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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 2 ㅣ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95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2월
평점 :
◇ 제2의 성 2
페미니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관심이 많든 적든 양성의 평등에 대한 많은 이슈들을 접했을 것이다.
또한 그것에 대한 좋은 의견들을 보면서 과하기도 덜하기도 하단 생각은 하겠지만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여기 보부아르는 여성의 일생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망라하여 세밀하고 심도있게 조명하였다.
너무 많은 분량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삶에 대한 풍부한 어휘, 섬세한 묘사, 강력한 문체는 정말 놀라웠다.
어떻게 답을 찾을 것인가?
보부아르의 글에 스며들 듯 몰입하다보면 그 속에 실마리가 보인 듯하다. 그리고 타자로서의 여성의 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제 또 다른 이의 글을 보면서 나 자신 더 많은 생각을 할 것이고 불가피한 변화를 예측해 본다.
제2부
현대 여성의 삶
제2편 상황
제1장 기혼여성
예속된 기혼여성의 삶.
부부를 마치 문이 닫힌 감옥과도 같이 폐쇄적인 공동체 단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대신에 개인이 저마다 하나의 주체로서 사회에 통합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커 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역시 사회에 연결된 다른 개인과 더불어 손익을 떠나서 순수한 유대 관계를 형성해 갈 수 있다. 이는 두 자유인의 서로에 대한 올바른 인식 위에 이루어진다.
제2장 어머니
모성이라는 것은 나르시시즘ᆞ이타주의ᆞ몽상ᆞ성실ᆞ기만ᆞ헌신ᆞ쾌락ᆞ멸시의 기묘한 혼합이다.
제3장 사교생활
간통ᆞ우정ᆞ사교생활은 모두 결혼생활에 있어서 기분전환이 될 뿐이다. 결혼생활의 속박을 견디는 데 도움은 될 수 있어도, 속박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그것은 거짓된 도피 방법에 불과하며, 여자에게 운명을 올바르게 개척 할 길을 조금도 열어주지 않는다.
제4장 매춘부와 첩
결혼은 곧 매음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 ‘창녀제도는 가정에 던져진 어두운 그림자로서 문명화된 인류를 따라다닌다‘ 고 모르간은 말한다. 남자는 아내의 순결과 정조를 용의주도하게 운명지어 놓지만, 자신은 여자에게 강요하는 그 제도에 만족하지 못한다.
결혼한 여자는 한 남성을 통해 다른 모든 남성으로부터 보호받고, 창녀는 모든 남성들을 통해 한 남성의 배타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제5장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여자의 일생은 - 여자는 아직도 암컷의 기능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 남자의 일생에 비하면 생리적 운명에 더 많이 좌우된다.
어머니가 폭군도 되지 않고, 잔인한 인간으로도 변하는 일 없이 자식들의 생활에서 행복을 발견하려면, 관용과 무관심의 흔치 않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나이 든 여자는 미래를 향하여 새출발하라는 권고를 받으면 ˝이미 늦었어˝ 하고 비통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주어진 미래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여자는 너무 일찍 은퇴해 버린다. 열정이나 신뢰, 희망이나 분노가 결여된 그녀는 자기 주위에서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늘 그녀의 숙명이 되어 버린 삶의 반복 속에 도피한다. 반복을 하나의 체계로 삼고 가정생활에 열중하거나 신앙 속에 갇혀버린다. 그리고 금욕주의 속에 자랑스럽게 들어앉아 무미건조해지고 냉담해지며 이기적이 된다.
제6장 여자의 상황과 성격
여자는 자신을 수동적인 존재라고 자각한다.
여자는 남성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배웠다.
여자의 삶은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는다. 오직 수단에 불과한 사물 - 식량ᆞ의복ᆞ주거 등 - 을 생산하고 보존하는 데만 소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수단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본다.
여자 쪽에서 보면 투쟁은 이미 출발에서부터 불성실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손에는 어떤 효과적인 무기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삶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선,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안주할 수 있는 그런 선을 요구한다. 조화라는 관념은 여성의 세계를 여는 열쇠의 하나이다. 거기에는 부동의 완전성, 전체이든 요소 하나하나이든 직접적인 정당화, 그리고 총체에 대한 그녀의 수동적 참가가 포함되어 있다. 조화로운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가 행동을 통해 구하는 그것에 도달한다. 그녀도 세계를 넘고 세계로부터 요구되며, 그래서 ‘선‘의 승리에 협력을 한다.
