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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 밑줄 긋는 여자의 토닥토닥 에세이
성수선 지음 / 알투스 / 2012년 11월
평점 :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를 공허감에 마음이 허공에 유영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연례행사이기라도 한 듯, 유독 십이월은 나에게
그런 달이다. 고등학생 때는 얼른 스무 살이 되었으면 좋겠다, 했지만 스무 살하고도 다섯 해가 지난 지금, 나는 그 때 했던 생각들만큼
행복하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은 한 해가 저물어 십이월이 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지나친 날들을 후회하느라 마음이 바빠진다. 올해가 가기
전에 뭐라도 해야하는데, 하면서. 재작년 이맘 때 즈음에 성수선 작가의 「밑줄 긋는 여자」를 만났었고, 올해 같은 시기에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를 품에 안았다. 혼자,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인상은 쓸쓸, 처량, 고요, 적요, 고독 등의 단어뿐이다. 함께인 줄 알았는데 혼자였고,
혼자인 줄 알았는데 함께였다는 그런 괴상한 논리에 긍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이 현 내 마음 상태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혼자,이고 싶을
때도 많지만 사소한 일까지 시시콜콜 공유할 수 있게끔 되어있는 생활 속에서 오롯하게 혼자,라는 것은 어쩌면, 막연히 좇는 환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알싸함에 코 끝이 시렵다.
마법의 질문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나 연극을 좀 해볼까 봐. 뭐 구청에서 하는 연극학교가 있는데 가볼까 봐, 라든가 이탈리아 가곡을 배울까 봐 그러면, 어 그래? 연극?
그거 해서 뭐 하려고 그래? 마법의 질문이에요. 해서 뭐 하려고 그래?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예술이라는 것은 뭘 해서 뭘 하려는 게
아니죠. 예술은 최종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고 우리가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거예요. 술과 약물의 도움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자기표현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런 실용주의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담대하게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
그냥 즐거워서 하는 거야, 재밌어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 내가 좀 먼저 할게, 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p124 :: 김영하의 강연 中) 사실 직장을 다니고부터는 재미있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러던 중 올해 오월에 스포츠댄스와
벨리댄스를 겸해서 배웠던 적이 있었는데, 몇몇 친구들은 그런거 왜 배워? 살 빼려고? 차라리 다른 거 하는 게 나을껄? 이라고 얘기했고, 나
역시도 처음 목적은 그것이었지만 재미에 푹 빠져서 퇴근하고 배우러 가는 발걸음 또한 가벼웠었다. (나는 꽤 심각한 몸치였지만!) 하지만 그때마다
내 대답은 “어쨌든 끊어놨으니까.”라며 얼렁뚱땅 넘기기도 했었다. 그래서 성수선 그녀가 ‘서구 정치사상 고전 읽기’라는 강좌를 들으면서 타인에게
얼렁뚱땅 넘겼다는 대목에서 허허 웃어버렸다. 그때의 내 모습과 같아서. 자아를
확장하고 타인과 교감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연애를 하는 게 아니듯이, 좋아하는 일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일단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모든
일에 목적이 있고 수량화된 목표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p124) 그리고 난 그동안 미뤄왔던 헬스를 그 다음 주에 당장
등록했다. 이번 역시 목표는 건강해지기,이지만 퇴근 후에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어서. 그리고 나는 요즘, 전보다는
약간의 피곤함이 있지만 매일매일 신나는 퇴근길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미안해요, 나만 신나서.
안나 가발다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를 소개해주는 글 중, 마틸다의 리스트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급작스레 울컥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와의 미래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것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없다. 개월 혹은 년 단위로 소액의 적금을 들어 여행가기, 작은 어항에 물고기 키우기 (이건 그가
약간의 반대를 한다.), 매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도록 작은 트리사기,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회사 근처로 와서 저녁 먹기 등등.
하지만 마틸다의 리스트는 너무도, (정말이지 너무나도) 소소한 일들뿐이었으니 울컥한 것이 이상할 일이 아니다. 신문 읽기, 시장 보러 가기,
슈퍼마켓에 가기, 동시에 양치질하기, 당신이 땅콩을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 하기, 그리고 당신이 날 여전히 사랑하는지 물어보기.
