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의미를 잊은 당신에게
모로토미 요시히코 지음, 신찬 옮김 / 올댓북스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일을 하기 싫다, 고 생각을 한 적은 있어도 일을 완벽하게 쉬고 싶다, 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내게 일이라는 것은, 본래 게으른 나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세상의 시계에 맞춰 살게 해주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내가 일을 하고 싶은, 또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지만 현재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몇 개월째 무직 상태이다. 일을 하지 않음의 상태를, 나는 견딜 수 없어서 사사로운 일거리를 모색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속되지 못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매 순간 들었기 때문에 (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출근을 해서 퇴근을 하는 그 시간 동안에 정을 둘 수 있는 아늑함이 없었다. 그 헛헛한 마음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분하게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사사로운 일거리도 잠시 버려둔 상태며, 이 기간을 “잠시 여름방학이야.” 라는 생각으로 쉬려고 하지만, 그 마음은 너무나도 쉽게 달아나버리고 만다. 일을 하지 않음과 동시에 삶의 안정성을 잃어버린 기분. 이걸 무엇에 빗대어야 할까. 나의 배우자는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왜 제대로 쉬지를 못하냐면서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나의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내가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언제부터 일을 할 예정이니 그때까지는 마음놓고 쉬어야지. 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일하는 의미를 잊은 당신에게」라는 제목을 보곤, 현재의 내가 일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으니, 이 책을 읽으면 그게 극대화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내게 직장이 주어졌을 때, 나는 더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 하여 이 책을 기대에 부푼 감정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아뿔싸! 내가 생각했던 그런 책이 아니었다. 이 책의 서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빅터 프랭클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주장을 기초로 한 책임을 밝힌다. 이것이 이 책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에는 총 48개의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답변이라는 것은, 빅터 프랭클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나 프랭크의 글을 인용한 것이 더 많았다. 그렇기에 이 책에 가장 많은 문장은 단연, 프랭클은 ~라고 말합니다. 이었고, 내 시선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급기야 무엇이 저자 모로토미 요시히코의 말이고 무엇이 프랭클의 말인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프랭클 요약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반가운 것은, 아직 읽지 않은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정도.



예전에는 자기 계발서를 죽어라 읽지 않았다. 그것은 한낱 책 따위가 나를 변화시킬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서 기초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틀린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내가 (감정이) -할 때 찾는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부터였다. 그렇기에 한낱 책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조금 더 열린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으면, 혹은 아무런 생각 없이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언젠가는 나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에세이와 자기계발, 인문서에도 조금씩 손을 뻗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 책을 읽는 그 당시에는 위로를 받기도 하고 흥미를 갖기도 하며 의지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개의 질문과 답변을 읽으면서 날이 서버렸고, 그 상태를 유지한채로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 참 쉽다. 라는 생각을 했다. 말은 쉬워, 실천이 어렵지.



책에 자주 쓰여있는 것 중 하나는, 일의 가치는 업무의 크기와 관계없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프랭클은 세계를 무대로 하는 일이든 작은 지역에 국한된 일이든 일의 가치는 그 활동 범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하는 일에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주어진 일에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게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프랭클이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다음 문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기 바랍니다. (중략)



하지만 내 입장은 좀 다르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모든 것에 불만을 품고 이직을 생각하는 것은 본인을 다시 돌아봐야 하겠지만,) 능력이 80인데 50의 능력을 발휘하라고 했을 때,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강제수용소 이야기를 하면서 어디에서든 일의 가치를 찾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강제수용소에서 (어쩔 수 없이) 의미를 찾아야 했던 프랭클과 달리, 현대인에게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걸까. 일의 가치가 업무의 크기와 관계가 없으니 일을 가치있게 생각하라는 프랭클의 말을 인용할 것이 아니라, 대표 혹은 상사와 타협 후 다른 부서로 간다든지 혹은 다른 업무를 배워본다든지 혹은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는 시도(업무에 관한 공부나 자기계발)를 하라는 편이 지금 세대에 맞는 현실적인 답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일의 가치는 업무의 크기와 관계없으니 내가 하고 있는 업무에 만족해라. 라는 문장은, 현재에 만족하라는 말 같았는데,


지금 회사 사정이 절망적이라 이직할 때까지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과연 옳을까요?

환경 탓만 하고 해야 할 일을 미루는 태도는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직장 생활에서 성공한 대다수는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어떻게든 가능성을 찾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성공의 기회는 그런 사람들의 몫입니다.


내가 발췌한 이 뒷부분의 문장들은 도대체 이 질문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난 잘 모르겠다. (내가 ... 이해도가 딸리나?)







이 책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것 중 하나.

어떻게 하면 ‘천직’을 만날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자기 바라보기는 그만둡시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나 사람, 미래에, 그리고 당신이 실현해야 할 일에 집중합시다. 라고 답변을 달아놓았다.

이 답변은, 프랭클의 <의미를 향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인데, 프랭클은 아무리 자기 자신을 살펴봐도 ‘천직’을 찾을 수 없다고 조언합니다. 라면서, 천직은 자기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기다리거나 필요로 하는 일, 또는 사람에게 눈을 돌릴 때 찾을 수 있다고. 자기 밖의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당신을 기다리는 ‘뭔가’가 반드시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일이라는 것은, 마음속으로 열 번, 백 번, 천 번 생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연한 기회에 찾아오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공감할 수 있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동생에게 나 무슨 일하지? 뭐 먹고살지? 뭐 할까? 하는 물음에, 우선 어떤 것이든 좋으니 그 어떤 것이라도 해보라고 조언해준 적 있었다. 그것이 비록 내 일, 내 길이 아니었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삶의 경험으로 축적되어 나를 좀 더 성장하게 만드는 계기다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그 뒷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인 동생이 그러한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나 역시 그때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라고  지나고 나서 생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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