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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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진처럼 읽기


다독에 대한 욕심은 누구나 있다. 작가는 공개적으로 다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도 욕심을 버려야지.
작가의 논리가 거침없다. 고개 푹 숙이고, 나는 아는 만큼만 이해해야겠다.
둥글게 알기보단 모서리를 세우고 치라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속이 뜨끔하다.
삶을 잘 아는 거 같다. 나는 모르고 지나가는데 모르는 줄도 모른다.
자기가 원하는 시각으로 읽는데, 나는 작가가 말하는 걸 찾기 바쁘다.

제1장 고통

분노와 평화는 그 자체로는 뜻이 없다.
누구의 분노, 누구의 평화인가가 의미를 결정한다. 따라서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삶이란 나는 남고 내게 의미있는 관계자들은 떠나는 과정이다. 시간은 그들을 태우고 멈추지 않고 나를 앞지른다. 건강, 능력, 기억, 사람, 중독..... . 이들을 제때,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할 때 몸에 남아 병이 된다.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벼랑에서 만나기를 원한다. 벼랑을 긍정하면,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이고 나를 서럽게 한 사랑일지라도 다시 믿어보며 억울한 사회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자유의 가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되어야만 하는 조건이 좌우한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삶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곁에서 경험하고 잘 아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이동되어야 한다.

2장 주변과 중심

내가 약자의 삶을 ‘선택‘하면, 즉 ‘일부러‘ 얼룩진 옷을 입으면 얻게 되는 인식론적 자원이 있다.
얼룩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 얼룩이 이물감, 분노 조절 실패, 사회적 시선과의 싸움...

구조와 개별 남성이 변해야 하는데, 남성성으로 조직된 가족, 사회, 국가, 시민사회가 먼저 변할 리 없다. 누리는 자 입장에서는 지금 상태가 좋고 성 차별은 어디서나 ‘상식‘과 ‘미풍양식‘으로 합의되기 때문이다. ‘사자‘의 자신감은 자기들은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변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시인은 고뇌한다. 이때 변화는 저항이 아니라 자기 채찍질이다.
인간은 요구나 투쟁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존과는 다른 반작용을 행사할 때 변화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주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끔찍한 이유는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안녕이 타인을 억압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회적, 개인적 믿음 때문이다. 누군가 유복하려면 누군가는 야만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혐오로 괴로워하는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한다. 자신의 안위는 타인의 파멸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인과론은 원인을 규명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악의 정치에서 인과론은 잠시 피해자를 위로해준다. 원인을 알고 상대를 파악하면 덜 상처받고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원인은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대단히 복합적이다. 혹 인과 관계가 밝혀졌다 치자. 하지만 그 뒤에는 ˝왜 하필 나지?˝라는 더 치명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다.

희망은 마음의 욕망이다. 현실이 아니다. 사람은 희망 없이 못산다고 하지만 착각 없이, 이데올로기 없이, 통념 없이 못 살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완전한 승리는 적의 언어를 통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표현할 언어(생각)가 없는 것이다. ‘일베‘와 ‘할 말은 하는 신문‘이 만끽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표현의 권력이다.

어떤 글을 읽고 즐거움, 의문, 성찰을 경험했다면 글의 소속(?)은 중요하지 않다. 논문은 칼럼보다 우월하고 논픽션은 픽션보다 사실에 가까운가? 혹은 그 반대인가? 문제는 글의 내용과 정신이다.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무지가 이니라 무지를 깨달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할 때, ‘걸어 다니는 재앙‘이 따로 없다.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 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세상 그 누가, 이 권력을 포기하겠는가. 식사 준비의 번거로움, 귀찮음, 먹는 사람의 평가, 남은 음식과 치우기 걱정은커녕 아예 그런 발상 자체와 무관한 삶. 누가 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권리와 ‘마음의 평화‘, 자유를 포기하겠는가.

3장 권력

사람들이 폭력을 선택하는 이유는 저항과 자유를 포함한 ‘무질서‘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비인간적 규정, 억압적 관료주의, 무신경, 군기, 일벌백계는 무질서에 대한 매력적인 대응책이다.

선함과 강함, 힘과 정의는 양립할 수 없다. 선과 정의는 객관적인 가치가 아니라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경쟁적인 담론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자신의 옮음을 증명하려는 대표적 행위이다.
어떤 인간을 보편적 인간으로 삼고 어떤 삶을 인간의 조건으로 상정하고 사유의 기반으로 삼을 것인가에 따라 평화의 개념은 달라진다.

