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한 건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짧은 인연으로 스쳐가는 사람들이 기왕이면 나와의 만남을 유쾌하고 즐거운 것으로 기억하게 하겠다고 마음먹기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가장 예뻤고 예뻐야 했던 시기의 나는 지나치게 우울하고 무거웠다. 시쳇말로 세상 고민을 나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듯했다. 쉽게 웃을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울지도 못했고, 나 스스로에게 지독하게 가혹한데다 남들에게도 박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연 내게는 친구가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그때의 내가 마치 다른 별에서 온 외계생명체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한 친구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나라도 나처럼 바싹 날을 세운 채 자기 세계에 잔뜩 웅크린 아이를 친구로 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활에 쫓긴 부모님은 항상 바빴고 운동신경이 둔한 나는 바깥놀이에도 자신이 없었다. 텅 빈 집 말고는 갈 곳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는 외톨이였던 내게 유일한 벗은 책뿐이었다. 외로움은 내게 끝없는 허기를 불러일으켰고, 나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취미는 여러 모로 유익했다. 일단 혼자 할 수 있으니 소심한 내가 남과 부대껴 상처를 입을 필요가 없고,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으니 심심해서 몸부림칠 필요가 없으며, 취미 란에 독서라고 써넣을 때는 제법 내가 고상하고 박식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우쭐했고, 무엇보다 부모님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취미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다.

 

  열 살이 되던 생일날 아버지가 낡은 혼다 오토바이 짐칸에 꽁꽁 묶어온 금성출판사 간 30권짜리 <세계소년소녀명작전집>은 지금도 내 책장의 맨 위 칸을 차지하고 있다. <천로역정>부터 <아Q정전>까지, 북유럽신화로부터 일본민담까지 고루 담긴 그 전집은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받아본 선물 중에 가장 감격스럽고 흡족한 것이었다. 책을 처음 받던 날 그 벨 듯 빳빳한 책장을 넘기며 황홀해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새롭게 만난 그 친구들과 빨리 친해지고픈 마음에 몇 밤을 꼬박 새우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때 책을 쓰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리라는 운명의 전조가 살짝 비쳤을까? 새삼스런 의미를 부여하든 말든 상관없이, 내 고단한 생을 염려하는 부모님은 그때 책에 홀딱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고도 마냥 기뻐하며 방치했던 걸 이제와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체계적인 독서 생활을 하는 편은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관련 도서를 탐독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 문자 중독에 가깝게 잡다한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본다. ‘양서를 선정해 수준에 맞게 단계적으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여성지고 만화책이고 잡지고 성인소설이고 할 것 없이 눈에 띄는 대로 남독을 했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고 친구마다 관계의 빛깔이 조금씩 다르듯, 나는 진지하고 격조를 갖춘 친구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럽거나 잡다하거나 외설스러운 친구까지도 있는 그대로 좋아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이 내 곁에 머물러 있어준다는 것만으로.

 

  이제 책은 아주 오래되어 이물감조차 느낄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그를 만나는 데는 특별한 약속도 의미 부여도 필요 없다. 그러나 나 역시 인터넷이라는 감각적이고 변화무쌍한 매체를 접하면서 옛 친구에게 얼마간 소홀해진 점이 없지 않다. 책이 단순히 정보를 얻고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진즉에 책과 나의 우정은 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루하면 지루한대로,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이해하기 어려워 대화하는 도중에 솔솔 잠이 오면 오는 대로, 이 오래 묵은 친구를 사랑한다. 그를 통해 외로움을 견뎌온 것처럼, 그를 통해 깊어지고 넓어지리라 기대하기에.

 

  우정은 숲길과 같다고 한다. 숲길은 자주 오가지 않으면 어느새 풀로 무성히 덮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에, 부지런히 오가며 시시때때로 확인해 주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지혜롭고 다정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내 작은 다락방으로 가만히 숨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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