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겐 네가 있잖아
도나 드놈 지음, 최경은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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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3년 넘게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가장 힘든 시기에 그 사람과 만나기 시작했던 터라, 알게 모르게 그 사람에게 많이 의지하고 기대고 힘들 땐 항상 그 사람을 찾았다. 헤어진 건 얼마 전이지만, 사실 사이가 틀어진 건 이미 일년 전 쯤 이었다. 그 일년 전 어느 날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느 한쪽만 너무 많이 기대면, 그 관계는 무너지기 쉽상이라고. 그래서 우린 무너져버린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그 사람이 없을 때도 나에게 힘든 일들이 있었고, 그럴때 그 사람 없이도 그 힘든 일들을 헤쳐온 나인데, 그 사람과 만나면서 그 사람에게 기대기 시작한 뒤로는 힘들때 그 사람 없이는 도무지 그 힘듦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다. 그때마다 그가 항상 날 위로함으로써 그 힘듦에서 벗어났다. 나에겐 그래도 그가 있다는 생각이 큰 힘이 되었다. 왜 그때, 나에겐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에겐 언제나 내가 있는데,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지지 못하는 너무나 크고 가까운 존재인 '나'가 말이다.

 

  사실 이 책은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너에겐 네가 있잖아'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나에겐 언제나 가장 소중한 내가 있는데, 왜 힘들때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위안을 얻었을까. 순간 머리를 한대 얻어맞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표지에 있는 거북이 삽화가 마음에 들었다. 거북이가 자기자신을 양손으로 껴안고 있는 그림인데, 이 그림을 보고 난 내 자신을 저렇게 껴안고 보듬고 위로했던 적이 있는가 돌이켜보게 되었다. 항상 내 자신의 장점보단 단점을 더 많이 생각했고, 그걸 고치려고 애쓰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단점을 개선하면 더 좋겠지만, 그런 단점이 정말 단점인지 모르게 됐다고 할까? 내가 정말 안좋다고 생각해서 고치려고 하는건지, 아니면 남이 봤을때, 남의 기준에서 생각해서 남들이 보고 싫어하고 실망할까봐 그걸 고치려하는건지...곰곰히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전자보단 후자임이 분명해졌다. 내 삶인데 왜 남의 기준에 맞추려고 발버둥치며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건지, 이 책이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책 중간중간에 좋은구절이 삽입되어 있어서 참 좋았다. 특히

 

온전히 깨어있는 삶을 살라!

 

한계를 극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나는 힘과 능력이 있다. 나는 성공한다.

나의 모든 것은 완벽하다. 온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

 

나의 몸은 에너지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빛이다.

 나는 쾌활하다.꾸미지 않은 행복이 내 몸 전체를 흐른다. 누릴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나는 모두 이룰 수 있다.

나는 강하고, 매력이 넘치고, 부유하고, 풍요로움을 타고 나다. 나는 지금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한다. 오늘 나는 삶을 새로이 시작한다. 기쁨과 사랑이 마치 연못에서 샘솟는 것처럼 나에게서 흘러넘친다.

사랑은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나의 마음속에 있다. 사랑은 어떤 사람을 마주치더라도 나의 마음속에 있다.

나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감동시킨다. 나는 지금 이를 깨닫고 있다.

 

나는 꾸준하다. 나는 끈기가 있다. 성공하고자 하는 의지는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장애물이 있으면 오히려 배움의 기회로 삼는다. 나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그 기회는 성공을 향한 나의 길에 놓여있다.

 

나는 자신감이 넘친다. 우주의 힘은 나를 통해 드러난다.

나의 행동은 단호하다. 나는 인생의 긍정적인 힘을 믿는다.