연애란 게 이런 거다. 밀고 당기고, 고백도 주고받고, 더러 이벤트가 있기도
하지만, 연애도 결국은 일상이다. 생활인으로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 서로의 일상을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 서로의 일상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그래서 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일상이 되는 것. (p82) 일상이 된,다고. 그렇지. 일상이지. 굿모닝, 아침은 먹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을 건지, 추운데
옷은 잘 입고 갔는지, 길이 미끄럽던데 삐끗한 곳은 없는지, 오늘 일은 많이 바쁜지, 퇴근 후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지, 버스에서 앉아서 가는지,
서서 가는지, 서서 간다면 다리가 아프진 않은지, 피곤하진 않은지, 몇 시에 잘 예정인지, 발은 씻었는지, 전기장판은 따뜻한지, 그리고 굿나잇.
늘 똑같은 일상 속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그것이 서로의 일상이 되는 것. 맞다, 연애.
밤이
오고 계절이 바뀌듯이, 그렇게 슬럼프도 오는 게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닐까? 내가 무슨 로봇도 아닌데, 일정한 작업속도와 생산성이 일관되게
유지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닐까? 감기에 걸리면 며칠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어야 되는 것처럼, 슬럼프가 오면 팔를 잡듯 때려잡는 대신
그냥 좀 쉬어줘야 되는 것 아닐까? 오죽하면, 정말 오죽하면 슬럼프가 날 찾아왔겠어, 하고 보듬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냥 감기처럼 슬럼프를
편하게 받아들이면 안 될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는 사이클이 있으니까. (…) 핸드폰을 많이 쓰면 배터리가 금방 다는 게 당연한 것처럼,
앞뒤 안 보고 죽어라 달리면 사람도 금방 방전된다. 슬럼프는 ‘배터리가 10퍼센트 미만입니다’ 같은 경고 메시지 아닐까? 위험하니 충전하라는,
스스로를 좀 돌봐주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목에 ‘슬럼프’가 들어간 온갖 책을 읽으며 고민해봐도, 슬럼프를 극보가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건 바로, 그냥 슬럼프를 받아들이는 것. ‘슬럼프는 어쩔 수 없이 온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사람은 로봇이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것. 이러다 조만간 또 상승곡선을 타리라는 것을, 아니 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안달복달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쿨하게 말해주는 것.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 (p92-93) 내게도 슬럼프가 찾아오는 것처럼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때문에 무기력한 그의 행동과 말투에 화가 났다. 말할 타이밍이 맞지 않았을 뿐이고, 단어 선택이
잘못됐던 것 뿐인데, 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며 일방적으로 쏘아붙였다. 서평을 쓰려고 책을 뒤적거리다가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두 페이지를
찰칵, 찰칵 찍어댔다. 그리고 그에게 보내주었다. 성수선 그녀의 글들이 부디, 그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 그리고, 이것을 보내주는 내 마음도
함께 전달되기를.
전작인 「밑줄 긋는 여자」는 오롯하게
독서에세이였다면(혹은 독서일기), 이번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는 성수선, 자신의 일상 한 조각에 책 한 권이 차곡차곡 얹혀지는
기분이랄까? 전작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많지 않음에 아쉬웠다는 사실을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깨달았고, 작게나마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음에 전보다 좀 더 그녀를 알게 된 기분이랄까. (개인적으로, 어떤 책이든 작가를 알아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다못해 아는 사람이 쓴 것은 아무리 재미가 없는 글이어도 끝까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조금은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들려주는 일상이야기는, 뭐라도 더 해야겠다,며 바쁘기만 했던 내 마음에 휴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충,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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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랑받는 건 네가 너이기 때문이야. 뭐를 잘해서도, 좋은 회사를 다녀서도 아니야. 아무 일 안 하고 이렇게 잠만
자도 아무 상관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적어도 여기 있을 때만큼은.” (p20)
행복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행복을 느낄 줄
아는 것도, 그 느낌을 오래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인생을 관통하는 아주 핵심적이고 중요한 능력!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많이
가진 사람과 비교하면 박탈감이 느껴질 뿐이고,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자신의 결핍에 집중하면 자기연민에 빠질 뿐이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쓸
시간이 없다면 남 좋은 일만 시킬 뿐이고, 아무리 잘나도 행복하지 못하면 재미없는 소풍처럼 쓸쓸한 삶을 살다가 떠날 뿐이다. (p27)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이해받기를 원하지만,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p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