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감정 정리법 - 고민과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이유라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기 계발서에 손을 잘 대지 않는 편이지만 최근 1년만 하더라도 자기 계발서를 내내 읽었다. 결핍과 불안과 우울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던 시기들이 있었다. 그 시기를 완전히 통과했다면 거짓말이고, 나는 그 시기를 여전히 지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나 감정이 들쭉날쭉하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감정의 기복이 있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정에 솔직해서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지 않는 때에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하지만, 고여있는 감정은 이로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여있는 감정은 언젠가 예기치 않게 탁! 튀거나 혹은 그대로 잠식시켜버리니까. 나는 내가 내 감정을 그대로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어 해결책을 찾아 끌어올리려고 한다. 어떤 이는 그대로 둔다고 하지만, 나한테는 그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한테뿐만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있는 타인(가장 가까이는 배우자)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나는 내가 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가끔은 자기 계발서를 찾아 읽을 때가 종종 있다. 전에는 나를 혼내거나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책은 읽지 않겠다, 라는 마인드로 읽지도 않으려고 했는데 그에 비하면 큰 발전이다. 이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 나에게 나쁜 감정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가 너무 많아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현재 평온한 상태에서 그런 감정들을 굳이 꺼내어볼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꽤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일 수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품고 있던 의구심들을 여지없이 꺼내놓은 느낌.

이것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었다면, 나는 아니라고 부정했을 게 분명하지만,

이건 책이잖아. 굳이 공감하지 않아도 되잖아. 묵인해도 되잖아. 라고 나를 다독이며 이 책을 읽었다.

물론 이 서평에서는 완벽하게 솔직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1.

나는 매 순간 고민과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이다. 예민하다면 예민한 사람이고, 민감하다면 민감한 사람이며, 섬세한 사람이라면 섬세한 사람이다. 그 성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타고난 성격이기에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에 대해 책에서는 불안이 없는 사람은 매사를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은 사물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할 때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난 완벽한 사람은 아니고 완벽에 가까워질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완벽한 것들을 좋아한다. 충동적인 것과 계획된 것 중 고르라면, 나는 계획된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충동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불안이 인다. 조금 더 넓게는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안인데, 내가 하고자 하는 행동까지 불안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2.

18. 우리가 우울한 진짜 이유는 사실 무의식 속에서 움직이는 '마음의 습관' 때문이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21. 우리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이 부분은 2017년에 사이버대학에서 교양 과목으로 <행복학> 강의에서도 언급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이게 잘 되냐, 말이다. 나는 잘 안되던데. 몇 년 전의 나는 우울하다든지 짜증난다든지 하는 말들을 습관처럼 썼었는데 지금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쓰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단어들이다.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 정말 그렇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대신에 마음이 좋지 않다거나 화가 난다는 단어로 대체하곤 했는데, 요즘은 화가 난다는 말도 별로 쓰고 싶지가 않아졌다.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것 자체에는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동차끼리 가벼운 사고가 나거나, 누군가 나를 밀어 넘어져서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다거나 하는 등등. 하지만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내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사람들의 태도와 말'에 있었다. 그것은 '나 같으면 그러지 않을 텐데'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었고, 그렇기에 사람들이 내게 무례한 행동을 했을 때 참을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3.

25. 짜증을 잘 내는 사람들은 대개 타인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다.

나는 가장 가까운 나의 배우자에게 감정의 민낯을 보인다. 조금만 서운해도 입이 삐쭉거리고 '나 말 안 해'를 선보인다. 어린 애 같지만, 여전히 그렇다. 내가 그에게 기대가 높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 기대치를 조금은 낮출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낮추고 싶지 않은 것들의 충돌을 가만히 지켜본다. 내가 그 기대치를 낮추지 않는 것 중 하나 역시, '나는 그러지 않잖아.'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나는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걸까? 도대체가 모르겠다. 내가 나를 모르면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은 해답을 찾았고, 배우자에게 이 부분에 대해 쩌렁쩌렁 읽어주며 합리화를 했다.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해서 '틀림없이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 그러나 상대가 염려하고 알아줄 거라고 서로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관계라는 뜻이기도 하다.라고.나의 배우자는 이해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노이해'일테지만(왜냐하면 본인은 나에게 그러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최대한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이해해주려는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정도를 지나치면 윽박지르거나 함께 짜증을 내지 않고 왜 그러는지에 대해 물어봐 주는 사람이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안 되겠지.

