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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백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 그에게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플랫폼에 서서 미니북으로 되어있는 백영옥
작가의 「아주 보통의 연애」를 접한 적이 있었다. 몇 장 되지 않는 미니북이라서 읽을 생각도 안 하고 읽던 책이나 읽자, 했는데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아 잠깐 맛보기로 읽었던 것. 술술 읽던 중간 즈음에 ‘결국 나가 아닌 어떤 사람도 남일 수밖에 없다. 친밀한 타인과 그렇지 않은 타인이
있을 뿐인 것이다.’라는 문장에 시선이 한참 동안이나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의 작가가
백영옥 작가라는 것. 어! 이 작가? 역시나 그 작가가 맞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번 읽어볼까? 생각하고 책을 들었다. 겨우
지나가던 한 줄의 문구에 마음이 온통 빼앗겨서,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고집을 부린 게다.
아버지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하는 까닭에 윤사강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녀는,
최근 유부남인 기장 한정수와 연애를 하던 어느 날, 그가 이혼하겠다고 얘기한 순간 이별을 결심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끝으로 이혼을
강행했던 그녀의 부모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 십 여 년동안 연애 중인 이지훈과 정현정. 이미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까닭일까.
“난 가끔 우리가 사귄 지 십 년 가까이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내 청춘이 너란 사람으로 채워진 거잖아. 테트리스로 치면 난 정사각형만 잔뜩 들어가 있는 블록 같아. 어떤 사람들은 세로가 긴 직사각형,
가로가 긴 직사각형, 기역, 니은 모양의 도형처럼 다양한 블록들로 가득 차 있을 텐데.” 결국 그들은
이별을 받아들이게 된다.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실은 이것의 실질적인 목적은 실연당한 사람들이 새로운 짝을 찾길 원한다는 결혼정보회사
정미도의 계략이 숨어들어간 모임이었다. 실연을 빙자해
새벽까지 친구들을 붙잡아놓고 술을 퍼마시며 하소연하듯 우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밤새 먹은 음식을 토해내며 스스로의
배설물을 확인하는 자학적인 방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형편없는 스토커로 전락해 경찰
신세를 지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실연 때문에 여기저기 곪아 터진 상처가 전시된 갤러리에서 적당한 값을 치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상처를 쇼핑하는 것이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이 오전 일곱 시에 모여 함께 아침을 먹고,
치유를 해준다고 믿는 영화 네 편[500일의 섬머, 러브레터, 화양연화, 봄날은 간다]을 보고, 기념품 가게에 사랑했던 이와
나누었던 물건을 교환하는 것. 그곳에서 사강은 지훈이 내놓은 오래된 카메라를 집었고, 지훈은 사강이 내놓은 책,
<슬픔이여 안녕>을 집었다. 사강은 자신이 집은 카메라에 필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필름을 현상한다. 그곳에서 행복했던 그들의
시간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필름을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ㅡ 사강과
지훈,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며 그것을 치유한다.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오롯하게 말이다. [사강의 사랑에 대한 이별로 시작된 것이, 가족의 이별로 옮겨가는 것은 좀 쌩뚱맞지만.]
개인적으로 타인의 상처를 듣는 것은 호기가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몇 번이고 반복되는 지겨운 이야기를 들어야하는, 그럼에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하는데, 어떤 위로도 가 닿지 못한다는 것을 아니까.
“대학을 졸업하던 해, 집에 장미 꽃다발 하나가 왔어요. 별생각 없이
그 꽃을 거꾸로 매달아서 거실 벽에 붙여놨었는데, 꽃이 떠어지는 대신 꽃대까지 바싹 마르더군요. 향기없이, 미라처럼요.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먼지가 쌓이면서 더러워 보였어요. 과거엔 아름다웠지만 향기 없이 말라버린 꽃을 바라보는 일이나, 이미 끝난 사랑을 바라보는
일이 뭐가 다르죠?” 나는 언젠가 이별을 하는 날이 온다면, 고마워,로 끝낼 수 있는 사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든, 적어도 나의 한 시절을 함께 해준 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나는 사랑을 할 때마다 나보다 타인을 더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하고는 훗날 내가 받을 상처때문에라도 타인보다 나를 생각하게 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항상 그 끝에는 어쩔 수 없이, 미련의 여지가 남았다. 좀 더 -
할걸, -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등의 미련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이미 끝난 사랑에 그것은 가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져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모든 것들을 나 아닌 타인에게 내 상처를 얘기하며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 한들, 타인이 내 상처를 오롯이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 그것을
놓고 타인이 가타부타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혹여, 내 한 시절이 더럽혀질까,
쉬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사람이라서, 상처는 곪아 터질 때까지 두고
보는, 그래서 차라리 시든 꽃을 망연하게 바라보는 쪽이다. [어떤 감정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못하고,
여전히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을 것 같다.
아침이 밤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자정은 어떤 모습일까 - 에밀리
디킨슨
서로의 진심을 농담으로 흘려버릴 정도로 그들의 시간은 함께 마모됐다.
지훈은 시간이 오래된 가죽처럼 부드럽게 낡아가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가
터질 듯한 열정과 섹스로 가득 찬다면 인류의 절반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자살했거나, 미쳤을 것이다. 열정이나 욕망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감정이라는 걸 지훈은 알고 있었다.
이별은 앞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실연은 언제나 뒤로 온다. 실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을
일시에 집어 삼키는 블랙홀이고, 끊임없이 자신 쪽으로 뜨거운 모래를 끌어들여 폐허로 만드는 사막의 사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