국적과 관계없이 부자는 글로벌 시티즌, 빈자는 난민인 시대다. 국가 내부의 빈부 격차는 말할 것도 없고. 글로벌 시티 내부의 양극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도시는 국가와 달리 빈곤을 구제할 규범적 의무가 없다.

국가 있는 사회(문명 사회)와 국가 없는 사회(원시 사회)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권이나 관료 체계가 아니다. 권력이 사회에 의해 통제되는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는가이다.

안보처럼 정립되지도 다듬어지지도 않은 개념이 맹위를 떨치는 경우도 드물다.
한국 사회에서 안보는 단지 자신의 공포, 악심, 더러움 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만능 무기로 쓰일뿐이다.

군인이 특정한 계층만으로 구성되고 전문화될수록 그리고 첨단 무기가 발달할수록 군대는 사회와 멀어진다. 그들의 어려운 임무와 노동은 은폐되고 존재는 비가시화된다. 어느 사회나 지원병 제도는 계급화, 인종화된다.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평화는 가장 당파적인 개념인데 보편적인 가치처럼 인식된다. 일단, ‘평‘ 자체가 일반화의 폭력을 뜻하는 글자다. 평등과 마찬가지. 평등 실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의 기준이다.
평화에 대한 욕망은 반평화적이다. 평화를 둘러싼 경합이 평화다. ‘모든 이가 사이좋은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불가능한 상태를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평화다. 강자의 양보로 평화가 실현된 경우는 없다. 양보했더라도 그것은 정의이지, 관용이나 배려가 아니다. 관용은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사회가 쥐어준 권력에서 나온다.

국가는 실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이념들이 경합하는 제도다. 국론 통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페어플레이는 중요하다. 간첩은 국내 정치의 필요이자 산물이다. 중요한 것은 진짜 간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간첩의 정치적 효과다.

물론, 무관심은 강력한 당파다. ˝선호 정당이 없다.˝ 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우주의 진공 상태라도 그런 상황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지지 정당이 있다/없다가 아니라 무관심의 결과가 무엇인가이다.
기권은 선택이 아니다. 개인이 기본적 권리마저 두려워하게 만든 권력의 승리다.

4장 안다는 것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순수한 보고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태도, 입장을 드러내는 행위다.(투사!) 모든 발화는 객관적일 수 없다. 지식은 인식자의 렌즈를 통해 우리 앞에 재현된 것이다. 공부는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앎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며 따라서 글쓰기나 말하기(인문학)는 저자 개인에 대한 언설이다. 보편적 지식은 인식자가 자신을 인간의 대표라거나 우주, 신, 과한 등과 동격으로 간주할 때만 가능하다. 자신을 지배하는 정열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 질문이 없을 때, ‘나는 정상‘이라고 믿을 때, ‘지당하신 말씀‘,‘쉽게 읽히는‘, ‘대중성‘ 있는 글이 생산된다.

도그마, 관점, 당파성은 사유의 본질적인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종합과 객관화를 위해 보충 노력을 하는 것은 무지의 결과다.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 이런 사고들이다. 정론은 정론이 아니라 정론이다. 정론은 당위가 아니라 경합과 갈등으로 획득하는 가치다.

보편성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특수는 보편의 반대말이 아니라 하위 개념이다.
기존 규범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안에서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 메시지에 ‘자발적으로‘ 수갑을 채우는 행위다. 사회가 당연시하는 사유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지성이고 운동이다.

혁명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편자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면서도 그러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서구 중심의 근대성에 대한 도전이다. 직선적 시간관, 이분법, 민주주의로 오해된 발전주의, 중산층 콤플렉스, 타자를 만드는 시간...

답은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다. 의미는 기존에 주어진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찾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도 중단 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과 ‘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주체는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5장 삶과 죽음

생로병사가 사실이고 무병장수는 희망, 아니 탐욕이다. 꿰멘 자리는 아물기도 하고 터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생명은 미봉의 점철. 그러므로 미봉책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도다.

