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여섯 시, 일기를 씁니다
박선희 지음 / 나무발전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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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잘 일기를 밀리곤 한다. 밀린다는 표현을 한다는 것은 내 일기의 내용이 내가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데 그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기장에 내 생각을 적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하루의 일기를 쓰는 칸이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머리가 복잡하거나 생각할 거리가 있어 쓰는 글들은 일기장에 적지 않고 다른 수첩을 꺼내게 될 때가 많았기에 일기가 일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22년부터는 만년 다이어리를 쓰면 괜찮겠지? 싶어서 주문해서 잘 쓰고 있기는 한데... 아뿔싸, 그렇게 생각들을 모아 모아 쓰다 보니 11월 중순부터 종이가 없어 기록조차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하하; 이 당황스러움은 어디에서 채워야 할까.



나의 경우에는 일기를 쓰는 것에 힘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그날 무엇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하는 단순한 기록장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떤 하루를 살아있었다는 방증들이 일기장에 고스란히 빼곡 쓰여있다. 그렇게 열심히 쓰다 보니 2011년부터 일기를 써서 10권이 넘는 일기장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딱히 보게 되는 일기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일기장을 없애버릴까 하다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실패했고, 또 앞으로는 일기장을 사지 말까 하다가 아니 그럼 내 하루들은 어떻게 기록을 하지? 싶은 마음이 들어 내키지가 않는 것이다. 도대체 뭘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기를 쓴다는 제목을 보게 되었고 나는 당황했다. 내가 아는 일기와 사전적의 일기는 동의어였다.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ㅡ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활동하지 않은 아침 여섯 시에? 다른 것도 아닌 일기를 쓴다고?’ 라는 것이 나를 당황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나도 2018년에 시시때때로 무언가를 적었다. 시간을 정해두고 쓴 것은 아니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생각이 들 때마다 노트를 펼쳐 그때의 감정들을 적어내려가곤 했다. 그것은 일기라기보다 ‘생각노트’에 불과했지만 단순한 일기장보다 생각노트가 더 의미 있다는 생각도 하기는 하지만 생각노트를 쓰려면 많이 귀찮고 피곤하기 때문에(...) 비연속적으로 쓰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나저나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이라는 것을 가동하려면 우선 활동을 해서 몸이 따듯하게 데워져야 하는데 저자는 아침 여섯 시에 어떤 내용을 썼을까 궁금해져서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 하고 가볍게 책장을 넘겼다.


저자가 스스로 정체성을 찾고자 했을 때 하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나는 어떤 글을 제대로 써보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한 핑계는 길든 짧든 글을 시작하는 것이 늘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친구가 “그냥 써. 아무거나. 내가 답장해 줄게.”라고 말을 한다면 나도 용기를 내볼 수 있었을 것도 같다. 저자도 친구의 말에 용기를 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일기(日記)라기보다 수필에 가까워 보였고 이질감 없이 읽기는 했는데 한편으로는 웃음이 났다. 나도 이런 글을 써본 적이 있다는 동질감과 더불어 나의 경우에는 밤에 쓰는 일기에는 이런 힘이 거의 없다는 점에 있었다. 왜냐하면 밤에는 잠을 자기 직전이라서 얼른 쓰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매일매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쓰는 것이 진정한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읽으면서, 저자는 글을 쓰고 싶은 시간을 잘 잡아서 썼네. 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또 글은 평온해보이고 담담하지만 내면에 깊이 출렁거리고 있는 슬픔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도 함께 들었다. 저자는 그게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으니까. 슬플 때 쓰는 글들은 유난히 담담했고 덤덤해서 내가 괜찮아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했으니까.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에 있던 친구의 물음에는 내가 더 화가 났다. 만약 선택이 가능하다면 남편의 죽음을 겪지 않는 쪽을 고르지 않겠느냐고 묻다니. (저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뇌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런 물음을 했나. 나는, 타인의 슬픔을 물을 때 가감 없이 순진한 얼굴로 상처를 헤집는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었다. 같은 이유로 나는 2년 전에, 여러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내게 묻고 결정적으로 ‘그러고 나면 그곳이 더 깨끗해져서 더 잘 들어선... 블라블라’라고 말하는 20년 지기 친구와 결별했다. 오랜 친구였고 마음을 나눠왔기에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당시에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 상처를 꺼내 보일 수는 있지만, 누군가 내 상처를 단순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으로 헤집어놓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다는 것은 여전하다. 우리는 타인의 상처가 비록 내 것이 아닐지라도, 아니 내 것이 아니기에 조금 더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마지막 챕터를 보고 느꼈다.




이 책을 다 읽은 직후에 방 정리를 하다가 우연하게 생각노트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노트를 적어볼까 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내가 단단하게 서있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자주 무너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말과 행동이 다른(즉 언행불일치인)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전에는 이렇게 생각했다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는 다중인격 같은 나를 보고 싶지 않아서, 감정 기복이 심한 나를 제어할 수 없어서 등등의 이유들로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그 생각노트를 말이다. 요즘의 나는 생각이 넘쳐흐르는데 그 생각들을 굳이 글자를 조합하여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으니 굉장히 단순해지는데 그 느낌이 조금 낯설면서도 재미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생각들은 쓰지 않으면 휘발되고 만다. 그때의 나는 기록되지 않는다. 나를 기록하는 일은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다시 용기를 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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