작자미상           -p.105~107

 

이 구절은 하루를 시작하기 전 큰 소리로 소리내어 읽는 것만으로 그 전과는 뭔가가 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큰 소리로 이 구절을 따라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탓인지, 실망도 컸다. 내가 제일 실망한 점은 다른 자기계발서와 다를 점이 없는, 진부한 내용이었다. '너에겐 네가 있잖아'라는 참신한 제목과는 다르게 그 내용은 전혀 참신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실 읽는 내내 지루하기도 했다. 어디선가 본 문장들로 이루어진 어디선가 본 내용이었다. 제목과 같은 참신한 내용을 기대했던 터라 더 실망이 컸다. 하지만 약간 작은 사이즈와, 두껍지 않은 두께라서 보기에도 귀엽고 들고다니기에도 편리해 가볍게 읽기는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제목과 같은 참신성은 기대하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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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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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자에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묻는 이런 질문은 소용없단다.
시간이 지나면 형편없이 낯설어져 있거든.
나를 바라봤던 사람은 다른 곳을 보고, 나를 보지 않던 사람은 나를 보지. 서로 등만 보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야.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는 관계 속의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 묻는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     -p.578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있다. 여자의 이름은 은서이고 남자의 이름은 완과 세이다. 셋은 지금은 떠나온 고향에서부터의 소꿉친구이다. 세가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셋은 언제나 함께였다. 완은 세보다 은서에게 잘해주려 했고, 세보다 은서와 가까이 닿으려 했다. 그런 완을, 은서는 어느샌가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자 완은 은서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 나날들을 세는 은서 뒤에서 은서가 완을 보는것과 똑같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완의 결혼을 알고부터 은서는 방황했다. 하지만 그 옆을 지킨건 세가 아니라 화연이라는 이름의 이웃여자였다. 그녀는 은서보다 더 깊은 상처를 지녔고, 그랬기에 그 둘은 서로를 보듬었다. 그런 화연마저 은서를 떠나가자 은서는 세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완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그 어느 날 완은 은서에게 돌아오려 했고, 세는 괴로워했고, 은서는 도망치려 했다. 은서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세를 사랑하고 있음을. 하지만 세는 은서를 시험했고 은서는 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때부터였다. 그들에게 혹은 그녀에게 불행의 그늘이 짙어진건. 아니 이미 그전부터, 셋이 함께였을때부터 불행이 시작된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 사랑스런 눈과 콧대를 따라 쓸어주고 싶은 코와, 입맞추고 싶은 입을 보지 못하고, 등을 바라봐야만 한다는게.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할 수 없거나,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거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사랑스러워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을지 고민도 하고, 한편으론 이런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이가 야속해진다. 그러면서도 이기적이게도 난,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을 외면하기도 한다. 그이는 나에게 친절하고 딱히 싫어 할 이유도 없건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럽기만 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난 그이를 외면한다. 나를 사랑해주지만 나는 결단코 그 사람을 사랑해 줄 수 없을 것만 같다.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들었던 모진 말을 그에게 고스란히 하기도 한다. 왜일까. 왜 여자와 남자는 이렇게 엇갈리고 엇갈리다가 아주 가끔 그것도 결코 길지 않은 기간 잠깐 마주보는 존재인 걸까. 시야에 서로만 가득차던 시절은 눈 깜짝할 새 아득한 엣날이 되고 점점 내 시야엔 그가 아닌 다른 것들로 채워지게 되는, 그 이유는 뭘까. 답을 찾으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일까. 원래...그냥..다...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 내가 부족하고 못난 탓일까. 나에게 그에게 혹은 우리 둘 모두에게 문제가 있었던 탓일까...