몸은 교환, 사용, 묘사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사고와 생활을 체현하는 사람 자체다. 몸은 사회이며 정신이다. 몸에 대해 쓰는 것은 인물을 쓰는 것이고 인생에 대해 쓰는 것이다. 몸에 주제가 있다.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 서 있는 토대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 자신이다.
알아야 할 것은 분노의 본질이 아니라 분노의 위치다.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먹지 못할 떡을 두 손에 든 사람들이 있다. 절충은 아는 방법,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앎 자체와 가장 거리가 먼 행위이다. 욕심일 뿐 지식도 정보도 아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하지 않는다.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 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지 않을까.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상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모든 것은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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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 지혜와 평온으로 가는 길
혜민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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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내 맘에 꼭 드는 글이 있다.
내 맘에 꼭 들지 않고 남의 얘기같지만 흥미로운 글이 있다.
이 책은 내 맘에 드는 글만 조금 있다.
나에겐 그렇다.

이 책을 선물받았다.
글을 가까이 한다고 하니 주는 이의 마음을 더 했을 것이다.
책은 고맙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 마음을 받지 못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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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 2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95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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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의 성 2

페미니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관심이 많든 적든 양성의 평등에 대한 많은 이슈들을 접했을 것이다.
또한 그것에 대한 좋은 의견들을 보면서 과하기도 덜하기도 하단 생각은 하겠지만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여기 보부아르는 여성의 일생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망라하여 세밀하고 심도있게 조명하였다.
너무 많은 분량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삶에 대한 풍부한 어휘, 섬세한 묘사, 강력한 문체는 정말 놀라웠다.
어떻게 답을 찾을 것인가?
보부아르의 글에 스며들 듯 몰입하다보면 그 속에 실마리가 보인 듯하다. 그리고 타자로서의 여성의 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제 또 다른 이의 글을 보면서 나 자신 더 많은 생각을 할 것이고 불가피한 변화를 예측해 본다.

제2부
현대 여성의 삶

제2편 상황

제1장 기혼여성
예속된 기혼여성의 삶.
부부를 마치 문이 닫힌 감옥과도 같이 폐쇄적인 공동체 단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대신에 개인이 저마다 하나의 주체로서 사회에 통합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커 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역시 사회에 연결된 다른 개인과 더불어 손익을 떠나서 순수한 유대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다. 이는 두 자유인의 서로에 대한 올바른 인식 위에 이루어진다.

제2장 어머니
모성이라는 것은 나르시시즘ᆞ이타주의ᆞ몽상ᆞ성실ᆞ기만ᆞ헌신ᆞ쾌락ᆞ멸시의 기묘한 혼합이다.

제3장 사교생활
간통ᆞ우정ᆞ사교생활은 모두 결혼생활에 있어서 기분전환이 될 뿐이다. 결혼생활의 속박을 견디는 데 도움은 될 수 있어도, 속박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그것은 거짓된 도피 방법에 불과하며, 여자에게 운명을 올바르게 개척 할 길을 조금도 열어주지 않는다.

제4장 매춘부와 첩
결혼은 곧 매음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 ‘창녀제도는 가정에 던져진 어두운 그림자로서 문명화된 인류를 따라다닌다‘ 고 모르간은 말한다. 남자는 아내의 순결과 정조를 용의주도하게 운명지어 놓지만, 자신은 여자에게 강요하는 그 제도에 만족하지 못한다.
결혼한 여자는 한 남성을 통해 다른 모든 남성으로부터 보호받고, 창녀는 모든 남성들을 통해 한 남성의 배타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제5장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여자의 일생은 - 여자는 아직도 암컷의 기능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 남자의 일생에 비하면 생리적 운명에 더 많이 좌우된다.
어머니가 폭군도 되지 않고, 잔인한 인간으로도 변하는 일 없이 자식들의 생활에서 행복을 발견하려면, 관용과 무관심의 흔치 않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나이 든 여자는 미래를 향하여 새출발하라는 권고를 받으면 ˝이미 늦었어˝ 하고 비통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주어진 미래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여자는 너무 일찍 은퇴해 버린다. 열정이나 신뢰, 희망이나 분노가 결여된 그녀는 자기 주위에서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늘 그녀의 숙명이 되어 버린 삶의 반복 속에 도피한다. 반복을 하나의 체계로 삼고 가정생활에 열중하거나 신앙 속에 갇혀버린다. 그리고 금욕주의 속에 자랑스럽게 들어앉아 무미건조해지고 냉담해지며 이기적이 된다.

