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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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사라지고 질서는 무너졌다.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던 날들.

‘내’가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는데 정부라는 게, 나라라는 게, 질서라는 게, 예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하다못해 애도할 수 있는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날들의 향연.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도리가 사는 한국에도, 내가 사는 한국에도.

전염병이 이렇게 오래갈 수 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그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내가 사는 곳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달팽이 신세가 되지 않아도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 건지, 숨을 천천히 내뱉는다.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났으나 떠나서도 방향을 몰랐고, 방향은 몰랐으나 쉼 없이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으며, 농담과 웃음을 고향에 버리고 왔지만 사랑은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은 비단 미소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으니까.

97. 세상이 지옥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하려 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악마야. 함께 있어야 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로를 보고 만지고 노래하며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많은 지옥이 있어서, 우리는 그 지옥을 통과할 때 곁에 있는 이의 손을 잡아야 한다. 2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미 내 앞에 벌어졌잖아. 그러니까 손을 잡아. 지옥을 함께 겪었다면, 그렇게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아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람일 수 있었다면, 손이 내내 따뜻할 수 있었다면.

23. 희망은 내가 움직여야 닿을 수 있는 대륙이 아니라 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가 태양을 돌다 보면 나타나는 밝고 따뜻한 계절.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서 그 계절을 맞이하는 것뿐인지도.

문장을 읽고선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 눈동자를 잡아두려고 묶었던 실이 툭, 하고 풀리는 느낌.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런 계절을 나는 기다리고 있던 중이니까. 누구에게는 따뜻한 봄이, 내게는 무척이나 추웠으니까. 내 지구는 계속해서 돌고 있는 중이겠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지나에게 립스틱을 선물해 준 도리에게, 그 립스틱을 받아 그 자리에서 예쁘게 칠한 지나에게, 언니가 잠에서 깨어나면 사랑한다고 약속하겠다던 미소에게, 1년 내내 따뜻한 바다에 가고 싶은 건지에게, 그 계절이 도래했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도래하지 못했다고 대답해버리면 울어버릴 것 같으니까.

37. 난 더더욱 불행을 닮아 가고 싶지 않았다. 삶을 업신여기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나 삶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어떤 잘못이나 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55.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131. 나는 아주 고요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좋은 것을 지킬 것이다. 좋은 것은 소중한 것. 내 중심에 있는 이것.

나를 홀대하지 말아야지, 나를 억압하지 말아야지, 나를 탓하지 말아야지, 나를, 나를, 나를.

세상의 많은 불행들 속에 나까지 나를 밀어 넣는 건 너무 잔혹한 일이니까.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작은 내가 세상을 좀 더 보드랍게 살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지.

17. 죽는 순간 나는 미소에게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을 부탁할 것이다. 내 사랑을 부탁받은 미소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

내가 사는 곳에 전염병이 최고조로 돌던 그때에, 나는 참 당연하지만 큰 것을 바랐다.

전염병이 사라지기를,

네가 무사하기를,

내가 무사하기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당신도 무사하기를,

그렇게 우리 모두가 무사하기를.

전염병은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는 아무도 무사할 수 없었으나,

또 그렇게 무사했다.

안녕이라고 물을 수 있었고,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안녕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으니.

마지막에 내가 너에게 준 것은, 오직 사랑이었기를 바라면서.

내 욕심인 것을 알지만, 너도 느꼈을 거라 믿으면서.

입에 모래를 한 움큼 집어넣은 까슬거림이, 그 모래를 씹을 때의 털썩거리는 치아들의 반항들이 오래 남던 책이었다.

도리의, 미소의, 지나의, 건지의 사랑 앞에서 내가 왜 이렇게까지 비참해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아서.

처참한 형벌에서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이 역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나의 죄목을,

보이지 않게 손으로 가려주고, 조용하게 누그러뜨리고, 그런 나의 등을 한없이 다정하게 쓸어내려주어서.

24. 우리는 어디로 가?

우리는…… 여름을 찾아서.

여름은 어디 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켰다.

저기, 가 지는 곳에.

현재 전염병은 일상에 녹아내리고 있고, 우리는 그것과 타협하며 어울려야겠지.