  그들이 안타까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웠다. 완이, 은서가, 세가. 모두가 안타까웠다. 언제나 제 곁에 은서가 있을거라 생각했던, 세 곁에 있어야만 은서를 갈망하는, 뒤늦게 다시 은서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외면당하는 완이 안타까웠다. 언제나 바보같이 완을 기다리기만 했던, 완을 잊으려 필사적이었던, 완이 돌아오려 하는 것에 당황했던, 너무나 뒤늦게 세에게 마음을 남김없이 내어주곤 그 사실을 깨달은, 다시 에전처럼 완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미 자신을 밀어버린 세를  기다리던,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닿으려 한 은서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언제나 완만을 바라보는 은서를 바라보는, 은서가 고스란히 완에게 하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던, 완에게 들었던 대로 하는 은서의 모진말과 행동을 견뎌내는, 완이 떠나간 뒤에도 은서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완이 돌아오자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은서를 의심했던, 끝끝내 은서를 마음속에서 밀어버린 세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들과 너무나도 소름끼치게 닮아있던 내가,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안타까웠으리라, 완과 은서와 세가 나와 닮아있어서. 나와 닮아 있기에, 그들이 안타까웠으리라. 만약 내가 그들과 닮아 있지 않았더라면 난 좀 더 편하게, 마치 강건너 불보듯, 이렇게 가슴아프지 않고 이 책을 무덤덤히 읽어나갔으리라.

  작가는 제목 바로 다음 장에 '사랑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이들에게 바친다'라고 써 놓았다. 이별한 지 얼마 안되는 나에게 써놓은 것만 같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이런 글을 적어 놓으신 거에요?' 하는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듯 하다. '대체 왜 이런 글을 적어 놓으신 거에요? 더 쓸쓸해지고 더 가슴아파하고, 더 후회하고, 더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러신 거에요?' 하지만 은서가 마지막으로 친동생 이수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p.580

 벌써 몇번째 보는 구절인데도, 지금 보니 다시 코끝이 찡해진다. 은서는 우연히 술취한 이수의 입에서 '정혜'라는 여자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고 혹여나 그도 그녀에게 닿으려고 애쓸까 걱정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바보같이 어리석게 아파하기만 하며 젊은 날을 보낸 자기자신에게 하는 독백일까. 우리가 사랑때문에 아파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이에게 닿으려고 하기 때문인 걸까. 나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지 않았기 때문인 걸까. 떠나려는 그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마 영원히 그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없겠지만, 저 구절이 애틋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해답과 아주 조금이라도 닮아있기 때문일거란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이 책은 후유증이 크다. 잠을 청하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뜰때, 마치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듯이 완과 은서와 세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떠올릴 때처럼 설레이고 기분좋은 두근거림이 아니라, 쓸쓸하고 안타까운 가슴아림 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가슴아림이 차차 수그러들때 즈음, 가슴아림이 아닌, 너 이외의 다른것에 닿지 말고 오로지 너에게 가라고 하는 은서를 들으며 잠들고 눈뜨게 될 것이다. 나와 같이 사랑했으니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이들에게, 이 책이 쓴 약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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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1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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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책을 사서 읽기보단 도서관에서 빌려있는 편이다. 책을 사는데 돈을 아낀다는 것은 이렇게 떳떳하게 말할 일이 못된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도 이유가 되겠지만, 책장에 꼽혀진 책을 읽지 않는 점도 크다. 이상한 성격 탓인지, 집에 있는 책장에 꼽혀있는 책은 언제든 맘만 먹으면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읽지 않게 되더라. 하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2주뒤엔 반납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꼬박꼬박 그 기간 안에 맞춰 읽게 되더라는 것이다.

  도서관이 집에서 5분거리라는 이점도 있어, 난 도서관을 애용한다. 그러면서 얻게 된 테크닉이랄까? 도서관이 문 닫을 시간 즈음에 도서관에 가면, 사람들이 반납한 책을 아직 제자리에 꽂지않고 바퀴달린 작은 책장에 놓아둔다. 아마 사람들이 도서관이 문닫을 즈음해서 제자리에 꽂는 거겠지. 그런데 바로 여기에 빌리기 힘든 책이 대부분 있는 것이다. 빌리려고 보면 항상 대출중인 책들, 그런 책들 말이다. 엊그제도 그렇게 해서 이책을 빌렸다 - '배려, 마음을 움직이는 힘(한상복)' 