제6장 여자의 상황과 성격
여자는 자신을 수동적인 존재라고 자각한다.
여자는 남성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배웠다.
여자의 삶은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는다. 오직 수단에 불과한 사물 - 식량ᆞ의복ᆞ주거 등 - 을 생산하고 보존하는 데만 소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수단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본다.
여자 쪽에서 보면 투쟁은 이미 출발에서부터 불성실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손에는 어떤 효과적인 무기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삶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선,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안주할 수 있는 그런 선을 요구한다. 조화라는 관념은 여성의 세계를 여는 열쇠의 하나이다. 거기에는 부동의 완전성, 전체이든 요소 하나하나이든 직접적인 정당화, 그리고 총체에 대한 그녀의 수동적 참가가 포함되어 있다. 조화로운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가 행동을 통해 구하는 그것에 도달한다. 그녀도 세계를 넘고 세계로부터 요구되며, 그래서 ‘선‘의 승리에 협력을 한다.
일반적으로 ‘여자‘라는 성을 말하는 것은 ‘영원한 남자‘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남자는 세계 속에 자기의 자유를 투사하는 훨씬 더 구체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남성의 자아 실현은 여성의 경우보다 훨씬 훌륭하게 나타난다. 여자들에게는 무엇을 시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저마다의 한계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유를 행사하는 지를 비교한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자유는 완전히 각자에게 있다. 다만 여자에게는 자유란 다만 추상적이며 공허한 것이므로 여자는 저항의 형태로밖에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떠한 가능성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저항만이 유일하게 열려진 길이다. 그런 사람들읏 자기들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거부하고 미래의 길을 여는 데 노력해야만 한다. 체념은 책임의 포기이며 도피이다. 여자 스스로 자기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해결방법이 없다

제3편
정당화

제1장 나르시시즘의 여자
나르시시즘은 자기소외의 한 과정이다. 즉 자아는 절대목표가 되고 주체는 그 속으로 도피해 버린다.
여자는 계획과 목적을 통해서 자기를 완수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인격의 내재성 속에서 자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거울의 반사가 자아와 일치되는 것은 특히 여자에게서이다. 남성미는 초월성의 표시이고, 여성미는 내재의 수동성을 지닌다.
한 우주를 만드는 거울의 틀 속에 미래가 온통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거울의 반사 속에 빠져 있는 여자는 누구나 공간과 시간에 유일한 절대자로서 군림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가 나타내려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를 지나치게 대단한 존재로 바라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가 인정하는 것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나르시시트 여자는 자기의 세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불안하고 과민하여 짜증내고 흥분하기 쉬우며, 모든 것에 의심을 품는다. 또 그녀의 허영심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전전긍긍하여 찬사가 성공을 간절히 구하고, 더욱더 자기 주위의 음모를 의심하게 된다.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불신의 어둠 속에 빠진다.

제2장 사랑에 빠진 여자
연약함 속에서가 아니라 그 굳센 의지에서, 자기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확립하기 위해서 여자가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야말로 사랑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생명의 원천이 되어 치명적인 위험은 되지 않을 것이다.

제3장 신비주의의 여성
신비주의적인 열정은 연애나 나르시시즘과 마찬가지로 활동적이고 독립된 생활 속에서 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이런 개인적 구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는 수밖에 없다. 여자가 자기의 분신이나 신 같은 비현실과 관계를 맺든, 혹은 현실적 존재와 더불어 비현실적 관계를 창조하든, 그녀는 세계에서 발붙일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의 주관성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녀의 자유는 신비화된 채로 남아 있다. 자유를 올바르게 실현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바로 능동적 행동을 통해 자유를 인간사회에 던지는 것이다.

