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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의 시작이 참 어렵다.
블로그 이웃의 책 서평을 보면서, “이 책은 읽어야만 해.” 라고 생각했다. 난 요즘 아빠가 미웠다.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서평에 미주알고주알 쓸 수 없으니까 그냥 미웠다. 고 말하고 끊으려고 한다. 그리고, 난 아빠를 사랑한다. 아주 많이. 책을 읽어야하는 시기와 딱 맞아떨어진 순간이 있다면 감히 그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을 읽는 나는, 유폐했던 감정들에 대해 봇물처럼 쏟아지는 질타를 그대로 다 받았다. 나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수도 있었고, 그러지 않았다고 건방지게 말로서 내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그 짓을 한단 말인가. 선명우에게? 박범신에게? 그것도 아니면 내 아빠에게? 차라리 관두자. 그건 정말 미친 짓이다. 감히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받아야만 했고, 받아내야만 했다. 받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덮어버린다면 예의가 아니었다. 그 누구도 아니고, 내 아빠에게. 나는 똑같은 자식새끼였다. 빨대를 쪽쪽 빨아먹는 자식새끼. ㅡ 사월 끝 무렵. 밤에도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전기장판을 고온으로 끝까지 밀어붙였다. 요와 이불이 맞닿는 이불 속은 무척 뜨거웠는데, 어쩐 일인지 내 몸에는 오소소하게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_p44
그는 가출을 했다. 혹은 그는 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를 해야만 했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아버지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는 나의 이기적이고 포악스러우며 몰강스러운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수없이 댕그랑거렸다. 미상불 문장 하나하나에 울컥했고 울먹거렸다. 그에 따라 나는 무척이나 위태로웠고, 불안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렀을 땐, 내 아빠가 갑자기 집을 나가서 들어오시지 않는다면, 나는 아빠를 찾으러 과연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였다.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있나.
아빠, 내 아빠. 평생을 자식들 입에 각각의 맛을 알려주려 새로운 빨대들을 꽂아주기에 여념이 없었고, 자식은 그것이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인 것처럼 여전히 아빠의 그늘에 앉아 편히 쉬며 빨대만 쪽쪽 빨아대고 있었다. 흡사 찰거머리처럼. 그리고 아빠는 지금, 당신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 서평 쓰면서 문득 든 생각, 아빠가 보고 싶다. 전화해봐야지. 덧. 책은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봤는데, 책을 주문해서 그이에게도 꼭, 꼭꼭꼭 읽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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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과묵한 편이었으며,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법이 거의 없는 타입이었다. 그에 비해, 어머니는 수식도 화려할 뿐 아니라 자기표현에서 언제나 똑 부러졌다. 매사에 그녀들은 당연히 어머니의 견해를 따르는 데 익숙했다. 집안의 작고 큰 일에 대한 결정권은 물론, 경제권도 절대적으로 어머니에게 있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그녀들은 차츰 아버지에게는 무슨 일이든 상의하는 법도 없었고, 아버지 또한 불만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는 일도 어머니와 상의해 결정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_p35
아버지는 단연코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걸 느낄 리 만무했다. 행복한 사람도 아니었으나 또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긴 적도 없었다. 박장대소 큰 소리로 웃는 걸 보지 못했듯이 격하게 노여워하는 표정도, 특별히 슬픈 얼굴도 보지 못했다. 희로애락은 아버지의 몫이 아니라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늘 생각했다. 자기 아버지가 가정의 권력자라는 말을 혜리에게 들었을 때, 서현의 아버지가 개그 프로를 보다 배꼽을 잡고 경망스럽게 웃는 걸 보았을 때,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가 권력자라는 혜리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개그 프로를 보면서 경망스럽게 웃는 서현의 아버지를 보고서는 괜히 기분이 언짢았다. 무슨 아버지가 저래, 하고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사람이다, 라고 누가 말하면 웃음이 날 것 같았다. _p40-41
아버지는 그럼 건강했던가. 그런 질문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와 병원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왜냐고 누가 물으면 그녀들은 이구동성 대답했을 것이었다.
“아빠잖아!” _p47
“애비가 본래 그런 거라고! 몰랐어? 모든 애비들이 다들 그렇게 치사하게 산다는 거!” _p75
“소금이…… 어떤 맛이라고 생각하나?”