  어제 자기전에 조금만 읽고 자야지, 하고 이 책을 폈다. 몇장을 읽고보니, 스펜서 존스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나 '선물' 같은 자기개발 우화라는 걸 알았다. '배려'라... 솔직히 어떤 내용일지 뻔하게 추측이 가능했다. 하지만 왜일까, 조금만 읽고 덮으려던게 새벽 2시 30분에 완독을 한 다음에야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배려'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려고 마음을 씀' 이다. 즉, 내가 아닌 다른사람을 위해 마을을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일이던가. 내가 배불러야 다른 사람 배고픈게 보이는 법이라면서 나 돌볼 여유도 없다는게 흔한 핑계거리였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배려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나를 위해 좀더 솔직해지고, 우리를 위해 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모두를 위해 통찰력을 가지라는 것이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마음을 쓰면 되는 아주 저비용 고효율의 행위인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눈치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난 눈치 없다는게 그다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스스로가 그런걸 알면서도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눈치가 없는 건 남에 대한 배려가 없기때문이라는 걸 들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땐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생활 -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 처음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점차 그 말을 이해하게 됬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왔는지, 남에 대한 배려없이 살아왔는지.... 나에게 생기는 작은 피해를 피하려고 남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면서 살아왔는지...하지만 깨닫고 나서도 한번에 180도 나를 고칠순 없었다. 내가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리면 딴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지금도 조금씩 조금씩 배려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고쳐나가곤 있는데,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개인주의'라는 말로 보호막을 치고서는, 남에 대한 배려 없이 살아 왔다는게 느껴졌다.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개인주의는 그렇지 않은것이라고. 하지만 책에서 나오는 한 예로 정문앞에 차를 대는 것을 들수 있다. 언뜻보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잘 생각해보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이제까지 내 스스로 남에게 피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게 얼마나 많을까. 굳이 피해- 즉,- (마이너스) - 를 안줬다 해도, 내가 조금만 더 배려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도움 - 즉, +(플러스) - 가 됐다면, 나혼자가 아닌 전체적으로 생각했을때 배려를 하는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배려'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니다. 어려워서 여려번 읽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대목이 없다. 누구나가 다 알고 있고, 또 학교에서 도덕, 윤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친숙한 말들이 많이 나온다. 몇몇 문장은 마음에 와닿아 다이어리나 수첩에 배껴 적어본 문장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책에서도 말하듯이, 안다는 건과 깨달은 것은 다르다. 깨닫는다는 말에는 생활속에서 실천해나가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소중한걸, 값진 걸 알고있으면서도 안다는것에 그친 내자신이 후회됐다. '배려'이전에도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선물', '연어'와 같은 우화들을 읽었었다. 쉽고 재밌으면서도 깨달음을 주는 책들이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마지막 책장을 닫는순간 날아가버렸다.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머리속에만 담아놓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음으로써, 소중하고 값진 것들을 썩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실천해나가자.  

  우선, 이 책에 누군가가 밑줄 그어놓은 것부터 지우려고 한다. 이렇게 '배려'를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면서도 남에 대한 배려 없이 공공을 위한, 모든 사람이 함께 보는 책에 아무 생각 없이 밑줄을 그으면서 읽은 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뭐, 언젠가 그사람도 밑줄 그으려다 살며시 펜을 놓는 날이 오겠지. 다음 사람을 위해서, 조금만 시간을 들여서 밑줄을 지워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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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문자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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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건 일본드라마 '백야행'을 통해서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인간의 이기적인 내면을, 아름답고도 슬프게 그려낸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 드라마의 스토리 자체에도 매우 감명받았기 때문에 그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은 내 머리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그 이후로도 신문의 북섹션이나 여러 리뷰에서 그의 이름을 종종 접하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보게 된게 이 '11문자 살인사건' 이다. 그의 작품중에선 유명한 작품도 아니고, 다른 작품들에 평도 좋지 않다. 음 나에겐 그냥 'so so, 나쁘지 않다' 라는 정도일까? 백야행을 통해 그에 대한 내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도중 문득 ' 백야행의 연출진이나 감독의 테크닉이 뛰어났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추리소설을 읽은게, 초등학교때 셜록홈즈를 읽은 뒤로 처음이다. 추리, 스릴러를 좋아하지만 드라마나 만화, 영화를 통해 접한게 대부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책으로는 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게 됐지만, 처음부터 내가 생각한 그사람이 결국 범인이었기 때문인지, 긴장감이랄까 그런게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생각할 거리가 제공되었기 때문일까. 