4.

#자신감이 없으면 상대의 조언을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느낀다.

조언을 '이기고 지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반발하게 된다.

충고나 조언을 들으면 자기 자식을 부정당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반발심이 든 까닭은 '무시당할까 봐 두려운 마음'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나는 조언을 잘 새겨들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내게 조언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언을 가장한 충고로써 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섞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기준에 조언이나 충고를 하려면 그 사람을 정말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눈에 거슬려서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이 사람만을 위해서 말해줄 수 있을 때라야 그것도 상대방이 조언이나 충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것.

나는 나의 배우자와 서로 조언을 주고받을 때가 있다. 그것의 대부분은 직장문제가 되는데, 그는 내가 하는 말들을 가만히 잘 듣고 난 다음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게 관여를 하려고 든다는 점이다. 그건 조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강요일 뿐인데. 그러면 그는 내게 "이 부분에 대한 조언은 고맙지만 그 결정은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끊어준다.

반면에 나는 그가 나에게 조언을 하면, 매번은 아니지만 가끔은 반발심이 든다.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그는 내게 말한다. "여보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싸우자는 게 아니야." (...) 아... 쓰다 보니 나는 너무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인 것 같다.

5.

자기 혐오는 자기를 미워하는 마음은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 향상심에서 비롯한다.

이건 여담이지만, 나는 혐오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얼마나 미워하고 싫어해야 혐오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근 1년 동안 타인도 미워하고 나도 미워하며 지냈다. (1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는 참 많은 것을 준 시간인가 보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던가?부터 시작해서 면면이 나를 유심하게 관찰하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 가치를 둔 시간을 부러 보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안다고 하여 생활이 바뀌거나 습관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를 알아가는 것이 즐거우면서도 곤혹스러웠다. 부정적인 것들을 마주할 때면 내가 부족해 보였고, 빈곤하게만 느껴졌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넘어지고 깨어지고 다시 넘어지고 깨어진다.

책에서는 보람 있는 삶을 추구하고 적당히 흘러가는 삶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싫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도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누가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시간들을 분 단위로 나누어 지내는 생활들을 혼자서 즐기기도 했었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일들에 대하여 '시간이 아깝다'라는 생각을 해왔으니까. 그 시간 동안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압적으로 하며 살았으니까.

나는 내가 미워지고 싫어지는 순간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럴 때마다 다독여야지.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라고. 너무 나를 미워할 필요는 없다고. (특히 오늘부터 배우게 될 수영에서도 나는 내가 이 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6.

"대리님은 너무 어려워요. 저희한테 마음을 안 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내가 작년 이맘때 즈음 밑에 직원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다. 처음에 그 직원이 내게 했던 호칭이 아직도 생각난다. '언니' 언니라고? 회사에서 언니라니. 직원이 적다면 적은 사무실이었지만 나름대로 부서가 나누어진 곳에서 쉽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은 아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나는 꼰대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나랑 동갑이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아니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도 편한데, 그 친구들이 나를 불편해한다. 그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한 가지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하다. 내가 20대 사원일 적에 위 사수가 40대 실장님이셨는데 존대를 해주셨었다. 나는 그게 좋았고, 어디서든 나보다 나이가 어려도 존중의 표시로 존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고. 그런데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말 놓으세요.'라는데, 나는 그게 잘 안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벽이 느껴진다고 표현을 했다. 나는 절대로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먼저 말을 편하게 해도 되냐고 묻기 전까지는 '말 편하게 하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별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고, 말을 편하게 하며 생기는 불편함을 최대한 줄이고 싶다. 그때는 내가 사교성이 없나, (아, 나는 낯가림도 심하고 사교성이 뛰어나기는커녕 사교성이라는 게 1도 없다), 사회성이 부족한가(뭐 틀린 말도 아니다), 등등의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냥 나랑 좀 안 맞는 사람이구나 한다.