“소금은, 모든 맛을 다 갖고 있다네.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단것, 신것에 소금을 치면 더 달고 더 시어져. 뿐인가. 염도가 적당할 때 거둔 소금은 부드러운 짠맛이 나지만 32도가 넘으면 쓴맛이 강해. 세상의 모든 소금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맛이 달라. 소금에 포함된 미네랄이나 아미노산 같은 것이 만들어내는 조화야. 사람들은 단맛에서 일반적으로 위로와 사랑을 느겨. 가볍지. 그에 비해 신맛은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고, 짠맛은 뭐라고 할까, 옹골찬 균형이 떠올라.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쓴맛은 그럼 뭐냐. 쓴맛은, 어둠이라 할 수 있겠지. 내가 왜 이 겨울에 혼자 나와 소금밭을 까뒤집고 있다고 생각하나? (…) 젊은 사람이 이해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소금은, 인생의 맛일세!” _p135
뜻밖에, 담담했다. 당부 한 번 어긴 적이 없는 아내였고, ‘쑥아빠!’라고 놀리고 무시해도 고깝지 않은 세 딸이었으며, 20년 넘게 결근 한 번 한 일이 없는 회사였다. 사흘이라면 남들의 석달, 혹은 3년과 맞먹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그러나 그는 놀랍지 않았다. 놀랍기는커녕 사흘 전까지의 모든 기억이 다른 세상에서의 일처럼 아득하고 또 잔잔하게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꼽이 떨어지는 것처럼, 모든 게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심지어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는 흡, 하고 웃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밀려 나오는 그런 웃음이었다. _p149
그는 웃으려고 했다. 그런데 웃음 대신, 난데없이 트림이 올라왔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다. 트림이 트림을 타고 싱싱한 무청처럼 쑥쑥 올라와 허공으로 무한히 퍼져나갔다. 썩은 냄새가 자신에게 맡아졌을 정도였다. 수십 년간 쌓이고 쌓여온 부패한 것들이 조청처럼 엉겨 붙은 차진 트림이었다. 더부룩했던 뱃속이 상쾌하게 내려앉는 것 같고, 암종이 똬리를 튼 썩은 췌장까지 딸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어 허기가 갑자기 찾아왔다. 일찍이 느껴본 적이 없는 강력한 허기였다. _p152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치사한 굴욕’과 ‘쓴맛의 어둠’을 줄기차게 견뎌온 것이었다. _p207
“인생엔 두 개의 단맛이 있어. 하나의 단맛은 자본주의적 세게가 퍼뜨린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빨대로 빠는 소비의 단맛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자유를 얻어 몸과 영혼으로 느끼는 해방감의 단맛이야.” _p254
“나는 언제까지 일을 끝낸다, 그런 목표 따윈 세우지 않아. 그런 목표라면 옛날 회사 다니면서 지겹게 경험해봤네. 여름 전에 다 만들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나. 여름 전에 못 만들면 가을에 완성하지 뭐. 올여름만 여름인가. 내년 여름도 여름이지.” _p286
뙤약볕 아래에서 혼자 소금을 긁어모으고 있는 새카만 얼굴의 저 늙은 남자가 왜, 1979년 여름, 꼭 자신의 아버지여야 한단 말인가. 아니, 맑은 바닷바람과 뜨거운 햇빛과 무성한 숲에 둘러싸인 평화스럽기 그지없는 그곳이 왜 하필 자신의 나라 한반도의 남쪽 어디여야 한단 말인가. (…) 몰강스러운 햇빛을 견디면서 소금을 모으고 있는 늙은 남자는 어김없이 그의 아버지였고, 그곳은 들끓고 있는 자신의 조국 어느 변방의 작은 염전이었다. 그런저런 세계사의 변방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인식 못한 채, 늙어가는 그 남자에게 오직 ‘빨대’를 꽂고 생명을 유지해온 것이 바로 그와 그 자신의 형제들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빨대, 빨대였다. 그걸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그는 그래서 깨달았다. 자신의 졸업식에 오지말라고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다는 걸. 누구에게는 단지 하나의 의식일지 모르지만 아버지에게 그의 졸업식은 모든 인내의 끝이며 모든 희망의 집결체라는 걸.
안 돼!
그는 소리 없이 소리쳤다. _p314-315
가출 전의 그는 빨대 하나 들고 세상의 구조에 충직하게 복무했다. 만족은 오지 않았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 중심의 체제에 기생해 그 역시 빨대를 꽂고 죽어라 빨았으나, 넷이나 되는 처자식이 그의 몸뚱이에 빨대를 또한 꽂고 있었으므로 그가 빨아올리는 꿀은 늘 턱없이 모자랐다. 모자라면 더욱 몸이 달았다. 그 체제는 그에게 약간의 꿀을 제공하는 대신, 그를 계속 노예 상태로 두고 부려먹기 위해 그의 후방에 있는 처자식을 끊임없이 부추겨 그가 빨아 오는 꿀을 더 재빨리 소모시키도록 획책했다. (…) 특히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된 빨대는 늘 면죄부를 얻었다. 사람들은 핏줄, 핏줄이라고 말하면서 ‘핏줄’에서 감동받도록 교육되었다. 핏줄조차 이미 단맛의 빨대들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빨대로 둔갑했지만 핏줄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인 줄만 알았다. 빨대를 들고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다. 일차적인 표적은 아버지였다. 스물이 넘은 자식들조차 핏줄이므로 늙어가는 아비에게 빨대를 꽂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모두 그 체제가 만든 덫이었다. _p330-331
그 대신 자식들은 늙은 아버지를 돌볼 필요가 없었다. 여력도, 시간도 없다고, 그러니 늙은 아버지는 체제가 돌봐야한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노인 요양원을 더 많이 지어 자식들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주장을 복지라고들 불렀다. 철저히 불공정한 비윤리적 거래였으나 아버지들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 침묵하는 게 최선의 미덕으로 간주됐다. 늙은 아버지의 죄는 더 이상 생산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생산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늙은 아버지들은 ‘폐기품’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간편히 처리해야 이미 성장해 또 다른 자식들을 거느린 자식 출신의 젊은 아버지들을 체제가 마음 놓고 부려먹을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가리켜 역사 발전이라고 말했다. _p333-334
화장실에 앉은 그의 가슴이 무너진 것은 섭섭함 때문이 아니라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_p335
누군가와 불멸의 관계를 갖고 싶다면, 관계를 맺지 말게. 그 수밖에 없어. 사랑이 훼손되지 않으려면! _p352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번이라고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_p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