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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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11] 내 생일에,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로서의 가치를 지녔었던 이것, 이 책을 먼저 접한 지인들의 평을 보면서 덩달아 높은 기대치를 지녔었던 기억이 난다. 급기야 모든 위시들을 뒤로 제껴두고, 장바구니에서 이것이 나에게 주는 내 생일선물,이라며 주문하기 클릭. 가장 먼저 읽어주리라, 깔깔거리며 책을 안은 기억이 이토록 생생한데, 꼭 일 년 만에 은교를 품었다. 아마 영화화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미뤄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참 나처럼 게으른 사람이 어디에 있나, 하고 생각하지만 지금이라도 좋은 작품을 만났으니 다행이지, 싶다. 사실, 책을 초반에 읽을 때에 읽기 거북함이 먼저 들었던 감이 먼저 들었다.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생각하다가, 영화를 보며 내용 전개에 있어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역겹다는 것. 맞다. 딱 그 느낌이었다. 특히나 시인 이적요가 은교를 「나의 처녀, 은교에게」라며 첫 편지를 쓰는 장면을 보며 극에 달했었다. 주책,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고, 은교가 마치 나인 것처럼 불쾌했으며, 역겨웠다. 급기야 나는 그를 ‘노망난 노인’으로 치부해버리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내가 이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까닭은, 생각의 전환이다. 만일 그것조차 없었더라면, 책을 읽은 후에도 그들 세사람 모두는, 나의 마음 속에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었음을.

 

 

 

 

 

자신이 죽으면 1년 후에 공개해달라고 했던 시인의 노트가 Q변호사의 손에 쥐어졌다. 그곳에 놀라운 고백 두 가지가 정갈하게 쓰여있을 것이다.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와 ‘내가 서지우를 죽였다. ’ - 노트에는 세 사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시인 이 적요, 제자 서 지우, 그리고 한 은교. - 1. 노인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어 자신의 살붙이같은 데크의 의자에 놓여있던 소녀를 보게 되고, 고이연…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소녀의 숨소리가 들리고 맞은편 의자로 걸어가 쌔근쌔근,하는 소녀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소녀의 쇄골에서 가슴께쪽으로 내려가는 창[槍]을 본다. 그것이 이 적요와 한 은교의 첫, 만남이다.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 생애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 사실이다. 2. 오십대에 모 대학교 석좌교수로 임명된 그가 강의를 하고 있던 도중 한 학생이 질문을 해온다. 그것으로 안면을 익힌 그가 연구실로 들어와 “앞으로 교수님 수업, 청강을 허락받으러 왔습니다.”라며 당차게 이야기해온다. 그것이 이 적요과 서 지우의 첫, 만남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 만남이라고 해봤자 몇 달의 인연뿐. 그리고 십여 년쯤 후, 그가 노인을 다시 찾아왔다. 거의 유일하게 그를 믿을 수 있었고, 살붙이 같은 정을 느꼈다. 단 하나의 가족이었고, 모든 희노애락과 오욕칠정을 내보여도 되는 유일한 친구였다. 다만 그가 제자로서 문학판에서 쑥쑥 뻗어나가지 못하는 게 늘 마음 아팠다. 멍청하다고 욕을 하고, 온갖 구박을 하며 위악적으로 굴어봐도 밭이 근본적으로 부실하니 소출이 없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 그는 여전히 ‘내 새끼’였다.

 

 

 

 

 

 

 

개인적으로 작품에서 마음이 가장 많이 갔던 서지우. 그는 헤어진 아내를 거론하며, 둘의 관계는 미적지근했다,고 말했었다. 만나면 따뜻하고 안 보면 조금 쓸쓸한, 그것이 나의 사랑이다. (…) 내가 꿈꾸는 사랑은 오래 앉아본 듯한, 편안한 의자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하던 그가, 사랑은 본래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라고 말하던 이적요의 말에 동의하지 않던 그가, 은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은 뜨겁고 무겁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짠 -해져 그 부분에서 다음 장을 휘리릭 넘길 수가 없었다. 서지우가, 은교를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좀 더 뻔뻔했더라면, 혹은 은교만,을 사랑했더라면 작품에서 내가 서지우를 품을 이유는 없었을 게다. 그는, 은교를 사랑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마, 하고 손 놓고 있어야 할까. 어떻게 살아온, 어떤 선생님인지 나는 알고 있다. 보호해야 할 분은 은교가 아니라 선생님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 (…)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선생님을 잃고 싶지 않고, 은교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 때로 선생님이 나의 장애물이며 짐이라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선생님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백 배 낫다. 어떤 의미에서 선생님은 여전히 은교 이상이다. (…) 그래봤자, 당신은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은교를 당신의 노망난, 미친 욕망으로부터 지킬 것이므로. 아니, 은교만이 아니라, 선생님, 당신도 나는 지켜야 한다. 은교를 ‘늙은이’로부터 지키는 것이 ‘늙은이’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길이 전혀 없을 땐 아, 당신을 죽여서라도, 당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 진실로 말하건대, 나는 여전히 아직도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

 

 

 

 

 

 

앞서 말했던 생각의 전환,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라는 것에 기초하는데, 이적요가 한은교를 사랑했는가? 답은 그렇다. 아주, 많이. 하지만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이 남녀 관계에 있어서의 사랑이라고 했다면, 글쎄, 난 소름돋음에 책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내가 바로 그 부분을 두고 이적요를 ‘노망난 노인’으로 치부했던 까닭이다. 늙는 것, 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 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이의 욕망은 더럽고 끔찍한 범죄이므로, 제거해 마땅한 것, 이라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있었다. 이적요는 한은교가 지닌 젊음을 사랑했던 듯 보였다. 젊음을 가지고 싶고, 젊음을 끌어안고 싶고, 젊음을 사랑하고 싶은, 그보다 젊지 않은 혹은 늙은 남자의 갈망 같은 것. 그렇기에 은교에 대한 맹목적 사랑,은 젊음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었다,고 그렇게 이해했다. 물론 그게 답은 아닐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바와 전혀 다른 의미로 내가 이해했다 하더라도, 난 내 뜻을 굽힐 마음이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 정말, 싫다.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일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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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앉아 있었지만 내 온몸은 풍뎅이처럼 부풀어 있었다. 마음을 내려놓으려 할수록 분노가 내 속에서 놀라운 폭발력으로 빅뱅을 거듭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ㅡ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다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나,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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