   이 소설의 핵심은 '가치관의 차이' 이다. 이것이 결국 사건을 일으키고, 그 사건을 복수하려는 한사람으로 인해 또다른 사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싶은 시즈코.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까 무서워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일행들.
  시즈코의 몸을 갖기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시즈코의 연인을 구하는 다케모토.  
  다케모토의 가치관을 이해해주는 다케모토의 연인 후유코. 

  다케모토의 가치관 - 갖고싶은 것(본능적인것)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도 있다.
  나머지 사람들 -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남을 구할 순 없다.
                         여자의 몸을 바라고 한 것이라면 목숨을 건 용기도 결코 옳지 않다. 

    가치관이라는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게다가 옳다 그르다 활실하게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참 다루기 애매한 문제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심판자 역할을 해버린 후유코 자신조차도 나머지 사람들과 똑같은 우를 범하고 말았다. 나머지사람들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인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후유코가 '그들이 저지른 짓은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확언하는 것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결국 자신의 가치관만을 앞세워버리고 만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개성이 중시되고 그만큼, 구성원의 가치관이 저마다 제각각 인 사회에서 가치관의 충돌은 언제든지 생겨날수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살인이 일어나서야 그게 사람사는 사회이겠는가.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해야한다는 당연한 말이 지켜져야 세상이 둥글둥글 모나지 않고 잘 돌아가겠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사람을 구하지 못한것은 잘못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가치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고 비판받을 것이 무서워 저지른 살인(야마모리)이나, 진실을 은폐한 것(나머지 일행)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가치관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져보면 끝도 없겠지.  

  아무튼,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뒤에 또다른 반전. 야마모리는 다케모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자신과 같은 치부를 가진 다른 일행들을 선동한 것이다. 그 치부란 자신의 알량한 목숨을 지키려고 죽어가는 한 사람을 모른척 했다는 것. 결국, 다른 사람들은 이런 야마모리에게 이용당한 것이고,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야마모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후유코가 이 사실을 모르고 죽었다는게 안타깝기도 하다.  

  야마모리는 데릴사위로서, 처가의 성씨로 성을 바꾸고(일본은 결혼하면 부부의 성이 바뀌는데, 아내의 성씨, 남편의 성씨중 하나로 통일해서 바꾼다.) 말단 직원에서 부터 시작해 야마모리스포츠플라자라는 한빌딩 전체를 아우르는 스포츠기업의 사장으로까지 성공하는데, 이런 성공뒤에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이기적인 계략이 뒷받침 되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깨끗하게 선하게 성공하기가 그렇게 힘든걸까???

  한편으로는 이 책이 1987년작이라는게 놀랍기도 하다.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은 하나도 못느꼈으니 말이다. 내가 태어난게 1988년이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어진 작품이라는 얘기다. 작가의 뛰어난 실력탓이기도 하겠지만, 1980년대에 이미 일본에는 편의점이 있었던 것처럼,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그 당시 더 선진화되있기 때문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차이가 많이 안난다고 생각한다) 어렸을적에 일본에 갔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아직 어려서 잘 몰랐음에도 확실히 선진화되있다고 느꼈었다. 

 아무튼, 책의 내용자체에는 좀 실망했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생각할거리를 제공받아서 즐거운 책읽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책 제목은 잘못지은것 같다.
 

내가 그들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내게서 소중한 걸 빼앗아갔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일방적인 가치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들이 어떤 수치심도 못 느끼고 있다는 데 격렬한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중략- 말도 안된다. 그들이 저지른 짓은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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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유명한 히가시노게이고의 작품들 중에서도 '수작'이라 일컬어지는 '용의자 X의 헌신'. 이 책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했다고 하니 기대가 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뒤따르는 법이 많아 내심 걱정도 했지만, 실망은 커녕 내 뒷통수를 치는 반전과 그 애달픔에 울어버렸다. 

