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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시절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박여명 옮김 / 박하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이란 우둔한 존재다. 희망하는 일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이제껏 현실에서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다 해도 말이다. p125
음경을 가진 그가 태어난 직후, 베개로 그의 얼굴을 짓눌렀던 어머니.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을 죽이려 했던 죄책감으로 그를 ‘사랑하는 아들’로 부르지만, 누이가 태어난 이후에 어머니에게 그는 더 이상 ‘사랑하는 아들’이 아닌 의무의 대상일 뿐임을 직감한 그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들 - 가령, 손톱을 물어뜯어 ⅓의 손톱이 없어진다던가, 코를 후빈다던가, 머리카락을 뜯는다던가, 배변행위를 거부하는 것들의 행위 - 은 “엄마, 보세요. 나 피가 나요.” 그 말은, “엄마, 보세요. 나는 엄마의 사랑을 원해요.”의 것과 다름없었지만, 파멸의 끝에서 돌아오면 또 다시 외면하는 어머니. 고위험 속에서만 어머니에 대한 권리를 느낄 수 있었던, 애처롭고 처량하며 가엾은 한 어린 짐승. 안드레아스 알트만.
그리고, 어느 순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프란츠 사버 알트만. 그렇게.
2차 대전의 나치친위대 대원이었던 아버지가 돌아온 알트만 하우스에는 암묵적으로 전쟁이 선포되었다. 첫 번째 희생양은 나약한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가 쫓겨나면서 안드레아스, 그의 유예기간도 끝난 것과 다름없게 되고, 그때부터 프란츠 사버 알트만의 ‘개’로 길러지게 된다. 아버지가 막내아들에게 주는 달콤한 취침 전 선물이라는 것은 네 번의 따귀 세례,가 전부였던 그의 유년시절,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에서 살아난 아버지에 의해 다시 한 번 선포된 알트만 하우스의 전쟁에서 으스러지고 짓밟힌 채로 나동그라져 파괴된 개의 새까만 심장이었음을. 그리고 열아홉의 나이가 되는 해, 그는 광분한 목소리로 아버지 아니, 개자식에게 소리치며 알트만 하우스에서의 독립을 선언하고는 그 길로 그곳을 빠져나간다. “만프레드, 놔둬! 그래 봤자 저 개새끼는 영원히 이해 못 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늙은이는 여전히 개자식이었고, 나는 여전히 패배자였다. p235
그는 거랏(쇠 목조르개)을 이용해 아버지를 처형하는 꿈을 꾸는 때를 제외하고는, 두 발로 걸어다니는 개,였고 말하는 개,였으며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개,였다. 그렇게, 그는, 참, 개 같은 시절,을 살아내었다. 안드레아스, 그의 실제 이야기라는 「개 같은 시절」의 이 책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문장이 아닌, 객관적인, 흡사 제 3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담담하다. 그래서 더욱 애끓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살갗에 남은 상처들을 어루어 만져주기에는 부족함을 고백한다. 실체로 존재되는 이야기인 까닭에 어떻게든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특히나 한 가정이 가장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기에.) 안드레아스 알트만은 아버지를 세계적으로 ‘개자식’으로 만들어놓았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또 그가 길러진 환경에서 어쩔 수 없다, 생각은 되지만 그는 책의 끄트머리, 그러니까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죽은 아버지를 인간적으로 그것도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난 J에게 분노 섞인 목소리로 “이 책을 왜 냈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을, 썼을까,보다는 왜 출간했을까,에 의구심을 갖게 되는 거다. 글을 씀으로써 자기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쓰다,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내다,로 끝내야했을까. 이미 아버지를 이해했다면서. 그게 글을 쓰면서든, 이미 다 쓰고 나서든. 참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더 솔직하게 말해볼까. 개자식에게 파괴된 유년시절을 치료받기 위해, 그 치료비를 이 책으로 보상받기 위한 글쓰기,로밖에 보이지 않다고 말한다면, 너무 모진 말일까. 또한 나는, 아버지 목소리만 들어도 오줌을 지리고, 배변까지 본다는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전제하에, 그 어머니가 이 책을 읽는다면- 그 후의 파장도 생각해봄직 하다. 그러기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지만. 그는 이 책을 냄으로써, 비참했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내보임과 동시에, 부모가 나란히 그들 자식의 유년시절을 파괴한 ‘개’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 책, 정말이지 (여러 의미로) ‘개’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