제4편
해방

제1장 독립된 여성
여자가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해서 남자의 지위와 동등한 도덕적ᆞ사회적ᆞ정신적 지위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자답다는 관념은 습관이나 유행에 따라 인위적으로 규정된 것으로, 외부에서 여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강요되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지지 않는 자주적인 활동가라 하더라도 여자를 수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세계에 끼어들어가 함께 어울려야만 할 것이다.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의 저항에 치열하게 투쟁해 온 여자는 - 남성처럼 - 자기의 육체적 욕망을 채울 필요뿐만 아니라, 행복한 성적 모험이 초래하는 긴장의 완화와 기분전환을 원한다. 그런데 이런 자유가 여자에게 구체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환경이 아직도 있다.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여성의 정신상태를 크게 악화시키는 것은, 그녀들과 똑같은 사회에 속하고, 같은 출발점에 서 있으며, 똑같은 기회를 받았으면서도 기생적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여자들의 존재이다.
대다수의 남자들도 평범한 운명밖에는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덧붙여 두어야겠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여자가 우리에게 아직도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보이는 것은, 가장 뛰어난 남자들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여자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세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마땅하다.
모든 인간이 성을 넘어 자유로운 실존의 험난한 영광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자는 자기의 역사, 문제, 의구심, 희망을 인류의 그것과 융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여자는 자기의 삶과 작품 속에서 자기라는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주어진 현실 전체를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영원한 진리인 듯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황은 변화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은 명확하게 역사적으로 나타난 상황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까지는 여자의 가능성이 억압되어 인류의 손실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여자 자신을 위해서, 여자에게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할 때라는 것이다.

결론
인류는 종과는 달리 역사적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인간사회에는 자연적인 것은 없으며, 특히 ‘여자‘는 문명에 의해 고안된 산물이다.
서로를 주체로 인정한다 해도 저마다 상대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타자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남녀관계는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남성의 자연적인 행동이 얼마나 인간적이 되었는가, 또는 인간적인 존재가 얼마나 자연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그의 인간성이 얼마나 자연적이 되었는가 등을
나타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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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 1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94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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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의 성 1

두 권으로 나눠진 책 중에서 첫 번째 책을 읽고 느낀 간단한 소감은, 비본질적인 타자로서의 여자가 겪는 삶에 남자가 비겁하지 말라는 것이다.
힘의 우위와 권력에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여자에게 자유로움을 빼앗지 말라는 것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기 위해 여자가 노력을 하는데 너무 많은 힘을 쏟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보통의 남자들은 매우 정의롭고 윤리적이지만 위기에 처할 때, 위험에 빠질 때, 생존이 절박할 때, 아주 충분히 비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여자의 희생이 따른다면, 여자는 주체가 되기 위한 어려운 싸움이 뒤따르게 된다.

제 1 부
사실과 신화

프롤로그
주체와 타자는 상호적이고 타자는 주체로 변화한다. 그런데 타자가 주체로 변화하기 위해 주체는 다른 자유를 향한 부단한 자기초월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유를 완성한다. 여자는 개인의 가능성을 문제삼으면서 그것을 행복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자유의 관점에서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

제1편 운명

제1장 생물학적 조건
생물학적으로 여자의 일이란, 이미 완전하게 형태를 갖춘 능동적인 생명요소를 살찌게 하는 데 한정된다 라고 19세기까지 논쟁되어 왔다.
생리학적 약함이 아닌 ‘약함‘은 인간이 스스로 정한 목표나 사용하는 기구, 그리고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법칙에 비추어서만 비로소 약함으로써 나타난다. ‘약함‘의 관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려면 실존적ᆞ경제적ᆞ도덕적 가치 기준이 필요하다.
한 사회 안에서 육체는 행위를 통해서 의식에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현실성을 갖는다. 생물학은 ˝왜 여자가 타자인가?˝ 하는 우리의 답변에 질문을 줄 수 없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자의 자연적인 본질이 어떻게 파악되어 왔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 인류가 여자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제2장 정신분석적 견해
남성을 기준으로 한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좌절과 소외됨을 거부하고 자기 초월을 실현하는 것이다.
새로운 도구가 발명됨에 따라 남자의 생산 노동이 강조되면서 남자의 지배가 보장되었다.
여자의 육체적 연약함과 도구와의 관계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열등함으로 드러난 여성 노동력의 한계, 성적인 압박 및 경제적 실체 만을 보는 유물사관의 경계를 지우면 안된다.

제3장 유물사관의 입장
우리는 여자를 연구해 가는 과정에서 생물학ᆞ정신분석학ᆞ유물사관의 여러 공로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ᆞ성생활ᆞ기술 등은 인간 존재의 총체적 전망 속에서 파악될 때에만 인간에게 구체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완력ᆞ음경ᆞ도구의 가치는 하나의 가치 체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즉 가치는 실존하는 인간이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기본적 투기 현상에 의해 결정된다.