  이 책은 다른 추리소설과는 달리 살인자, 살해동기, 살해과정, 또 그 살인자의 협력자를 낱낱이 드러낸다. 이런 모든 요소들을 다 알고 있음에도 독자들이 뒷내용이 궁금해지는건 히가시노게이고만의 필력인 것 같다. 이건 '붉은손가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살해동기, 수법 이런 것 보다도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변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 결국 후반부에가서는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눈물을 보이게 만드는 감동과 안타까움, 긴 여운을 남겨, 그의 다른 작품까지 찾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초반부에서 이미 용의자 X의 헌신이 나타난다. 하지만 겨우 이것에 '헌신'이란 숭고하면서도 무겁게 다가오는 단어를 붙였을까...하는 생각에 나름대로 결말을 추측해 보았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의 진짜 헌신이 드러나게 됐고, 난 그때 이 작가가 내 뒷통수를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하는... 용의자 X의 헌신은 희생적이면서도 극단적이었다.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말그대로의 '희생' 이었다. 

  어떻게해서 이런 희생이 그에게 가능한 것일까. 그는 야스코를 사랑했다. 단순한 사랑이 아닌것 같다. 그가 이 세상에 미련 한점 없이 죽음을 택했을 때 ,불현듯 마치 구원해주듯 나타난 모녀는 그의 '삶의 이유'가 됐다. 모녀가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 목숨, 그녀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헌신'한 것이다. '헌신'.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바칠'헌'에 몸'신'. 말그대로 몸을 다 받쳐 희생한 것이다. 자기의 전부를 희생한 그는, 혹시나 자기 자신이 약해질까봐 스스로 빼도박도 못하는 트릭을 구사하기까지 했다. 

   극 중반에 그의 유일한 학문적 맞수 '유가와 마나부'가 야스코에게 야마가시는 순수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천재적인 수학자 야마가시는 수학을 풀이하고 논리적인 트릭을 쓰는데 있어서는 천재일지 모르지만, 사람을 대하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는 서툰 그저 '순수한' 남자일 뿐이었다. 어쩌면 야스코에게 그를 배신해선 안된다고 말하는 '미사토'를 보며 미사토가 오히려 야스코보다 야마가시를 알아주었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수학'이외의 것에 있어서는 그가 미사토와 같이 순수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편으로는 이 책의 결말이 아쉬웠다. 다른 책과는 다르게 제발 진법이 밝혀지지 않길... 그냥 이들의 죄를 묻지말길....하고 끝까지 바랬건만 결국 그들의 트릭은 낱낱이 밝혀지고, 진법조차 죄책감에 자수하게 된다. 진법을 지켜주고 싶던 야마가시는 고통스러움에 절규한다. 그가 그런 고통에 절규하며 울부짖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야마가시'라는 캐릭터는 공감이 갈만큼 충분히 불쌍하고 순수하고, 서툴고, 단순한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 비록 한사람을 죽였지만, 마음이 침울해져서 생각하기도 싫다는 것은 그도 그러고 싶지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결말로 인해 아쉽긴 하지만 이런 결말이 내 마음속에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이로 인해 더더욱 오래 이 책이 내 가슴속에 남을 것 같다.
 

 P.S 이 책이 나에게 더 인상 깊었던 이유는 지난해에 끝난 일본드라마 '갈릴레오'와 겹치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의 원작이 바로 이 '용의자X의 헌신'과 히가시노게이고의 다른 작 '탐정 갈릴레오'이기 때문이다 . 이 두 작품에는 모두 '유가와 마나부'가 등장하는데 드라마에서도 그가 바로 주인공이다. 책을 읽는 내내 드라마에서 '유가와 마나부'역을 한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드라마의 주제가와 함께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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