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장화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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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즐기지도 않는 아포가토 생각이 간절하여 오후 2시의 햇살을 등에 업고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투게더를 사가지고 들어와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떠놓고 커피를 타서 조금씩 조금씩 한 잔을 다 부어버렸다. 캬 - 그래, 이 맛이야! 라며 싱글벙글대며 냠냠 잘도 먹다가 문득, 마음 한 구석이 뜨뜻,해졌다. 이유 모를 애잔함이 스며들어와 한동안 뭉클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입 안에 따뜻한 커피와 입 속의 체온으로 인해 녹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이스크림 먹다가 주책이다 정말. 그러고보니 이 책을 읽을 당시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줄이 끊어질 듯한 위태로운 그네를 신나게 타는 것같은, 그 정도로 들쑥날쑥 정신없는 감정 기복을 부여잡고 생활을 해왔던 9월의 마지막,이었다. 그 속에서 항상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건조하다고 생각되는, 그래서 늘상 읽은 뒤 에잇,하며 짜증내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눈길보다 손길이 먼저 뻗치는, 에쿠니 가오리와 다시 한번 재회했다. 화사한 파스텔톤의 예쁜 표지의 빨간 장화라는 제목으로. 그가 유선상으로 흉내내던 쿡쿡거리는 히와코와 두개의 질문 사이에서 '응'이라는 대답만 하는 쇼조는 이미 증발해 버리고 읽은 뒤엔 나의 책 속에서 꼼틀꼼틀 살아 숨쉬는 히와코와 쇼조가 서 있다.

 

 

 

히와코와 쇼조의 결혼이 어느 덧 10년차, 그러나 둘 일상생활 속의 특별함,이라던가 소소한 행복,은 처음부터 그들의 것이 아니었던 것인 듯 무미건조한 일상의 총칭이라 불려도 이상할 것 없는 그런,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다. 당신은 여기 있는데도 마치 없는 것 같아. (p109) 듣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귀가 먹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인 것인지 아무런 미동도 없는 쇼조에게 히와코는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지칠만도 한데 계속해서 재잘재잘 떠든다. 쇼조가 듣고 있지 않다는 걸 그제서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어느새 그녀의 재잘거림은 그렇게 잦아든다. 그렇게 한번, 두번 쇼조에게 체념해가는 그녀를 보며 이런 것이 바로 결혼 생활이냐며, 당신네들의 연애시절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나는 발만 동동 굴러대며 떼를 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애를 했다는 것만 기억할 뿐, 어떤 식으로 사랑을 속삭였는지 - 실은 그런 일이 있었을런지도 의아스러운 - 히와코는 기억해내지 못한다. 가장 아름답게 각인되어야 할 사랑의 조각들을 잊지않게 퍼즐로라도 끼워 맞추어 주지 그랬느냐며 쇼조를 타박하지만 그는 그대로 텔레비전에 푹 빠져있을 뿐, 자신의 하나뿐인 연인 - 이라고 하기엔 이미 멀어보이지만 - 인 히와코에게도 다정한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알지도 못하는 여인네에게 눈길 한번 던질리 만무하다. 그의 그런 태도에 독자인 나조차도 질려버리게 만드는 힘은 쇼조만의 것이다. 아니,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지만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히와코의 모습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을 볼 때, 그러니까 희망과 체념의 연속인 삶을 사는 것 같은 히와코에게도 질려버렸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히와코는 빨간 장화 과자가 자신과 쇼조의 결혼생활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서로 어긋나는 상징처럼. (p162) 제목의 빨간 장화,는 의아하게도 과자였다. 쇼조가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오는 빨간 장화 모양의 용기 안에 든 초콜릿과 떡과자. 히와코는 쇼조에게 4년째인가 5년째에 더 이상은 그것을 사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쇼조는 고집 센 할아버지처럼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것을 손에 들고 오고, 히와코는 이내 쿡쿡 웃는 것으로 체념하고 만다. 그리고는 그것을 옷장 안에 깊숙히 넣어두고는 꺼내지 않다가 처분,하려고 꺼내지만 그것이 버리면 안 되는 것이라도 되는 듯 다시 옷장 깊숙히 넣어둔다. 그것은 아마 히와코의 옷장 속에서 내년도, 내후년에도, 그 후,에도 나오지 못할 것임을 히와코도, 나도 알고 있다. 쇼짱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지켜주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듣지 않는다. 내 대답은 듣지 않으면서, 그래도 나를 향해 이야기한다. (p195) 깔깔깔, 웃음이 나온다. 히와코를 보며 이야기하는 쇼조라니, 히와코와 쇼조는,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이 구절에서 언뜻 들었다. 그래, 이런 것도 사랑이라 불릴 수 있는가, 이런 것도 부부애라 말할 수 있는가. 아직 잘 모르겠다. 그게,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결혼,이라는 것이 싫어질런지도 모르겠다. 결국 히와코와 쇼조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결정이라는 것은 작가의 시선 선상에 제외된, 그러니까 애초에 결여됐던 것인지 그 무엇 하나 변화된 것 없이 이 책의 마지막을 향해 덧없는 책장을 넘기게 했다. 나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쇼짱에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런 사실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유쾌하고 행복한, 슬프고 홀가분한 일로. (p227) 무심해 마지않는 쇼조에게 오늘도 재잘거리고 있을 히와코가 존재하기를, 그와 그녀가 한 공간에서 무사하기를 - 나의 일이 아니라서 조금은 이기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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