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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한 시간 삼십분 동안 그녀를 ‘다시’ 마주했다. 책을 덮고 나서야 갑작스레 온 몸에 오한이 일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처음보다 더 깊은 떨림을 안긴다. 나에게 그 떨림을 주는 이는, 봉순이 언니인가 아니면, 짱아를 가장한 공지영 작가인가. 그도 아니면 봉순이 언니를 바라보는 짱아일지도.
우선적으로 말할 것이 있다. 「봉순이 언니」 이 책은 참 뜻깊다. 끝내는 울어버리게 만들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아니었고, J군과 나를 조금 더 돈독하게 만들어주었던, 「도가니」도 아니었으며, 작가 스스로의 삶을 작가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핑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 보여 신물 나게 읽혔던 「즐거운 나의 집」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열아홉, 열여덟, 그도 아니면 열일곱. 그 삼 년 중 아릿한 어느 파편의 어떤 시간이었다. 청소년공부방이라는 곳에 비치되어있던 「봉순이 언니」를 읽었다. 한 번 읽고, 두 번을 읽었다. 그 당시 집에 읽을 책이 동화책 외에 「가시고기」밖에 없어서 그 책을 두 번, 세 번, 예닐곱 번 읽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책들도 있었는데, 정작 내 눈에 꽂힌 것은 양귀자의 「모순」과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뿐이었다. 나는 그 두 책을 매번 대출했고, 번갈아가며 읽었다. 세상에 그 책들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고 잊고 있었다. 내게는 읽을 책이 많이 생겼으니까. 그러다가 집 근처 도서관에서 이 책과 조우하는 순간, 정말, 숨을 못 쉬겠는 거다.
“엄마, 봉순이 언니는 우리 식구 아냐?”
“아니긴. 우리 식구지.” p41
식구였던, 아니 식구로 생각하려고 했던 봉순이 언니. 하지만 식구로 생각하려고 한다는 것이 식구가 아님을.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웃고, 같이 울어도, 식구가 될 수 없음을. 까지 쓰고, 이 책의 줄거리를 이제 와서 쓰면 뭣하나, 생각한다. 책의 어느 장을 펼쳐도 다음 이야기가 바로 이어질 만큼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그러하다면, 추억하면 그만이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읽던 그때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봉순이 언니가 등신 같다고 생각을 했었나, 세탁소 남자는 죽어버리라고 생각을 했었나, 짱아엄마가 너무하다고 생각을 했었나, 왜 그녀의 편에서 서주지 않았는지 원망을 했었나. 아니, 그 모두일 거다. 질겅질겅 씹어대 더 이상 씹히지 않는 마른 오징어 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어째서 고등학생이었을 나는 오래도록, 읽어댔을까. 독후감이라는 기록의 산물이 지금 내게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나는 공지영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앞서 얘기했듯, 본인 이야기를 미화시켜 핑계거리로 삼는 것도, 사회의 가운데에서 이야기를 쓰는 것도. 사실, 안 보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봉순이 언니는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미치도록, 싫으면서 놓을 수가 없다. 개정판으로 바뀌면서 작가의 말이 하나 추가가 되었는데, 봉순이 언니를 만났다고. 봉순이 언니는 안녕하던가요? ... 잘 살고 있었으면, 다행이지. 그런데 촌스럽게 이 안도감은 또 뭐란 말인가.
나는 알고 있었다. 언니는, 봉순이 언니는 오래오래 울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p50
나를 놀리기만 하는 언니와 오빠를 대신해서 이제 아버지가 나의 편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무너져버렸고, 내게 남은 것은 봉순이 언니뿐이었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그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놓아 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p51
언니가 없이 나는 처음으로 부당한 세상과 대면했다. p68
나도 한 번쯤 무리 속에 서서 나처럼 술래가 되는 아이를 곯려주고 싶었다. 저들이 끼워만 준다면 한 번만이라도 나를 술래를 면하게 해준다면, 절대로 잡히지 않고, 싱싱하게 술래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었다. 나처럼 가련한 술래가 된 아이가, 다른 아이들의 게임의 법칙을 위반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 거세게 항의를 한다 해도, 다른 아이들이 아니야, 넌 틀리고 우리가 맞아라고 하면 나도 그렇게, 다수의 편에 서서 우기고 싶었다. 그건 정당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건 힘이고, 그건 아주 달콤하고, 의기양양하고, 그리고 안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이제 봉순이 언니도 더는 나를 부르러 오지 않았다. p78
그때 깨알아야 했다.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갈래 중에서 끝내 내게 적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설마,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 했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그 희망의 독. 아무리 규칙을 지켜도 끝내 파울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악착스러운 진리를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그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다. 이런 경험을 그 이후에도 무수히 반복하면서도 나는 왜 인간이 끝내는 선할 것이고 규칙은 결국 공정함으로 귀결될 거라고 그토록 집요하게 믿고 있었을까. p81
아직도 봉순이 언니는 내가 서러울 때, 내가 따돌림당할 때, 내가 혼자 외로울 때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러면서 친구인 그녀는, 내 첫사람이었다. p88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사람들은 누구나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몰릴 지경만 아니라면,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조차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이미 생각해온 것, 혹은 이랬으면 하는 것만을 원한다는 것을. p140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토록 어색한 순간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p156
이제 언니가 돌아왔지만 나는 뭐랄까, 굵은 소금밭에 누워있는 것처럼 온몸이 쓰리고 불편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한 번 흐르고 나면 누구도 예전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예전으로 태연히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p164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매 순간 마주치게 되는 사소한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중요하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p196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