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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라질 날들을 위하여 - 수만 가지 죽음에서 배운 삶의 가치
오은경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평점 :
나는 올해 ‘죽음’에 대해 좀 더 집중했다. 나는 이전까지 준비된 죽음을 생각해왔지만, 세상에 준비된 죽음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재작년에 외할아버지를, 작년에는 외할머니와 시외할아버지를 여의었다. 세 분 모두 각별히 좋아하던 분들이었기에 그 상실감으로 몇 날 며칠을 힘겨워했었는데, 올해 아빠를 잃을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릴 적부터 엄마를 잃는 꿈을 많이 꾸었다. 엄마가 집을 나가거나 엄마가 없어지거나 엄마가 세상에 없는 그런 꿈들. 그런 꿈을 꾸면 자다 일어나서 엉엉 울면서 엄마를 찾아 엄마에게 파고들어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다 잠이 들었다.
내가 꿈에서 잃는 대상이 아빠는 아니었다. 그것도 그렇게 갑자기. 주치의로부터 아빠가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아빠의 눈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멈추어버릴 것 같은 순간들을 지나왔다. 아빠는 깨어났고, 오랜 시간 동안 초점이 맞지 않았던 눈도 돌아왔고, 지금은 우리를 보며 웃고 인사도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빠가 말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아빠가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전처럼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빠가 언젠가는 해낼 것을 알고 있고 아빠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조금 많이 느리고 더딘 것뿐이지, 분명히 갈 때마다 아빠의 발전된 모습들을, 우리는 볼 수가 있으니까. 인내심이라고는 전혀 없던 우리는 아빠를 통해 인내심을 배운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아빠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막연했던 죽음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 달 전 해외여행을 앞두고 나는 온 집안을 다 끄집어내어 정리했었다. 혹시라도 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인데, 그때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지저분한 우리 집을 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용케 살아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기는 하다.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두렵지 않은데, 내가 죽고 난 뒤에 나의 모든 것들이 거리낌 없이 발가벗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었다. 올곧게 살아오지 못해서일까.
지난번 어디선가 지인의 죽음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이 감사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 글자 하나하나가 굉장히 섬뜩하게 느껴졌다. 타인의 죽음 위에 쌓는 감사라니. 그런 감사가 진실한 감사가 맞을까.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그러면서 최근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가 엄마에게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아?”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했는데 더 기가 막힌 건 몇 년 전에 본인도 엄마가 편찮으셔서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그걸 자기 딴에는 위로라고 얘기했다는 점이었다. 엄마가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평소 욕을 거의 하지 않는 나지만 전화를 걸어 얘기를 듣다가 끝내 씨발년아, 라고 시작하는 값싼 문장들을 구사했었다. 말로 인해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살면서 처음 느껴봤다. 뱉은 것보다 훨씬 더 큰 벌을 받기를 바란다.
죽음에 집중해서 글을 쓰다보니 말이 자꾸만 새서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아 다시 책으로 돌아가본다. 저자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38년간 간호사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응급실, 보라매병원 행려병동, 신경외과, 외과, 성형외과, 재활의학과 등 다양한 병동을 거치면서 삶과 죽음의 본질을 직접 마주한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보다 사는 게 녹록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는 것은 분명 성스러운 축복이었을 텐데 죽는 것은 그와 별개로 너무 쓸쓸하고 처참하게 느껴졌다. 많은 이유로 태어난 생명체는 언젠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죽음 자체가 아름답지 못하니 죽음에 대해 반감이 생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책을 덮고 나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연명의료결정법이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2018년에 시행되었는데 시행착오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환자가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고 동의를 했더라도 보호자가 극구 해달라고 한다면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부분에 대해 나도 남편이랑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둘 모두 각자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쪽이 거의 100%였다. 하지만 상황이 닥쳤을 때 남편의 의사를 오롯하게 받아줄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만 더요, 한 번만 더요,라고 간곡하게 외치고 있을 내가 너무 당연하게 떠오른다.
그런 보호자들로 인해 환자의 존엄과 결정권은 사라져간다는 글이 책에 실려있는데 과연 그 말이 맞는 걸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료진들은 그런 경험을 수없이 해보았으니 이렇게 해서도 가망이 없다는 것들을 판단할 수 있겠지만, 보호자는 그런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입장도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붙잡고 싶어하는 마음 역시 너무 절절하게 이해가 간다. 전에 아빠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빠만 버텨준다면. 그리고 힘을 내준다면. 나도 끝까지 버틸 수 있다. 그때 나의 아빠는 간헐적으로 눈만 뜨고 내내 잠만 잘뿐, 살았다고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그랬다. 그게 보호자 마음이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고,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은 마음. 비록 그게 이기적이라고 말한대도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다. 나는 아빠 덕분에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졌고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함부로 추측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모든 이들의 안녕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