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요양원으로 출근합니다
김혜숙 지음 / 피톤치드 / 202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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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은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요양원이라는 곳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가 작년에 요양원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에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동에 있으면서 내과적 안정이 되면 가야하는 곳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연히 재활병원으로 가야했지만 내과적 안정이 됐다하더라도 무의식의 와상환자를 받아줄 재활병원은 거의 없었고 병원에서만 뭉개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알아봤었는데 재활병원 외에 요양병원, 요양원이라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는 적극적인 재활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포기했었다. 뿐만 아니라,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은 어마어마했고, 찾아볼수록 부정적인 면에 몸을 떨었다. 사회적 약자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는 구조가 있다면 그건 바로 요양원이라는 확신을 그때 가졌다. 그렇다고 재활병원이 믿을만했냐,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사방팔방 알아보고 여기저기 구걸한 결과, 아버지는 회복기 재활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흔히들 재활병원에서 더 나아지지 않으면 가정간병을 하거나 요양병원, 요양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고, 아버지는 점점 더 나아지고 (믿고) 있으니 조금 더 파이팅을 외쳐보고 있다. 사실 걱정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안절부절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고 있다. (물론 잘 안되어서 재활의지가 약한 아빠가 미워질 때도 많지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100%의 회복을 바라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30%만이라도 올라온다면 퇴원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만큼이라도 따라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여전히 요양원이라는 곳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으면서도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요양원에도 따듯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서였다. 요양원에 대한 기사나 영상을 보면 정말 저게 사람 대 사람으로 저런 짓을 해도 되는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저러한 대우를 받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해 분노를 하게 만드는 일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요양원이라고 했을 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전혀 없었다. 그런 요양원에 매일 출근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일들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책의 저자는 인천에 새소망요양원과 클래상스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혜숙 씨였다. 요양원에서의 일상이 잔잔하게 쓰여있는 것들을 보면서 정말 이런 요양원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게 진실이라면 그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은 웃음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러다가 뒤로 갈수록 종교적인 부분이 깊게 관여가 되면서 책이 마무리되는데 자칫 그게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요양원을 시작한 계기로 접근한다면 크게 개의치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63. 이름을 부르는 일은 사람을 구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이고 그 사람의 존재감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해 주고,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구체화하고 서로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특별함을 느낀다. 이름을 부르면서 관계의 질이 높아지고 서로가 더욱 가까워지게 된다. 또 이름을 자주 부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그 사람의 변화나 감정에도 더 민감해진다. 이름을 불러주는 사소한 일로 관계의 본질을 다질 수 있다.


아버지는 재활병원으로 옮기기 전의 짧은 시간 동안 총 네 명의 간병인이 바뀌었다. 그중 세 번째 간병인이 아버지를 어르신이라 하지 않고 꼭 “필수 씨”라고 불렀다. 비록 무의식 와상이었지만 그분께 케어를 받을 때의 아버지는 한결 편안해보였다. 그래서 그분을 오래도록 쓰고 싶었지만 개인 간병인 탓에 만만찮은 간병비용에 고민 중이기도 했고, 당시 환자 3-4명을 담당하지만 꼼꼼하게 해주는 공동간병인 자리가 어렵사리 비어 그 간병인과의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불러주던 그분의 음성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마 그분도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대한 효과를 잘 알고 있던 분이 아니었을까.



시대상의 반영과 동시에 아버지의 일로 노인복지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나 역시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로 떠올라서 관심이 많아졌다. 노인복지, 많이 힘든 일이겠지만 따뜻한 마음들로 인해 외롭고 아픈 노인들의 마음의 씨앗에 새싹이 돋기를 간절히 바란다.





책 속의 밑줄


61.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내 삶의 중심은 크게 바뀌었다. 물질과 거트로 보이는 것을 쫓던 삶을 돌아보며 진정한 가치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있음을 깨달았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단순하지만, 소중한 루틴을 지켜나간다. 나이 듦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나는 나만의 루틴으로 매일의 삶을 다듬고 있다.

작고 소박한 루틴 속에서 나는 행복을 발견한다. 나누는 기쁨과 어르신들과의 교감, 기도로 이어진 하루는 나의 삶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다. 내 하루는 단조롭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112.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요양원이 단순히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중받고, 겸허히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122-123. 아직도 우리나라는 돌봄을 비생산적인 일, 허드렛일, 여자가 집에서 공짜로 하는 일로 취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그의 취약한 부분을 바라보고, 삶의 방식을 응원하며, 때로는 삶의 끝을 배웅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그의 기분을 살피고, 몸을 살피고, 하루를 살피는 일이다. 돌봄은 아이나 노인, 아픈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누구나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꺼이 누군가를 돌보고 있고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스승이다.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분들이 두렵지 않도록 도우며 우리 삶의 가치를 알게 해주는, 참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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