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의 안녕이 기준이 될 때 - 멍든 대한민국의 안전 재설계 ㅣ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16
권오성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7월
평점 :
내 직업은 안전관리자다. 아니 안전관리자였다. 앞으로 안전관리자로 일을 하고 싶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출근해서 작업 전 신규자가 몇 명인지 파악하고 아침체조를 하고 TBM에 참석하고 신규교육을 하고 패트롤 현장점검을 텀을 두고 두 번 정도 돌고 그날의 서류를 꾸미고 금주에 해야 할 것들을 정리를 해두고 나면 오전이 금세 간다. 오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게 패트롤 현장점검을 수시로 나가고 서류를 꾸몄다. 그 와중에도 공사팀과의 마찰은 너무 불가피했다. 피할 수가 없으면 즐겨야 하는데 책임이라는 것이 주어진 순간부터는 마냥 피할 수가 없어서 맞부딪히는 편을 택했더니 나는 “어차피 소규모 현장이고 융통성 있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일어나지도 않을 사고 때문에 유난을 떨고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하는 업무가 이게 맞나.
나는 그것보다 상위의 업무를 원했다.
위험성평가를 그저 법적 서류로 꾸며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회의 따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공정회의를 하면서 찍은 사진을 관리감독자교육을 꾸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장비가 들어왔다가 나간 뒤에 받아야 하는 건설기계 작업계획서가 아니라
건진법이 아닌 산안법의 서류만 완벽하게 해두겠다 말했을 때 “그러면 하는 일이 뭐냐.” 따위의 질문을 받는 게 아니라
등등등의 보여주기식 안전이 아니라 진짜 안전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도 성장하고 기업에도 도움이 되고 근로자들의 안위도 함께 챙기는 그런 안전관리자가 되고 싶었다.
2022년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기 전부터
2021년 7월 1일 기준 건축공사 100억 원 이상이면 법적으로 안전관리자를 선임해야 했고,
2022년 7월 1일 기준 건축공사 60억 원 이상이면 법적으로 안전관리자를 선임해야 했으며,
2023년 7월 1일 기준 건축공사 50억 원 이상이면 법적으로 안전관리자를 선임해야 한다.
나는 그 덕에 안전관리자라는 직업을 얻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업주들이 그렇듯 선임을 하지 않았을 때의 과태료를 비껴가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안전관리자를 선임하는 현장도 꽤 되었고
안전관리자를 선임하지 않았을 시절에 공사, 공무, 안전, 품질을 다 했던 이들로부터 안전만 한다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안전관리자로 시작한 첫 현장에서 이사님이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셔서 나는 자유롭게 역량을 펼칠 수가 있었다.
이후에 들어간 현장에서는 단지 노동부 선임의 이유로만 채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무너지고 흔들렸다.
<당신의 안녕이 기준이 될 때>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바라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껏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 ‘당신의 안녕’을 기준으로 일해왔다. 아침체조가 끝나고 안전구호를 외치기 전 내가 빼놓지 않고 한 말은 “오늘도 안녕하세요!”였다.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안전은 잘해도 본전이다.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끝끝내 외면하고 싶었다. 그걸 인정해버리면 남몰래 가진 내 목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만 같아서.
올해에 들어 안전관리자를 왜 선임해야 하냐고 물은 적이 두 번 있다. 모두 안전보건총괄책임자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게 말했다. “사고가 나면 안 되니까.” 정말 그 말이 맞을까? 안전관리자가 사고를 예방할 수 있을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현장에서 나의 포지션은 재해로부터 현장 내의 모든 근로자들을 멀찍이 떨어뜨려놓는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달랐다.
“안전관리자는 산업안전보건법에 근거한 서류들을 공고하게 다져놓음으로써 고용노동부 등의 점검으로부터 과태료를 적게 맞으면서 혹시라도 중대재해가 일어났을 때 면피용 서류로 저를 포함한 특히 안전보건총괄책임자까지도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안전관리자의 쓸모, 이게 현실이다.
