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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11월이었다. 연속되는 최악인 책들에 대해 켜켜이 쌓여가는 책에 대한 거부감은 좀체 풀릴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영란을 집기까지에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했음을_ 이 책을 집는 그 순간에도 내려놓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수십번도 고민했음을 고백한다. 더 이상은 책에 실망하고 싶지 않았고,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활자들에 배신감을 느껴 그것들을 발로 쿵쿵 밟아 땅에 파묻고 싶지 않았다. 11월 내내 내가 가진 표정들 중 가장 추악한 인상을 쓰는 얼굴과 좋지 못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왔다. 안되겠다 싶었다. 내 마음을 동요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다. 내가 가진 책 중 나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드는 책이 없을리가 없었다. 책장에서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를 한 손으로 움켜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책이 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물이 가득찬 마음으로 하산의 아픔을 위로해줄 자신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책을 읽고는 싶은데 어떠한 판가름이 서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음 책이 나에게 어떤 기분을 안겨줄지 이제 덜컥 겁부터 나는 마음때문에 「영란」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을 집으면서도 안절부절하여 첫 장을 쉽사리 펼치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강구책이라는 것이 책에 대해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아무리 공들여 쓴 서평이라 할지라도 책을 읽지 않은 나에게 오롯이 와닿을리 없었다. 분명한 것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는 것 말고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이니 어떤 평도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아 그저 겉만 걸신 들린 듯 핥아댔다. 혹, 그 속까지 제대로 맛보았다 하였더라도 그것들은 이미 내 미각에서 지워졌으리라.
정섭은 자신이 그 여자를 생각하는 마음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수맥이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생성된 눈물길이 통하고 있어서였다. 그것은 그러니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파인 가슴이 만들어낸 셈이었다. 그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그 눈물샘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시작된 셈이다. (p69)
영란은 아니, 후에 목포에서 영란으로 불리는 그녀는 아이와 남편을 가슴에 묻고 빵과 막걸리로 끼니를 떼우며 억지로 사는 듯한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남편의 출판사에서 책을 낸 정섭에게 인세를 주기 위해 연락을 하게 되지만, 정작 정섭이 그런 그녀를 딱하게 여겨 “막걸리 말고 빵 말고 밥을, 따뜻한 밥을 먹읍시다.”라며 그녀를 회유한다. 둘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온기를 공유한다. 여기서 ‘온기’라는 것이 ‘사랑’이라고 오인하면 곤란하다. 내내 가족의 빈자리를 메꾸지 못하고 혼자였던 그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었다고, 나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정섭은 친구의 부음에 목포에 가야하는 상황에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어쩌실래요? 라고 물어오고 그렇게 그녀와 함께 동행하게 된다. 그녀와 그가 목포로 향하는 기차의 뒷자석에서 나도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 도대체 뭘 믿고?’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둔 채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옹색스러울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고 헤어리지 못했고 헤아릴 필요가 없다고까지 여겼다. 그리고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인 것이 분명한 지금,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또 다른 자신에게 가만히 말을 걸어본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기를. 내가 나를 부디 저주하지는 않기를. (p105)
나의 ‘영란’이라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야겠다,고 혼자 생각하며 큭큭, 웃어본다. 책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는 대체 무얼까. 그곳 지방이 아닌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 잔잔함을 가장한 지루함? 그녀와 그의 시점 처리에서의 혼란스러움? 답답한 전개? 그 중 이유로 댈만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혹자들의 서평을 살펴보면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불평·불만은 단연 사투리였다. 허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이 책의 매력을 단박에 떨어뜨리기에는 안타깝다_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하긴, 개개인이 느끼는 것에는 차이가 있는데, 내 주관적인 감정을 앞세워 설명하는 것 또한 부질없다고 생각된다. 작가는 슬픔에 등지고 앉지 말고 슬픔과 마주하라고, 그 슬픔을 꺼내서 달래주라고 이르며 그것을 영란이라는 인물을 통해 눈 앞에 놓아주고 있는 셈이다. 그 '영란'의 모습에서 나는 신경숙 작가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서의 '하진'과 「외딴 방」에서의 '나'를 만났다.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그려내는 슬픔을 마주하는 이들이 애잔하지만 결국은 슬픔을 딛고 섰다는 것이 기특하여 - 정작 나는 그러지못하는 주제에 -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소가 촘촘하게 배어나온다. 이 책은 그간 나의 비루한 독서의 간극을 채워주기에 적역이었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고 그녀의 글이 좋다_라고 생각했던 적 없었고,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든 적 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순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엔가 그녀의 매력에 파고들었다는 것 만큼은 자명하다. 고마워요, 공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