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올해가 6.25의 60주년이라고 해서 그것에 관한 책이나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대중의 밑바닥에 깔려 자기들을 좀 봐달라며 요동을 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뼈 아픈 상처를 남긴 그 때의 그것을 잊지말고 기억하자는 좋은 취지로 만들었을게다. 하지만 통일이 되고 나서 '그래, 그땐 그랬었지'하는 마음에 그 악순환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전보다 똘똘 뭉칠 수 있을테지만 아직 통일도 되지않은 분단 상태에서의 그것들은 사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수십권씩 쏟아져나오고 있고 이번에 읽은 책 역시 그것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조금 다른 것이라면 한국전쟁을 다른 시각에서 본 것이 이 책의 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교자>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은 'The Martyred'라는 제목으로 1964년에 이미 뉴욕에서 출간되었으나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과 故 김은국 작가의 타계 1주기를 기념을 동시에 문학동네가 세계문학전집 속에 <순교자>를 포함시켜 작품을 읽었을 때의 경이로움을 독자로 하여금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재평가할 좋은 기회라고 하여 한층 더 성숙해진 번역으로 재출간하기로 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나는 두번이나 읽었다. 저번 주에 읽을 땐 분명 2,3일이 걸렸던 책이건만 두번째랍시고 3시간 반만에 다 읽은 것 같다. 한번 읽었을 때는 앞뒤 정황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생각도 못하고 '이 책에 왜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가'에 대해 고심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 책을 두번 읽고 난 지금은 '아, 그럴만도 하겠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더 정확한 이유는 서평쓰기 전에는 별 세개에서 그치고서 이 책에 대한 내용을 쓰긴 써야겠는데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맙소사. 내가 도대체 책을 읽을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읽은거지? 혹시 책을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두고 읽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 그저 눈으로 활자만 훑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며 이 책을 읽을 당시 최악의 컨디션으로 인해 불편한 마음을 끌어안고 읽음으로 이 책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했던 거였던 것 같다는 생각에 두번 째 이 책을 들었다. 책은 한번 더 곱씹을 때에야 비로소 그 맛을 알게 된다고,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한번 읽을 때 아무 생각없이 읽었던 것들이 마음 표면에 가 닿아서 마음을 짜르르 울리기에 충분했다.

 

 

 

전쟁 직전에 공산군에 끌려간 14명의 목사들 가운데 12명은 총살당하고 단 두명만 살아서 귀환한다.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부에서는 이들의 긴급 체포와 집단 처형의 사건 경위를 조사하게 된다. 이 사건의 담당자는 정보장교인 이대위와 육본 정보국 평양 파견대장인 장대령과 그 처형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신목사의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간다. 이대위에게 주어진 임무는 처형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두명의 목사 중 정신이 오롯한 신목사에게 '사건의 진상규명'을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목사는 어찌된 영문인지 입을 앙 다물고 그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신목사에게서 진실을 들을 수 있을까?

 

 

 

"신의 개입이었소" (p34) 12명이 처형당하는 현장에서 어떻게 신목사와 한목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 묻자 분명 신목사는 신의 개입이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목사님의 신ㅡ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p37) 라는 이대위의 물음에 신목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읽을 땐 생각지 못했는데 서평을 쓰려고 찬찬히 흐름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그도 그때부터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은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p255) 신목사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의 조합은 이런 문장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신목사의 그런 대답은 나조차도 흔들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위태롭게 끄나풀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고, 그의 형상이 그려졌다. 그를 보고 있노라니 윤리에서 흘러가듯 배웠었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떠올랐다. 아! 이 책은 실존주의를 다루고 있었다. 처음 손에 들고 몇 장 읽었을 땐 추리일 것만 같았던 이 책은 사실은 실존주의라는 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당황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역량으로 조금씩 물꼬를 터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신목사는 이대위에게 마음 뭉클한 이야기를 전한다. 혹은 나와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름모를 이들에게 저자가 전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용기를 가지시오, 대위. 우린 절망에 대항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오. 절망에 맞서서 계속 희망해야 하오.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오." (p256,257)

 

 


저자의 글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저자도 'The  Martyred'이라는 제목을 <순교자>로 지을 수 없음을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장 곳곳에 가미되어 있는 종교짙은 문장들이 나에게까지 미치기엔 부담스러워서 주춤했던 것이 사실이다. 종교가 없는 나는 사실 책 속의 신도들이 신목사에게 '유다! 유다!'라고 소리쳤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흐름을 쫓아가기에도 바쁜데 사전까지 뒤적뒤적거릴 필요성을 못느꼈기에 본연의 활자 그대로를 따라 눈이 움직였고 그 활자 속에서 의미를 파악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유다라는 단어가 가진 어원을 찾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찬송을 받을지어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라는 단어을 찾으면서 오만상이 찌푸려졌고 짜증이 밀려왔다. 곧바로 explore를 꺼버렸지만 구겨진 인상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일부분 , 1/3 , 1/2 혹은 이 작품의 전부라 할지라도 이 소설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 대립에 대한 첨예한 인식을 꺾을 수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