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 독서의 즐거움
정제원 지음 / 베이직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아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책을  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유는 바로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독서의 즐거움'이라는 책 제목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도 책 제목의 유혹에 이끌려 책을 집어들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지만, 나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나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내게는 너무 생소한 책 속의 책들이었다. 책 속의 책들은 내겐 모두 조심스런 책들 뿐이었고, 하나같이 교과서같은 책들뿐이어서 내겐 눈길도 받지 못하는 그런 책들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실 언젠가 한번은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이해는 고사하고 하루에 몇 분이라도 보기나 할지 의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나에게 저자는 서른 권이나 되는 책을 추천하고 있는데 난 여기서 읽어본 책이 달랑 두 권뿐이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 내 솔직한 대답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추천하는 책들을 모조리 읽어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저자는 우리에게 무작정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묘미를 알려주고 싶을 뿐이니까.


 


 


이 책이 말하고 싶은 핵심으로 시작하고 생각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기 전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같은 경우 책은 나에게 있어서 삶의 지침이고 때로는 도피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쉽사리 내가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착착 해내는 슈퍼맨 혹은 슈퍼우먼같은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나 또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하고는 싶은데 여건이나 능력이 안되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책을 통해 그 속에서 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오는 대리만족에 행복해하기도 하며, 나도 언젠가는! 이라며 두 손을 불끈 쥐게 만드는 그런 책을 좋아한다. 누구나 책을 읽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읽기도 할테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즐겁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나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우선은 '두껍고 난해한 책에 도전한다'(p82) 라는 소제목이 붙어잇는 것인데, 두껍고 난해한 책들 중에선 우리가 분명 배울 게 많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물며 한 쪽 혹은 한 문장의 글을 읽고도 깨달음을 주는 글이 허다한데, 두껍다라고 느낄 두께의 책에서 배워가는 게 없다면 정말 억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두껍고 난해한 책을 읽으라는 저자의 말은 독서를 가까스로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책을 치워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쉬운 책만 읽어서야 독서가로 성장할 수 없다. 책읽기도 도전이다. 라는 문장을 보고 나는 흔히 불리우는 독서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고, 책읽기를 도전하려고 읽는 것이 아니라 좋으니까 읽는 것이다. 독자가 책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길잡이를 해줘야 할 책이 난해함이 난발하는 그 책에서 독자가 즐거움을 찾길 바라는가? 내가 생각하는 길이가 짧은건가, 나는 저자의 말에 조금은 반박하고 싶어졌다. 저자는 아마 저자가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프레히트의 <나는 누구인가>에 나온 즐거움이 없는 교훈은 강제노역이고, 교훈이 없는 즐거움은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p86) 라는 이 문장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저자는 우리에게 강제노역을 어필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은가?


 


두번째로는 '어떤 분야든 입문서부터 읽는다'(p121)의 내용 중 과학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려면 홍성욱 교수의 <홍성욱의 과학 에세이>를 먼저 읽고,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려면 한국문화인류학회의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으로부터 시작하며, 미학과 친해지려면 진중권 씨의 <미학 오디세이 1,2,3>을 첫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 좋다. 라는 문장이 있는데, 왠지 불쾌함마저 느껴지는 글이었다. 저자는 우리에게 책을 추천하는 것이 목적인데, 왜 강요처럼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선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책이 누구에겐 좋고, 누구에겐 시시껄렁한 그런 책일 수도 있는데, 저자는 저런 말을 해놓고서도 우리가 '아, 이 책은 이래서 좋구나'라고 생각할 만한 무언가도 제시해주지 않고 무조건 저런 식이다. 이 타이틀과 관련된 내용을 죽 - 읽어내려가며 내가 생각한 결론은 하나뿐이다. '내가 왜?'


 


세번째로는 '용어(개념어)사전 혹은 지식사전을 읽는다.'였는데, 누구나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와 당황했던 적이 한번쯤은 있을거라 짐작한다.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구지 개념어사전이 아니더라도 국어사전 혹은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인터넷에 치면 그것에 관한 예시까지 주르륵


나온다. 개념어사전을 쓴 작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왜 책을 읽으면서 그런 책을 읽는 수고까지 해야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얻은 게 있다면,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 (p90)였는데, 요즘엔 새로운 책들을 읽느라 여념이 없어서 두 번 이상 읽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저자가 머리를 망치로 두드린 기분이다. 저 말에 항상 공감을 하면서도 실천을 하지 못하는 나는 어쩌면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보다는 많이 읽는 것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에는 책을 두 세번씩 읽기도 했는데, 한 번 이상 읽은 책들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흥을 주었고, 그 전에 읽을 때 미처 찾지 못한 것들을 발견해내는 즐거움까지도 제공해주었다. 그 기분은 항상 나를 설레게 하고 나의 눈과 입을 웃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다면 혹은 생각지 못한 수확을 얻고 싶다면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두 번 이상 읽은 책을 늘려 나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기 바란다. 진정한 독서가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곱씹으며 내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p97)


 


 


머릿 속의 내용들이 정리되어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써야 머릿속의 내용들이 정리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와 반대로 생각해왔다. 이런 착각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글을 쓸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펜을 들고 아무 종이에나 한 번 긁적여보는 것이다. (p150) 나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데 사실 서평이라는 것이 말만 거창하지 독후감정도밖에 되지 않는 내 글을 볼 때면 한숨이 나올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가끔은 서평이라는 게 숙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서 거북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내가 서평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작년 즈음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를 읽었는데, 그 책 결말이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유 글 재주로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 생각이 하나도 안나는 것을 보니 자괴감마저 느껴졌었다. 그래서 부족한 서평이라도 쓸까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에 손을 올려놓을 때면 무어라고 시작해야할지도 모르는 그 막막함을 다들 한번쯤을 느껴봤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서평기록 연습장을 따로 사서 혼자 끄적대기도 하고, 그것을 컴퓨터에 옮겨놓을 땐 거기에 살이 붙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 신기한 경험은 책을 읽을 때보다 서평쓸 때 그 감정이 더욱 세밀해지고 복합적이 된다는 것이다. 책을 그저 눈으로 읽는 것과 손으로 혹은 타자로 글을 쓸 때의 느낌은 천지차이다. 난 그 느낌이 참 좋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조금은 부담스러웠고, 독서라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구나 라는 낯설음까지 느꼈다면 저자는 무어라 답할까? 책 소개란에 책 속의 책이라고 나왔는데, 그보다 책의 누구나 공감할 만한 구절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그에 대한 저자의 느낌정도만이 와닿았다면, 내가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나는 책을 이제까지 잘못 읽은 것 같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책 속의 책의 구절은 나의 머릿 속에 엔진을 달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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