라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경쟁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자신의 옮음을 증명하려는 대표적 행위이다.
어떤 인간을 보편적 인간으로 삼고 어떤 삶을 인간의 조건으로 상정하고 사유의 기반으로 삼을 것인가에 따라 평화의 개념은 달라진다.
국적과 관계없이 부자는 글로벌 시티즌, 빈자는 난민인 시대다. 국가 내부의 빈부 격차는 말할 것도 없고. 글로벌 시티 내부의 양극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도시는 국가와 달리 빈곤을 구제할 규범적 의무가 없다.
국가 있는 사회(문명 사회)와 국가 없는 사회(원시 사회)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권이나 관료 체계가 아니다. 권력이 사회에 의해 통제되는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는가이다.
안보처럼 정립되지도 다듬어지지도 않은 개념이 맹위를 떨치는 경우도 드물다.
한국 사회에서 안보는 단지 자신의 공포, 악심, 더러움 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만능 무기로 쓰일뿐이다.
군인이 특정한 계층만으로 구성되고 전문화될수록 그리고 첨단 무기가 발달할수록 군대는 사회와 멀어진다. 그들의 어려운 임무와 노동은 은폐되고 존재는 비가시화된다. 어느 사회나 지원병 제도는 계급화, 인종화된다.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평화는 가장 당파적인 개념인데 보편적인 가치처럼 인식된다. 일단, ‘평‘ 자체가 일반화의 폭력을 뜻하는 글자다. 평등과 마찬가지. 평등 실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의 기준이다.
평화에 대한 욕망은 반평화적이다. 평화를 둘러싼 경합이 평화다. ‘모든 이가 사이좋은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불가능한 상태를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평화다. 강자의 양보로 평화가 실현된 경우는 없다. 양보했더라도 그것은 정의이지, 관용이나 배려가 아니다. 관용은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사회가 쥐어준 권력에서 나온다.
국가는 실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이념들이 경합하는 제도다. 국론 통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페어플레이는 중요하다. 간첩은 국내 정치의 필요이자 산물이다. 중요한 것은 진짜 간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간첩의 정치적 효과다.
물론, 무관심은 강력한 당파다. ˝선호 정당이 없다.˝ 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우주의 진공 상태라도 그런 상황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지지 정당이 있다/없다가 아니라 무관심의 결과가 무엇인가이다.
기권은 선택이 아니다. 개인이 기본적 권리마저 두려워하게 만든 권력의 승리다.
4장 안다는 것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순수한 보고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태도, 입장을 드러내는 행위다.(투사!) 모든 발화는 객관적일 수 없다. 지식은 인식자의 렌즈를 통해 우리 앞에 재현된 것이다. 공부는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앎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며 따라서 글쓰기나 말하기(인문학)는 저자 개인에 대한 언설이다. 보편적 지식은 인식자가 자신을 인간의 대표라거나 우주, 신, 과한 등과 동격으로 간주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지배하는 정열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 질문이 없을 때, ‘나는 정상‘이라고 믿을 때, ‘지당하신 말씀‘,‘쉽게 읽히는‘, ‘대중성‘ 있는 글이 생산된다.
도그마, 관점, 당파성은 사유의 본질적인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종합과 객관화를 위해 보충 노력을 하는 것은 무지의 결과다.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 이런 사고들이다. 정론은 정론이 아니라 정론이다. 정론은 당위가 아니라 경합과 갈등으로 획득하는 가치다.
보편성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특수는 보편의 반대말이 아니라 하위 개념이다.
기존 규범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안에서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 메시지에 ‘자발적으로‘ 수갑을 채우는 행위다. 사회가 당연시하는 사유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지성이고 운동이다.
혁명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편자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면서도 그러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서구 중심의 근대성에 대한 도전이다. 직선적 시간관, 이분법, 민주주의로 오해된 발전주의, 중산층 콤플렉스, 타자를 만드는 시간...
답은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다. 의미는 기존에 주어진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찾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도 중단 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주체는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5장 삶과 죽음
생로병사가 사실이고 무병장수는 희망, 아니 탐욕이다. 꿰멘 자리는 아물기도 하고 터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생명은 미봉의 점철. 그러므로 미봉책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도다.
몸은 교환, 사용, 묘사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사고와 생활을 체현하는 사람 자체다. 몸은 사회이며 정신이다. 몸에 대해 쓰는 것은 인물을 쓰는 것이고 인생에 대해 쓰는 것이다. 몸에 주제가 있다.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 서 있는 토대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 자신이다.
알아야 할 것은 분노의 본질이 아니라 분노의 위치다.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먹지 못할 떡을 두 손에 든 사람들이 있다. 절충은 아는 방법,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앎 자체와 가장 거리가 먼 행위이다. 욕심일 뿐 지식도 정보도 아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하지 않는다.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 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지 않을까.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상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모든 것은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