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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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을 느낄 때 무작정 마시는 물이 해갈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진즉에 깨달았지만, 여전히 나는 그것만이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다며 꿀꺽꿀꺽 마시다가 급체를 하고 만다. 몸이 고장 나고 먹지도 못하고 앓아누워야 아, 내가 미련했구나 새삼 깨달으며, 정신을 차릴 즈음에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목구멍으로 음식을 넣기 시작한다. 음식물이 통과되는 지점들을 톡톡, 느낀다. 나, 이제 괜찮겠구나. 안도의 숨이 폐에서부터 깊숙이 자연히 나온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박완서 선생이 남긴 660여 편의 산문집 중 35편을 엄선하여 엮은 책으로, 그의 산문집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 나도 책이 나오기 전부터 달뜬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어느 여성의, 어느 자식의, 어느 엄마의, 어느 한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잔잔한 호수에 떠 있다. 그 호수에 내 손이 작게라도 동그란 파장을 일으킬까 여간 조심조심한 것이 아니다.



 


 

13. 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145. 매일 봐도 즐거운 것은 매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즐거운 일이 생기지는 않지만, 곁에 있는 매일의 즐거움을 알아차리려 노력하는 삶을 산다. 그 즐거움으로 인해 하루가 반짝거린다. 그게 사소하고 시시한 일일지라도. 한동안은 이 책을 읽으며 순간의 정갈한 행복을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장 평화로운 시간, 평온한 시간, 나의 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은 지독하게 매섭던 추위에 마음을 녹이고 데우는데 충분했다. 온기로 가득 찬 마음은 어떤 추위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글들을, 정확히는 그의 마음의 생각의 선하고 고운 것들을 손으로 꾹꾹 짚어가며 곁에 두고 싶었다. 타인이 바라본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는 소박한 웃음을 짓게 하는 낯설지만 낯익은 그리움을 자아냈다.


 


 


 

24.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움으로 점철되었지만 믿음이 일상의 바탕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내가 미워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힘들게, 애써, 그들의 안녕을 바랐다. 정말로 그들의 안녕을 바라서라기보다는 나의 안녕을 바라는 일의 첫걸음이라고 생각되었으니까. 미워했던 마음을 철회하거나 반성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미움을 종결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으므로. 그들을 믿었기에 그 믿음만큼 미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생각해 보기도 하며.


 


 


 

128.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왜 나한테 그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마음을 내내 품고 살았는데, 이 문장을 보고 조금은 욱했다가 수그러졌다.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의 일일뿐이라던 모 씨의 말도 이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다. 좋은 일에 축하해 줄 수 있는 인간이 되기보다 내가 알 수 없는 타인의 아픔과 슬픔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지, 오늘도 생각한다.


 


 


 

256.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산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어쩐지, 마음속 깊은 골짜기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환청에 마음을 빼앗겨 한 문장만을 읽고 시간을 보낸 날이 있었다. 주위의 자잘한 소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의 이유가 당시 내가 하고 있던 귀마개가 두꺼워서가 아니라 얼어서 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 언젠가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가고 있는가 보다, 했던 때가 있었다.


 


 


 

221.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그렇다, 그랬지. 이전에 그의 글들을 읽고 참 소녀 같다, 생각했었지.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 찾아봤더니 당시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었네. 집에 있는 다른 책들을 뒤적여봐야지.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그의 글을 자주 찾고 싶다.

...아니, 그래서 남영역에서 지인분을 만났는지, 아니면 댁에 가셨는지, 댁으로 가셨다면 어떻게 가셨는지(p123), 나는 그게 궁금하단 말이지

이야기를 그렇게 끝내버리면 나는 궁금해서 어쩌지요, 선생님.


 


 


 

27. 올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올겨울은 지난겨울보다는 더 추울 것 같다. 따듯한 봄이 올 거라고 기대했으나, 기대처럼 되지 않을 것 같다는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따듯하지 않은 봄이 오더라도 우리는 그 계절을 살아갈 테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 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계절을 담뿍 느꼈으면 한다. 또다시 오는 계절일지라도, 우리가 통과하는 계절은 지금 이 순간뿐이기에.


 


 


 


 


 


 


 

책 속 밑줄


 

26.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32. 나이를 먹고 세상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92. ‘넉넉하다’는 후덕한 우리말이 사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부자가 늘어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


 

110. 새벽의 잔디를 깎고 있으면 기막히게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건 향기가 아니다. 대기에 인간의 숨결이 섞이기 전, 아니면 미처 미치지 못한 그 오지의 순결한 냄새다.


 

139. 현재의 인간관계에서뿐 아니라 지나간 날의 추억 중에서도 사랑받은 기억처럼 오래가고 우리를 살맛 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247.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 아닐까.


 

264.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만약 인간이 안 죽게 창조됐다고 가정하면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인간으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창조적인 노력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자식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면 사랑의 기쁨인들 있었으랴. 추醜가 없으면 미美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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