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2
서유미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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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또 하나 평생을 기억해야 하는 어떤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기 직전에 도서관에 들러 대출한 책이었다. 세상에는 내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도 잃어버리는 것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자가 되었다. 그런 경험들을 해보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면 발전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사람은 크고 작게 그런 경험들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만 그런 경험들을 하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그런 소망을 품게 된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그런 경험들의 기억은 한숨을 자아내기 마련인데 같은 맥락으로 나는 요즘 한숨이 많이 늘었다. 하루에 백 번은 더 쉬는 것 같은데 그런 나를 보면서 배우자가 가장 많이 걱정을 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너무 쉽게 들키고 마는 일들이 허다해서 같은 사무실의 과장님은 내게 요즘 뭐가 잘 안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냥 미소를 짓는 것으로 그 물음에 대답했지만, 요즘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참 녹록지 않다는 생각이 너무 자주, 많이, 쉽게 든다.



책에는 지우엄마가 아닌 노경주로 살아가고 싶은 여성이 나온다. 서른일곱에 임신을 해서 이제 마흔한 살이 된 그녀는 육아휴직 이후에 복직 대신 퇴직을 선택하고 카페 제이니에 가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수정하고 구직 활동을 한다. 하지만 그녀를 받아주는 회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그녀는 너무나도 괴롭다.


일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던 그녀가 일에서 멀어지고 친구와도 멀어지는 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아이'때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피로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피로는 그것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저출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결심한다고 해서 아이가 당장에 생겨나는 것도 아닐 테지만) 아이가 없는 내게 어떤 제안을 해야 나는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최근 개인 카페에서 9개월을 일한 직원이(혹은 아르바이트생이) 육아휴직을 요청했다고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육아휴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단어가 꽤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개인 카페니까. 하지만 경찰과 노동부에서 조사가 나오면서 개인 카페에서의 육아휴직이 승인되었다고 한다. 어지럽다.



또 최근에 한 카페에서 나와 동갑인 여성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지 않았겠지요?”라는 질문에 여러 답변이 달렸다. 그중 나를 충격에 빠뜨린 한 가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할 것을 다 한 거 아니냐는 답변이었다.

나에게는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다거나 하는 거창한 목표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돈에 대한 걱정은 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과 적더라도 꾸준한 수입이 있었으면 한다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주, 매 순간 생각하는 나로서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할 것은 다 한 게 아니냐는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이건 단순히 job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내 취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인 걸까. ‘나’로서의 인생을 갈구해보지 못한 사람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충격이다.



“당신은 당연히 모르지. 당신은 내가 아니니까!”라는 말로 최근에 배우자에게 깊은 상처를 준 적이 있다. 그 말은 사실이면서도 폭력적인 말이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더 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각자가 ‘나‘의 상황을 몰라준다고 상처를 주었던 것들을 생각해보니, 여러 일들을 함께 경험하고 살면서도 배우자와 나와의 의견차가 좁히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라는 걸 뒤늦게 또 깨닫는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이라고 말한 피츠제럴드가 떠올랐다. 세상에 당연하다 여기는 것은, 내가 그 입장에 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살면 살수록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만만하지가 않다. 이제 좀 다 됐다 싶을 때마다 삶은 내게 숙제를 쥐여주니까. 종전까지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을 이탈할 때마다 가지고 있던 오선지가 끊어져서 어떻게 이어야 할지 다시 고민해보는 시간과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며 슬픔을 감내해야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하니까.

타인에게 듣는 삶이라는 게 그런 거야.라는 말은 여전히 잔인하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라야 잔인하지 않을 수 있다. 받아들이든지 포기하든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답이 없는 생각을 하고 고민하는 지금에도 삶은 계속되고 있다. 계속되는 삶에 내가 어떻게 다시 탑승할 것인지에 대한 숙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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