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집 -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안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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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단어집을 만든 적이 있다. 나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글이 아닌, ‘있어 보이는’ 글을 쓰고 싶었던 때였다. 동의어 사전, 유의어 사전, 반의어 사전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나만의 단어집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로 조금 더 어렵고, 조금 더 낯선 단어들을 그러모아 작은 수첩에 꽉꽉 채워 넣었다. 그 언젠가 볼 때마다 내가 이 단어를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무용한 얼굴로 그 수첩을 바라봤고 그 이후에 나는 단어집을 만드는 일을 자연스레 그만두었다. 지금은 그 욕심이 없어졌느냐 물어오면,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 마음을 다할 만큼의 시간을 들여 글을 쓰지는 않기 때문.이라고까지 쓰다가, 시간을 어디에 그렇게 쓰길래 글을 쓸 시간도 없는 걸까 싶어서 공허한 마음을 내려둘 곳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단어 하나에도 인생의 주요점들을 하나씩 찍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풀어내는 것이 성가시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온 탓인가, 아니면 게을러진 탓인가. 타인에게 건넨 나의 이야기들이 흩어지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면 입을 다물게 되고 결국 반쯤 귀를 열어두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안락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과한 몰입감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게 된 책, <단어의 집>

단어생활자 안희연 시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자신의 파편들을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그 파편에는 파닥임과 반짝임, 그 마주침의 순간들을 가장 내밀한 방식으로 조각되어 있다. 나는 책의 중반쯤 이르자 시인의 이야기는, 아픔을 꾸역꾸역 눌러가며 쓴 글이구나 싶었다. 인생의 크고 작은 힘든 일을 안고 살다보니 언젠가부터 마음의 눈물 호수에 잔잔한 소용돌이가 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시인의 글들은 그저 읽어달라고 내게 정중하게 기대어옴을 느꼈다. 그랬기 때문에 단어와 나를 연관을 지으며 책을 읽기보다 오롯하게 시인의 단어들을 읽었다.

11월 11일, “가을도 없이 겨울이 왔네.”라고 말하던 S선생님의 말에 화가 불끈 난 적이 있다. 그게 왜 그렇게 화가 나는 것이냐는 J의 말에, 본인이 알아채지 못한 걸 가을 탓을 하잖아. 지금도 밖은 가을이라고.라고 대답했다. 나는 잊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를 선생님의 상황을. 내 안에 가을이 있어야 바깥의 가을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올해(2021) 가을은 길었고 넓었고 깊었다. 크게 힘든 일이 없었는데도 어쩐지 과분한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발코니에서 커피를 마실 때, 햇볕을 받으며 걸을 때, 벤치에 앉아있을 때 가을이 살금살금 곁에 와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이윽고 비가 내렸다. 올해는 가을이 자기 이제 갈 거라며 인사도 하고 가네. 하며 빙긋 웃었다. 겨울이 온 지금, 가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역시 그토록 다정한 가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에야, 비단 가을만 그런 것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단어들은 까꿍 하며 튀어나오고, 어떤 단어들은 토라져있고, 어떤 단어들은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고, 어떤 단어들은 숨죽여 울고 있다. 그 단어들 역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일 테니까.

우리 모두는 있었거나 지금 있거나 있어야 하거나 있을 삶들을 늘 지나친다. 하루하루가 쌓여 인생이 되고 삶이 된다지만 그 하루들이 바쁜 이들에게는 한가로이 나에 대해 사유할 시간조차 부담으로 다가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툭툭 튀어나오는 단어들에 나를 개입하면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위로하고, 다독여줄 수도 있다. 나도 몰랐던 나를 비로소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슬픔으로 박제된 어떤 단어에 충분한 위로를 한 뒤 그 자리에 시간을 주어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넣을 수도 있다. 그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단어에서 단어로 미끄러지는 도미노 놀이는 까다로운 작은 소망들을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고 비김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해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비록 내 손에 독일의 블라이기센 키트가 없더라도 82. 그 순간 무형의 삶은 깜빡, 하고 빛난다. 얘야, 삶이란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에 잡히기도 한단다. 지금 여기 네 손안에 분명하게 들려 있잖니, 하고.

_책 속의 문장

72.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 전에, 그 우주의 섭리와 질서를 인정하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인간 종에 대한 환멸이 커져갈수록 내가 미지라 여겼던 세상에 더욱더 관심을 쏟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도 고민하게 된다. 얼굴을 가진, 무엇보다 두 ‘눈’을 가진 존재들과 눈 맞추는 일. 그건 나를 흔들고 부수는 과정이다. 확고부동하게 여겨졌던 나,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나를 텅 비우는 과정이다.

89. 썩게 하는 힘. 감정이든 시간이든 썩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마음들은 바로 그 순간에만 말이 된다.

119. 기억이란, 시간이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홀로였던 순간의 추위는 영원에 가까운 상흔이다. 가시처럼 박힌 기억은 수시로 따끔거리며 제 존재를 증명하려 들 것이다.

126. 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생각될 때에도 당신과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끝끝내 반짝이는 세계, 당신의 빈야드가.

135. 그 어떤 타인의 삶도 함부로 측량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잣대는 세상에 없다.

151. 변해서 슬픈 이유는 다름아닌 그것이다. 응전할 힘이, 무기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

168. 존재가 깃털 같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럴 때 인간은 아주 작은 입김에도 날아갈 수 있다.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가버린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당신의 누름돌, 당신의 한 점이 되어줄 수는 없을까.

178. “그건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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