책에는 내가 그동안 공부할 때와 실무로 있으면서 몇백 번씩 자주 들여다본 법령들과 하인리히 법칙 등이 실려있었다. 나는 눈에 익으니 익숙하게 넘기기는 했지만 법령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건 과연 누구를 위한 책인걸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한국은 경제발전이 너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게 되었다. 안전모를 쓰지 않고 H빔을 뛰어넘어 다니면서 일을 해도 다치지 않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생각 외로 정말 자주 본다. 상흔을 보고 이게 무어냐고 물어보면 업무 중 다친 것이라고 꽤 자랑스럽게 말을 하는 경우도 종종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예전에 안전모 안 쓰고 다녔다는 말에 그럼 그때 임금 받으시라고 맞받아치기도 하고, 전에는 안전대 착용 안 했다는 말에는 그럼 지금 자동차 끌지 말고 가마타고 다니시라 말한다.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 그게 법이든 사람이든. 하지만 어떤 것이나 다 그렇듯 한번에 갑작스럽게 변화하기란 어렵다. 너무나도 당연하다. 한국은 현재 과도기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사업주의 책임에 대해 힘을 주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안전은 한쪽으로 치우쳐져야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평등관계에 놓여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사업주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 별동부대라고 불리는 안전관리자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안전관리자도 벌금형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까닭은 업무태만이라는 것이다. 현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는 내 포지션에서 촉각을 곤두세워 좀 더 타이트하게 업무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타자들은 유난이라고 멸시한다.
하지만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안전보건총괄책임자도 수사를 받을 테고, 안전보건총괄책임자가 나는 안전관리자로부터 지도 조언을 받은 게 없다. 라고 해버리는 순간 안전관리자의 기록이 없다면 그 안전관리자는 업무 태반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겨놔야 하는데 그 기록을 어떻게 남겨놓느냐 하는 것은 안전관리자들에 있어서 굉장히 고민되는 부분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일일안전일지에 써두기도 했고 하루에 몇십 장씩의 사진들을 그러모아 사진대지를 만들어놓기도 했는데 양이 방대해 결재자인 현장대리인이 꼼꼼하게 다 읽어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어떤 이는 현장대리인이 크게 노하며 그 부분은 삭제 후 다시 가져오라고 한다는 말도 들었다. 어쨌든 애로사항인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 꾸준히 방법을 강구해봐야하겠다.
그리고 근로자. 나는 대체로 근로자들의 편이다. 하지만 안전의식이 미흡한 근로자들은 퇴출밖에 방법이 없으나 중소규모의 현장의 경우 (때때로 대규모 현장에서도) 퇴출을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공사팀과 현장대리인이 그걸 막고 서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을 내보내면 공사가 더디다.가 그 이유다.
교육을 안 했냐고?
이번 한 번뿐이냐고?
패트롤 점검 돌면서 얘기 안 해줬냐고?
안전모나 안전대 등 개인보호구 지급 안 했냐고?
소화기나 불티방지망이 없냐고?
아쉽게도 전부 아니다.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정확히는 위험불감증이다. 불감하다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안전이 아닌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현주소다. 신규채용교육, 공정에 따라서는 특별교육, 정기교육, 수시교육을 진행했고 개인보호구 지급도 전부 해주었으며 패트롤 점검 돌면서 몇 번씩이나 말하고 몇 분 후 다시 오면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돌이표가 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비단 근로자들을 처벌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 책임 외에도 근로자들의 안전의식이 미흡하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다른 대안법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또 가장 크게는 관리감독자 역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관리감독자는 대부분 공사 팀원을 일컫고 직접적으로 현장을 총괄하고 지휘하는 역할은 그들인데 그들에게는 책임이라는 것이 없다보니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안전보건총괄책임자(현장대리인)의 역량으로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은 회사의 이윤 때문에라도 공사가 먼저일 수밖에 없다. 안전은 사업주만의 책임을 강화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는 안전보건총괄책임자, 안전관리자, 관리감독자, 근로자 각자의 책임과 안전의식 속에서 비로소 바로 설 수 있고 지켜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가장 최근에 산업안전보건관리비를 공사비로 돌리자는 말이 나왔다. 안전을 하려니 돈이 없다. 라고들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산업안전보건관리비는 공사 금액에서 요율로 따지는 것이다 보니 정말 많이 써야 하는 현장에는 부족하고 덜 써도 되는 현장에는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보니 이런 식의 돌려막기를 안전관리자에게 종용한다.
이런저런 일이 많이 겹치면서 자기 계발과 에세이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 책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적을 만들지 말고 적당히 타협해라.
처음에는 다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자책감을 많이 느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안 되는 것을.
실제로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지금의 안전관리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 채로 울며 겨자 먹기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나처럼 목소리를 내는 순간,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들어야하기 때문에.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수혜를 보는 것이 안전관리자라면 피해를 입는 쪽도 안전관리자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것이 안전관리자라면 안전관리자라는 직업은 없어지는 것이 맞다. 안전관리자는 재해가 일어났을 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방패막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내 자리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을지 잘 모르겠기에 나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계획한다. 올바르지 못한 사회에서 내 신념을 지켜간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미처 모르고 덤벼들었다. 어쩐지 긴 휴지기가 될 것 같다.
오늘도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