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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 찾기
전아리 지음, 장유정 원작 / 노블마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200페이지가 약간 넘는 이 책은 내게서 기억 저 편에서 이미 묻혀버린 오래된 기억을 선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한데, 그것은 효정의 첫사랑 김종욱이 아닌 바로 나의 첫사랑. 하지만 첫사랑은 역시 첫사랑일 뿐,이라는 말에 실감하며 바보같은 표정으로 어리둥절해 하는 그를 앞에 두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푸하하_ 하며 자지러질 듯이 웃던 내가 있었다. 왜 웃냐는 그 친구의 물음에도 난 그저 웃을 뿐이었다. 헌데, 나는 왜 그 기억과 마주한 지금, 마치 날개 젖은 새를 바라보는 이리도 처연한가. 누군가가 나의 첫사랑이라는 것이, 내가 누군가의 첫사랑이라는 것이 낯설다. 아니, 나는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낯설다. 한 녀석이 니가 내 첫사랑이었어,라는 오글거리는 멘트를 날렸을 때, 온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듯 하여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가만히 있다가도 발작을 일으키는 증세를 보이기도 하였더란 말이다. 풉. 첫사랑, 첫사랑…. 그래, 애틋하지. 애틋한 만큼 처연하고, 모든 것은 딱 그만큼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그때였다. 그 감정들이. 그래서 사랑이란 것이 알지도 못하는 그때에 - 여전히 지금도 사랑이라는 녀석은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 첫사랑이라고 규명지으며 그것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었던 게지. 그는 그때 누구보다 찬연했다. 또 누구에게나 첫사랑이라는 기억은 찬연한 기억으로 남아있을터다.
자꾸 첫사랑이라는 오글거리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은 그것을 찾는 효정이 자신의 사랑이었던 김종욱을 내놓으라 내 앞에 딱 버티고 서서 두 손을 쫙 펼치고 눈을 부릅뜨고 있기에 그를 찾기 전 내 첫사랑을 잠시 언급했던 여유를 가지고 싶었던 게다. 이 책의 줄거리를 구지 꺼내놓자면, ‘첫사랑을 찾아드립니다.’라는 사기를 당한 광고지의 전단지가 회사에서 짤린 효정에게 우연치 않게 날아든다. 그것은 효정에게 첫사랑을 찾는 일보다는 일자리 제공을 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먼저 들게 만들어 무작정 찾아간 그 곳에는 지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보았던 성재가 있었다. 성재는 효정의 첫사랑을 함께 찾는 것으로 테스트를 하겠다,고 얘기하고 효정은 그에게 고이 간직한 예뻤던 자신의 첫사랑을 나즈막히 고백한다.
라디오헤드의 <Creep> , 여자애 입에 남아 있는 달큼한 담배 냄새, 발가락이 얼어붙을 것 같던 새벽의 추위, 이름 모를 벌레의 걸음걸이. 내 첫사랑은 그 여자애뿐 아니라 당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가제본, p63) 인도에서 만난 구구절절 늘어놓은 효정의 첫사랑보다 두 장도 채 안되는 성재의 첫사랑이 더 깊이 다가왔던 것은 아마도 동질감이라는 까닭이었으리라. 내 첫사랑이 그 친구뿐만 아니라 나와 그 친구를 둘러싸고 있던 동아리, 도서관, 문학제 준비때문에 함께 내뱉은 한숨, 끝난 후의 희열, 그때 게걸스레 먹은 자장면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으로 알딸딸하여 비척걸음을 걷던 공원…이었던 것처럼. 여기까지 생각해냈을 때, 갑자기 초점이 사라져버린 눈동자는 안식처를 찾지 못해 헤메고 있었고, 사고회로는 차단되어 아무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때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때의 시간이 이렇게 예쁜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책은 이렇게 그저 단어들의 집합으로 문장을 이루어내 독자와의 교감을 이루고 있었다. 책 속의 등장인물만의 오롯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아리 작가는 「팬이야」 이후 「김종욱 찾기」로 내게 다시 다가왔는데, 아무래도 이미지가 이제 완연하게 굳혀져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녀의 책은 가볍고 유쾌하여 보는 내내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딱 거기까지다. 나는 아직도 어떠한 교훈도 얻어낼 수 없는 책이 낯설뿐더러, 이렇게 유쾌하기만 한 책을 읽고 나면 왠지 허한 느낌마저 이는 까닭에 다른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우연처럼 만나 인연이 된 효정과 성재를 떠올리고 있노라니 어느새 걸린 미소가 하루종일 떠나질 않는다. 그래, 이거면 됐지. 하하하 - 오랜만에 유쾌한 다른 이들의 연애소설을 훔쳐다보았다. 그들의 행복 바이러스가 나에게도 옮겨붙기를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