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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지음, 박상미 옮김 / 이상미디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가정은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시할 수 있는 장소이다. - A. 모루아
누구에게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고유의 그 명사만으로도 뭉클하게 만들며 눈이 시릴 정도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지 가족에 관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계속해서 극찬을 받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가족,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라는 작품은 뜻밖에도 단편집이었다. 단편집을 무던히도 싫어하는 나이지만, '위험한 독서'를 읽고나서부터는 '단편도 하나의 작품이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 나름대로의 패턴을 유지하며 읽고 있다. 그러나 단편집은 그에 대한 매력이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해야만 넘어가는 책이 있는가 하면 , 정말 그 매력에 빠져 허우덕대며 읽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자 , 후자 모두 낯설었는데 이유인즉슨 , 읽으며 TV 프로그램에서 해주고 책으로도 출간되어서 전혀 낯설지 않은 'TV동화 행복한 세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은 강렬한 임팩트를 기대할 수 조차 없고 그저 설렁설렁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냥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내용이 실려있지도 않고 , 나에게 있어 상상할 수 없는 상황들도 꽤 있어서 그다지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한번 들었다 , 두번 들었다 , 세번째 들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읽은 것이 아니라 , 겨우 한번 훑어봤을 뿐이다. 책은 두번 읽어야 제대로 읽은 것임을 알지만 , 두번씩이나 읽고 싶을 만큼 감동적이었던 것도 , 공감이 되었던 것도 없었기에 두번이나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중 가장 괜찮았던 단편은 보석함 속의 진짜 보석이라는 단편이었는데 , 겨우 두장밖에 되지 않는 글이기에 길어야 3분 안에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다. 화자인 엄마에게 보물이 들어있는 보석함이 있는데 , 그곳엔 종이 한 장과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몇가지가 함께 보관이 되어있다. 엄마는 사춘기인 아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엄마에겐 힘겹기에 꼭 이렇게까지 다가가야 하냐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 때마다 들여다보는 쪽지가 있는데 , 그 쪽지엔 이렇게 씌어있다. '엄마, 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랑해요.' 그 순간은 정지되지 않았고 , 어쩌면 당연한 그 말이 변질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 엄마는 그것을 생각하며 아들에게 다가가기를 꺼리지 않는다. 부모님에게 희망은 자식인 '내'가 되고 , 그 희망을 깨뜨릴 수 있는 것도 '내'가 되기 때문에 , 부모님이 그것을 영원토록 행복한 그때의 마음으로 가지고 가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도 결국은 '내'가 된다.
가정은 나의 대지이다. 나는 거기서 나의 정신적인 영양을 섭취한다. - 펄벅 (p202)
나는 그동안 , 아니 사실 지금까지도 항상 가족에 대한 불만을 터뜨려왔고 , 터뜨리고 있다. 나를 제외한 family 라는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는 내 가족들은 나에게 있어 항상 나의 행동을 규제하는 대상들이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발목을 꺾는 것만 같았고 ,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에 대해서라면 생각해보고 내리는 결정이 아닌 무조건적인 'NO'라는 대답만을 들었기에 'YES'라는 대답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남들 다하는 혼자서의 여행이라던지 , 모험이라는 것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했고 , 설사 부득이하게 어딜 놀러가게 되더라도 마음 편하게 즐기기는 커녕 집에서 오는 염려가득한 전화를 받느라 하루를 다 보내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항상 불만이 터졌고 , 철없는 마음에 나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나를 과잉보호해서 그런 것이라며 단정짓곤 했었다. 하지만 'NO'라는 대답을 듣고도 내가 그것들에 엄청난 반항을 하지않고 항상 순응하고 마지못해 억지로라도 고개를 주억거릴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가족을 믿고 ,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이유가 아닌 맏딸이라는 위치는 나에게 부담에 부담에 부담을 지어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유년기의 그런 생활들은 참 많이 괜찮은 시간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통금시간이라는 것이 주어져있던 나는 정해진 통금시간 안에서의 시간들만이 나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기에 매일매일 주어지는 나의 시간들을 어떻게 쓸 것인지 매일 밤 연구하고 , 생각했다. 그러나 스무살이 되면서부터 통금시간이라는 것은 자연스레 없어지고 전에는 '어차피 밤에 잘껀데 뭣하러 낮에 자면서 시간을 낭비해?' 라고 대꾸하던 나는 할일없는 날이면 주구장창 누워서 낮잠을 자거나 , 컴퓨터 혹은 TV 혹은 술먹으러 나가는 날들이 이어지는 항상 의미없게 보내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지금도 역시 스무살 때 흐트러진 생활들로 인한 여파가 커서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날들이 대부분이지만 , 적어도 그 때 당시는 부모님이 의도했건 , 의도치 않았건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었던 아이로 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몇 해 전 , 무엇이 원인이었는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시작된 아주 작은 사소한 일로 엄마와 다퉜던 적이 있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 먼 훗날 찾아오게 될 상황이 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벌떡 일어나서 그 새벽에 엄마와 아빠가 주무시는 안방엘 가서 그 속을 파고들고서야 겨우겨우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때로는 생각해본다. 엄마가 혹은 아빠가 더 이상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겠다고 떠나버린다면 , 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그저 책 한 권을 읽고 느끼는 먹먹함이 아닌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들이 역류하며 숨을 쉬지 못할 만큼의 위험을 동반하게 되는 상상이다. 그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 언젠가는 있어야하는 불변의 법칙임에도 나에게는 그런 날이 조금 더 늦춰지길 바라고 , 이뤄질 수 있다면 아예 그런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대관계로 맺은 타인에게는 관대하면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에게는 왜 항상 냉담하게 반응하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 늘 함께 있어서 그 소중함을 잊고 있다뿐이지 , 결코 가벼운 존재는 아닐텐데 내가 그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 같아서 왠지 내 가족에게 벅차오르는 가슴만큼 미안해지게 만들었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