제2편 역사

제1장 유목민들
남자는 실존자로서 자기를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창조한다.
이처럼 실존주의적 견해는 원시 유목민의 생물학적ᆞ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남성들의 우위를 가져왔는가를 밝혀 주었다. 여자 앞에서 남자가 지배자로 군림한 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에 의문을 품고, 생명 그 자체보다 삶의 이유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계획은 시간 속에서 자기를 반복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순간을 지배하고 미래를 형성해 나아가는 데 있다.

제2장 토지의 경작인들
남자는 조금씩 경험을 수단으로 삼게 되고, 남성적 원리가 그의 실제 생활과 상징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정신‘이 ‘생명‘을 이기고, 초월이 내재성을, 기술이 마술을, 이성이 미신을 이긴 것이다. 남자는 자연으로부터 해방될 때 여자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다.

제3편 신화

제1장 꿈과 불안 그리고 우상
인간은 존재를 포기하고 자기실존을 짊어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도덕적 태도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남자는 혼자서는 자기를 이룰 수가 없고, 또 같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는 위험에 직면한다. 그의 일생이란 결코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어려운 계획이다.
그는 모순되게도 생명과 휴식, 실존과 존재를 동시에 갈망한다. 남자의 이 꿈이 구현된 것이 바로 여자이다. 여자를 통해서 남자는, 자유의 상호성 속에 그 근원이 있는 주인과 노예의 가차 없는 변증법에서 빠져 나올 한 가지 수단을 부여받는다.
여자는 ‘타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남자가 본질적으로 느끼는 실존의 허무와는 다르게 하나의 충실한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타자‘는 주체의 눈에 객체처럼 보임으로써 존재로 인정받는다. 실존자가 자기 마음 속에 품는 욕구불만이 여자라는 존재의 부재로 구체화되므로, 남자는 여자를 통하여 자기합일을 이루려고 노력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한다.
남자는 자기의 개별적 실존을 확립하고 자기의 ‘본질적인 차이‘에 자랑스럽게 안주하고 싶어한다. 또한 남자는 자아의 장벽을 깨뜨리고 물과 대지와 밤과 ‘허무‘와 ‘전체‘에 융합하고 싶어한다. 여자는 남자를 유한성에 가두지만, 남자가 그 본래의 한계를 초월하게도 한다. 여자의 모호한 마력도 실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떤 사회든지 오늘날까지 여자는 아직 남자에게 공포심을 불어넣고 있다. 이는 남자가 여자에게 투사하는 그의 육체적 우연성(또는 비본질성)에 대한 공포이다.
여자는 남자가 육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타인의 모습을 빌린, 자신의 신격화된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다. 남자가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자기의 가치와 법칙을 강요하는 존재를 품에 껴안았을 때, 그가 포옹하고 있는 것은 ‘유례 없는 괴물‘, 즉 자기 자신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자기의 것으로 만든 이 타자와 합일함으로써 자신에게 도달하기를 소망한다.

제2장 다섯 사람 작가로 보는 여성신화
그들 각자에게 이상적인 여자는 자기에게서 바로 그 자신을 뚜렷이 드러내 줄 수 있는, ‘타자‘를 정확히 구현하는 여성이다.

제3장 신화와 진실
신화를 의미의 파악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의미는 대상에 내재적이다. 그 의미는 생생한 체험 속에서 의식에 반영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화란 의식이 아무리 도달하려 해도 끝까지 달아나는 초월적 이념이다.
신화의 대다수는 남자가 자기의 실존과 사회에 대하여 취하는 자발적인 태도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나 생활 체험을 ‘초월적 이념‘으로 높인 것은 가부장제 사회가 자기정당화의 목적으로 행한 것이다.
신화는 상식적이며 사려를 가장한 정신이 분별없이 뛰어들어 빠져 버리는 허위적 객관성의 함정이다.
여자에게서 한 인간적 존재를 인정한다 해서 남자의 생활경험을 빈약하게 만들진 않는다. 그것이 주체와 주체의 서로 주고 받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다양성, 풍요성, 강인성도 무엇 하나 잃는 것이 없다. 신화를 거부하는 것은 남녀간의 모든 극적관계를 깨뜨려 버리는 것도 아니고, 여자라는 현실을 통하여 남자가 올바르게 발견하는 의의를 부정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시와 사랑과 모험과 행복과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동ᆞ감정ᆞ열정이 진리 속에 존재하기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제2부
현대 여성의 삶

프롤로그
남성의 위신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경제적ᆞ사회적으로 공고한 기초 위에 서 있다. 따라서 여자의 전통적인 운명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자는 어떤 식으로 그 신분을 합습하는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체험하는가? 어떤 세계에 갇혀 있는가? 여자에게 어떤 탈출방법이 허용되는가?