내가 어디까지 전염병 네 녀석과 타협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복종하거나 굴복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세상의 전염병은 오직 사랑,말고는 없었으면 한다.

<책 속 밑줄>

21.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도 약간의 우울감은 살 냄새처럼 배어 지워지지 않았고, 나와 세상 사이에는 늘 안개가 끼어 있어 어떤 질문에도 흐리멍덩한 대답만 간신히 뱉어 내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눈과 비를 막아주는 천장과 차갑지 않은 바닥이 있었다.

22. 고요하게 담담하게 각자의 인생을 삭감해 나갔을 것이다.

23. 희망은 시간처럼 머무르지 않고 오고 가는 것.

38. 아니면 누나도 나랑 같이 갈래?

건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전에 본 적 없는 결연함. 꿈을 꾼다는 것. 그 꿈을 나눈다는 것. 건지에게 꿈이란 전에 닿아본 적 없는 새것, 실패해 본 적 없어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을 수 있는 첫사랑 같은 것이었다. 폐허가 된 세상의 따뜻한 바다를 상상해봤다. 기나긴 교향곡이 끝난 뒤 오래 맴도는 적막처럼 어쩐지 공허하고 서글퍼졌다.

44. 엄마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고, 아름다웠고, 아름다움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46. 눈앞의 추위와 황폐만이 현실이고 그것이 바로 이 세계 전부인 듯했다. 우리보다 앞서 떠난 이들은 영영 멀어졌고 돌아오는 자는 없었다.

미리 다짐해야 했다.

이들과 언제까지 함께 다닐 것인지.

48. 분명 겪은 일인데 지난 일 같지 않다. 미래 같다. 앞으로 수없이 겪게 될 일 같다.

50. 노란 전구를 달아 놓은 탑차 안에서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앉아 지나의 손을 잡고 있으면, 지나의 숨소리와 몸에서 전해지는 작은 진동에 집중하다 보면 서서히 현실감이 사라지고 과거가 지워졌다. 순간만 존재했다.

55.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이번이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럼 감자 한 알을 먹더라도 제대로 먹고 싶어지니까.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한 끼 한 끼가 소중하다면,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56. 가장 큰 불행은 내게서 늘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고 나는 정신병자처럼 그것을 내내 주시하고 있을 뿐. 그러다 홀로 골똘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그것을 주시하고 있는가. 불행을 부르는 주문을 외우듯, 마치 그것에 익숙해지려는 사람처럼. 하지만 보지 않으려고 해도 그것은 너무 가까이 있다.

57. 제 이름을 부르면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나. 그 눈을 볼 때마다 나의 눈빛이 궁금했다. 나는 어떤 눈빛으로 너를 바라볼까. 어떤 눈빛이기에 너는 나를 보고 미소 지을까.

81. ……그러니까.

………….

넌 죽지 마.

………….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같이 견뎌야 돼.

같이 어떻게.

우리가 함께 있으면 그럴 수 있어.

82.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 같은 건 없어.

100.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101. 살아 있는 순간에 집중해야 했다. 나중 일은 나중에 맡겼어야 했다.

103.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았다.

고독 같은 것. 같잖고 우스워 갖다 버리려 해도 검은 옷에 들러붙은 하얀 먼지처럼 자꾸 따라와 날 성가시게 하는 지독한 감정. 무섭다 못해 지겨웠다. 너무 들러붙어 내가 곧 그것 같았다.

116. 살아남은 것을 기적이 아닌 감내할 일로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138. 기억은 사라지고 감정은 무뎌졌다. 지난 일 모두 꿈만 같고 현재도 현실 같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내가 사람 같지도 않았다.

156. 난 언니를 혼자 두지 않아.

언니는 날 혼자 두지 않아.

언니가 잠에서 깨면 약속할 거야.

사랑한다고 약속할 거야.

171. 가장 먼 길을 지난하게 지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때에야 비로소 거기 있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기적을 만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멀어지며 그것을 갈구할 수는 없다.

182. 경험과 깨달음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189. 우리…… 만날 수 있을까?

…… 기억하고 바란다면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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