일반적으로 ‘여자‘라는 성을 말하는 것은 ‘영원한 남자‘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남자는 세계 속에 자기의 자유를 투사하는 훨씬 더 구체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남성의 자아 실현은 여성의 경우보다 훨씬 훌륭하게 나타난다. 여자들에게는 무엇을 시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저마다의 한계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유를 행사하는 지를 비교한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자유는 완전히 각자에게 있다. 다만 여자에게는 자유란 다만 추상적이며 공허한 것이므로 여자는 저항의 형태로밖에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떠한 가능성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저항만이 유일하게 열려진 길이다. 그런 사람들읏 자기들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거부하고 미래의 길을 여는 데 노력해야만 한다. 체념은 책임의 포기이며 도피이다. 여자 스스로 자기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해결방법이 없다
제3편
정당화
제1장 나르시시즘의 여자
나르시시즘은 자기소외의 한 과정이다. 즉 자아는 절대목표가 되고 주체는 그 속으로 도피해 버린다.
여자는 계획과 목적을 통해서 자기를 완수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인격의 내재성 속에서 자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거울의 반사가 자아와 일치되는 것은 특히 여자에게서이다. 남성미는 초월성의 표시이고, 여성미는 내재의 수동성을 지닌다.
한 우주를 만드는 거울의 틀 속에 미래가 온통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거울의 반사 속에 빠져 있는 여자는 누구나 공간과 시간에 유일한 절대자로서 군림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가 나타내려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를 지나치게 대단한 존재로 바라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가 인정하는 것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나르시시트 여자는 자기의 세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불안하고 과민하여 짜증내고 흥분하기 쉬우며, 모든 것에 의심을 품는다. 또 그녀의 허영심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전전긍긍하여 찬사가 성공을 간절히 구하고, 더욱더 자기 주위의 음모를 의심하게 된다.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불신의 어둠 속에 빠진다.
제2장 사랑에 빠진 여자
연약함 속에서가 아니라 그 굳센 의지에서, 자기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확립하기 위해서 여자가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야말로 사랑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생명의 원천이 되어 치명적인 위험은 되지 않을 것이다.
제3장 신비주의의 여성
신비주의적인 열정은 연애나 나르시시즘과 마찬가지로 활동적이고 독립된 생활 속에서 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이런 개인적 구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는 수밖에 없다. 여자가 자기의 분신이나 신 같은 비현실과 관계를 맺든, 혹은 현실적 존재와 더불어 비현실적 관계를 창조하든, 그녀는 세계에서 발붙일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의 주관성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녀의 자유는 신비화된 채로 남아 있다. 자유를 올바르게 실현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바로 능동적 행동을 통해 자유를 인간사회에 던지는 것이다.
제4편
해방
제1장 독립된 여성
여자가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해서 남자의 지위와 동등한 도덕적ᆞ사회적ᆞ정신적 지위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자답다는 관념은 습관이나 유행에 따라 인위적으로 규정된 것으로, 외부에서 여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강요되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지지 않는 자주적인 활동가라 하더라도 여자를 수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세계에 끼어들어가 함께 어울려야만 할 것이다.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의 저항에 치열하게 투쟁해 온 여자는 - 남성처럼 - 자기의 육체적 욕망을 채울 필요뿐만 아니라, 행복한 성적 모험이 초래하는 긴장의 완화와 기분전환을 원한다. 그런데 이런 자유가 여자에게 구체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환경이 아직도 있다.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여성의 정신상태를 크게 악화시키는 것은, 그녀들과 똑같은 사회에 속하고, 같은 출발점에 서 있으며, 똑같은 기회를 받았으면서도 기생적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여자들의 존재이다.
대다수의 남자들도 평범한 운명밖에는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덧붙여 두어야겠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여자가 우리에게 아직도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보이는 것은, 가장 뛰어난 남자들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여자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세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마땅하다.
모든 인간이 성을 넘어 자유로운 실존의 험난한 영광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자는 자기의 역사, 문제, 의구심, 희망을 인류의 그것과 융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여자는 자기의 삶과 작품 속에서 자기라는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주어진 현실 전체를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영원한 진리인 듯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황은 변화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은 명확하게 역사적으로 나타난 상황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까지는 여자의 가능성이 억압되어 인류의 손실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여자 자신을 위해서, 여자에게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할 때라는 것이다.
결론
인류는 종과는 달리 역사적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인간사회에는 자연적인 것은 없으며, 특히 ‘여자‘는 문명에 의해 고안된 산물이다.
서로를 주체로 인정한다 해도 저마다 상대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타자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남녀관계는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남성의 자연적인 행동이 얼마나 인간적이 되었는가, 또는 인간적인 존재가 얼마나 자연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그의 인간성이 얼마나 자연적이 되었는가 등을
나타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