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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처음 펼치기 전 제목을 보고 매우 의아해했다.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난 처음 이 책을 접하고 난 뒤 제목의 모호성에 의아해했다. 시체가 살아있다니.. 게다가 그 시체가 다시 죽어? 이건 대체 무슨 말이야? 이러면서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또한 죽음을 다루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책은 분위기가 어두침침하고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좀 더 근접하기 쉽게 유쾌함을 선물해주고 있다.
발리콘 가가 운영하는 ‘스마일리 공동묘지’가 위치해있는 미국 북동부 시골 마을 툼스빌에 스마일리의 손자인 그린은 유산을 받기 위해 찾아오게 되는데 그 곳에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린은 200페이지도 못넘어가서 할아버지가 먹게 될 초콜렛을 먹게 되고 사망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아 뭐지? 주인공이 죽으면 이야기가 끝난건가? 그런데 남은 책 분량은 왜 이렇게 두꺼워? 아님 다른 시점으로 넘어가는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그린은 다시 소생한다. 그는 점점 더 부패해져가는 몸을 방부 처리하여 죽음을 숨기고, 자신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 진실을 파헤치던 중 발리콘 가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살아난 시체가 이끌어가는 또 다른 진실!
책을 읽은지 300p쯤 되었을 때 등장인물을 너무 많이 등장시킴과 함께 장황하고 이야기를 다 풀어헤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작가는 이 도저히 풀 수 없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려고 이렇게 다 풀어헤쳐놓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아 그랬구나, 그런거였어?’라는 생각이 들며 실뭉치가 한올한올 풀리는 그런 명쾌한 기분을 맛보았다.
난 이 책을 다 읽고 ‘새벽의 황당한 저주’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이 영화 역시 시체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점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점은 영화에서 살아난 시체들은 좀비가 되어 살아있는 사람들을 공격하지만, 책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되살아난 시체들은 숨만 쉬지 못할 뿐 살아있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는 나중에 주인공이 친구와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그 친구는 살아있는 시체이다. 또한 다른 살아있는 시체들은 일을 하는 장면들이 뉴스를 통해 보도된다. 그것이 정말로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는 작가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생각들이 가미되어 있어서 작가를 이해하며 읽을 수 있던 책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또한, 나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번 더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소재로 책을 읽기엔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을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우선 자신은 죽음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한 생각을 충분하게 한 다음 자신에게 작가의 생각을 주입시키려 하지 말고 그 생각들을 자신의 생각에 조금씩 가미시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이란 모호한 경계선 안에서 작가는 삶과 죽음은 겉과 속을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위상적 공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생각할 수 있는 틈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고 난 생각한다.
책 속 밑줄긋기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 있었을 때의 추억은 사랑하고 언제까지나 기억에 남기려 하지만,
싸늘하게 썩어가는 시체는 두려워하고 잊으려 합니다.'
- 108p
"우리도 다들 마찬가지일세. 삶과 죽음은 표리일체. 삶을 생각하는 일은 죽음을 생각하는 일.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삶을 생각하는 일.
우리도 다들 살아 있는 시체라네. 되살아나나 시체들은 중세의 트란지 입상처럼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게야.
삶과 현세에 아무리 집착한들 언젠가는 이렇게 티끌이 되고 만다고 말일세.
이게 바로 20세기의 '메멘토 모리'아니겠나. 우리 모두 집행유예 중인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네."
- 6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