제1편 형성

제1장 유년기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기‘의 자주적 존재와 ‘타자‘라는 존재 사이에 충돌이 있다. 그녀는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자신을 객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 결과 자율성이 부정된다.
자기를 하나의 주체로, 자율성ᆞ절대성ᆞ초월성을 갖춘 존재로 느끼는 개인에게, 자기 안에서 열등성을 선천적 본질로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일자‘로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설정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또한 스스로 타자로서 바라보는 것도 특이한 경험이다. 인생수업을 쌓아 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여자로서 자각했을 때, 소녀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환경은 남자의 세계에 의해 사방이 막혀 있고 제한되며, 지배되고 있다. 여자가 제아무리 높이 뛰어오르고 멀리 밀고 나아가더라도, 언제나 그녀의 머리 위에는 천장이 있고, 앞길을 가로막는 벽이 있다. 남자가 받드는 신들은 저 멀리 하는 위쪽에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여자아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신들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이다.

제2장 젊은 처녀
남자에게 ‘타자‘는 여자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처럼, 여자의 눈에는 ‘타자‘가 남자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타자‘는 본질적인 모습으로 그녀에게 나타나고, 그녀는 그 앞에서 자기를 비본질로 파악한다. 그녀는 부모의 가정에서, 어머니의 지배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능동적인 정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주인의 손에서 다시 수동적ᆞ순종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한다.
남자는 끊임없이 세계에 의문을 품고 그때그때 주어진 조건에 저항할 수 있으므로, 그가 그 세계에 받아들일 때는 능동적으로 확인한다는 인상을 갖는다. 여자는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 낼 뿐이다. 세계는 여자 없이도 규정되고 불변한다.
젊은 처녀는 자연과 사회가 자기에게 부여하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그녀는 세계와의 투쟁을 시작하기에는 내적으로 너무도 분열되어 있다. 현실을 도피하거나 형식적으로 현실을 부인하는 데 그친다. 그녀의 온갖 욕망의 이면에는 어떤 불안이 겹쳐 있다. 자기 뜻대로 미래를 소유하기를 갈망하지만, 과거와 단절되는 것을 두려원한다. 한 남자를 ‘갖고‘ 싶지만 그의 먹이가 되는 것은 싫다. 여러 공포들의 뒤에는 언제나 욕망이 숨어 있다. 성폭행은 그녀를 소름끼치게 하지만 수동적이 되는 것은 즐겁고 기쁘다. 그래서 기만과 책략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온갖 부정적 강박관념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욕망과 불안의 양면성으로 나타난다.
젊은 처녀의 태도는 대개 자기 기만이라는 불안한 그림자 속에서 그녀가 세계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거부하는 몸짓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된다.

제3장 성 입문
성적 성숙이란 연애ᆞ애정ᆞ관능 추구속에서 여성이 자기의 수동성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상대 남성과 대등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의 자유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녀의 육체를 원한다면, 그녀는 객체가 되는 순간에 자기를 본질로서 재발견하고, 스스로 선택한 복종 속에서 자유로이 머물 수 있다.
여자를 불태우는 부동의 정염, 여자는 남성의 거친 격정 속에서 그 정염의 전도된 모습을 본다. 남성의 위력은 곧 그녀가 남성에게 가하는 힘이다. 이 생명으로 팽창된 남성의 성기는, 남성에게 쾌락을 주는 여성의 미소가 남성의 소유인 것처럼 그녀의 것이다. 남녀가 지닌 모든 부는 서로에게 전해지고 서로를 통해 재확인되며, 동적이고 황홀한 결합을 이룬다. 이와 같은 조화에 필요한 것은 세련된 기교가 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인 성적 매력에 바탕을 두고 육체와 정신 두 영역에서 서로 주고 받는 관용이다.

제4장 레즈비언
여자의 동성애는 여자의 자주성과 육체의 수동성을 조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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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탄생 -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 사이언스 클래식 15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 황희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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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탄생

사랑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어머니의 본질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생존에 따르고 생식에 따른 선택을 설명하려 한다.
여기에 페미니즘에 대해 간결하게 부각하는 부분은 남성 우월의 부계사회에 편향성을 가진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에서 인식과 판단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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