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방
김미월 지음 / 민음사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미월. 혹시 아름다운 달일까,하는 오지랖도 떨어가며 이름이 참 예쁘다 생각했던 작가. 책장의 어딘가에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일전에 읽어봐야지, 해놓고 단편 한편도 채 읽지 못하고 잠시 덮어두었던 책 속에 작가의 단편도 함께 있을 터인데, 읽고 있는 책을 책 속에 파묻혀 읽고 오고자 간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마주하는 순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책을 추천해주었던 걸 생각해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출해왔더랬다. 읽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에 대한 답을 자꾸만 도출해내려는 그것, 때문에.

 

 

 

 

 

그런데 있지, 넌 꿈이 뭐니?”

꿈이 없다는 이유로 여자 친구에게 걷어차인 스물다섯의 오영대. 그것은 CK청바지를 사려던 20만원으로 월세 10만원짜리 방을 구하는 것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독립을 한 것이다. 십팔,마리의 모기들이 짓눌려 죽은 채로 붙어있는 벽, 똥이 얼어서 물이 내려가지도 않는 화장실. 그곳이 이제 그가 지내야하는 방인 것이다. ‘잠만 자는 방그리고 그곳에는 마지막 장까지 손으로 쓴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노트 상자가 발견된다. 아마 그 방에 살았던 여자의 것이리라. 여덟 번째 방

 

 

 

 

 

스무 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시기를 채 겪지 않은 이들에게도, 그 시기를 지나 버린 이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환상을 갖게 하는 이름이다. p49

노트 여덟 번째 방에는 여자(김지영)가 거처했던 방들과 그 방에서 살 때의 (추억이라면 추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적혀있었다. 노트 속의 지영이나 노트 밖의 영대나 그리고 그들을 몰래 관찰하며 안쓰러운 청춘이네,라고 읊조리는 나도, 허공을 유영하는 실체 없는 대상을 매만져보겠다고 버둥거리지만, 실상은 그 손을 뻗는 것조차도 쉽지만은 않다. 무턱대고 뻗은 내 손에 잡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까닭이리라. 어찌하여 1980년이나, 1990년이나, 2000년이나, 2010년이나 모두 같을 수가 있지. 생각하며 숨이 턱 막혀온다.

 

 

 

 

 

아니, 그냥 말없이 먼저 안아 주기부터 해야겠다. 너는 참 평범하고 보잘것없지만 세상에 오로지 하나뿐인 존재라고. 그러므로 결코 평범하지도 않고 보잘것없지도 않다고. 너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며 내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p227

실은 지금 다니던 회사를 퇴직 후에 약간의 회의감을 안고 살고 있는 한 달이었는데, 타이밍 좋게도 참 좋은 책을 만났다. (물론 이것이 얼마 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내 꿈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부터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한결같다는 것에 놀랍다. 나는, 재미있게 살고 싶다. 세상의 모든 재미있는 일들을 내 옆에 있는 당신과 함께. 맛있는 반찬들을 골고루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내게 나이라는 건 항상 너무 많거나 너무 적었다.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것이 나이가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것이 나이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나이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삶이 해마다 잊지도 않고 내게 갈아입혀 주는 옷이 매번 팔이 짧거나 목이 좁아 입기 불편했던 것은 옷이 잘못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신체 비례가 불균형하기 때문이었다. p47

 

 

 

 

그 많은 방들에 나는 내 20대를 골고루 부려 놓았다. 나에게 방은 집에 부속된 공간이 아니라 온전한 집 자체였다. 부등식 <이 아니라 등식 =이 성립되는 곳이었다. 그 많은 방들을 거치며 이제 나는 서른이 되었다. 요즘도 가끔 지나온 길 위에 두고 온 나만의 방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곤 한다. 방들 속에 고여 있는 기쁨과 슬픔과 꿈과 절망과 환희와 분노는 하나같이 모서리가 닳아있었다. 말랑말랑해진 그 모서리들을 만져 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p49-50

 

 

 

절대 바뀔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 그런 것이 또 하나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변하게 되어 있는 걸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결국에는 모두 변하고 지나가고 잊히고 사라져 가게 마련인 것일까. p76p

 

 

 

바람이 불었다. 책으로 쌓아 올린 내 일상이, 아직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한 내 청춘의 페이지가 한 장씩 한 장씩 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손을 써 볼 겨를도 없이 빠르게. 그것이 아쉽고 억울해서 나는 장판에 짓눌린 뺨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p129

 

 

 

가끔은 그가 했던 말이 믿기지 않아서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겨 써 보기도 했다. 그러면 그것이 가진 실체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발화되는 순간 휘발되고 마는 음성 언어의 찰나를 박제화하는 것이 문자 언어라는 것을, 나는 그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체감했다. p164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야.” p218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특별해. 글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정리할 줄 알거든.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고나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나 되어서야 자신의 삶을 정리하지.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인지 아닌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죽음을 맞이한단 말이야.”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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