그것을 책에서는 너무 조심해서 심리적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 경우라고 했다. '공손한 태도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도 없고 어려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는데, 나는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망아지 같은데... 나참내...

7.

읽으면서 내내 나한테 참 좋은 책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왔다. 나는 근 한 달 동안 정체성에 혼란이 좀 왔었다. 이걸 내보이기에 좀 우스운데, 이곳이 아니면 어디에 말할까 싶어 말해본다. 또 이건 서평이니까 누가 그렇게 많이 읽으려나 싶은 마음에.

내가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온라인으로는 블로그, 인스타, 성격이 다른 단체 카톡 두어 개, 성격이 다른 몇 개의 카페(잘 안 하지만..)가 있을 것 같고 오프라인으로는 회사, 독서모임, 피아노, 이전에는 꽃꽂이가 있었다. 오늘부터는 수영이 있을 테고. 뭐 암튼 그런데, 왜 내 모습이 다르지? 싶은 거다.

온라인/오프라인 통틀어 내 모습을 한꺼번에 다 보여줄 수 있는 곳은 배우자이고, 그리고 80% 이상은 내 모습을 보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블로그다. 나머지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단편적인 모습밖에 볼 수가 없다. 인스타는 사진 한 장 띡 올리고 그것에 대해서만 알 수 있고, 단체 카톡도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나를 모를 테고, 카페 역시 마찬가지고, 회사, 독서모임, 피아노, 꽃꽂이, 수영 모두 나에 대해 단편적인 것밖에 모를 테지.

그런데 부분적인 사람들과 하나가 아닌 둘셋의 네트워크를 공유하다 보니, 내가 그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 역시 공유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는 꽤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블로그에는 아무렇지 않게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고 망아지처럼 뛰노는 것들을 다른 곳에 올리려니까, 이게 허세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블로그에 올리면서 허세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질 않았는데... 괜히 이상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대체 나는 누구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게 온라인상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어떤 모임에 나갔을 때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내 태도 역시 바뀌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 때 나 다중인격 아니야!?!?!??!하고 진지해졌다가 심각해졌다. 그래서 언젠가 배우자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인스타는 글보다 사진이 우선적으로 원래 허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어서 나는 기능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블로그 좀 해. 가 그의 결론이었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다. (서로 마음이 맞아 그쪽에도 관심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꽃꽂이에 가서 재테크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재테크 모임에 가서 피아노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피아노 치러 가서 피아노 선생님한테 회사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수영을 가서 뜬금없이 남편 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나는 오래된 내 친구들과도 책 얘기를 안 한다. 그냥 책을 읽는다 정도지, 내가 이 책을 읽었는데 이 부분에 무슨 얘기가 있고 이런 걸 느꼈어~ 이런 대화? 안 된다. 친구들이 뭔가 내 대답을 필요로 할 때, 어느 책을 보니 이렇다고 하더라. 이런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정도는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꽃은 이름이 뭐고 뭔데 어쩌고~ 그냥 "우와! 이 꽃 예쁘다!" (ㅋㅋㅋㅋ) 걔네들은 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서로의 관심사가 교집합되는 것을 좀 더 극대화시켜서 이야기를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런데 책에서 이 부분이 나온 것이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모르겠다며, 내가 다중인격이 아닌가 싶어서 불안하다는 사람이 있다고. 이 부분에 대해 책에서는 말했다.  상대방에 맞추어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적응적인 태도'라고!

오히려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어요.'라는 사람이 무서운 거라고 했다. 실제로 티비에서도 그렇지 않나.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말을 할 때, 정말 순~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몇 년 전 배우자와 같은 곳에서 일하던 어떤 사람은 정말 착실하고 능력이 좋아서 모두가 다 인정할 정도였는데, 성(姓)과 관련된 문제로 좌천당했다. 결과는 무죄로 나왔지만, 아내와 아이가 있는 상태에서 같은 직업을 가진 여성과 불륜이 났다는 것은 무죄로도 감출 수 없지. 그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였다. 이런 사례는 굉장히 많지만, 어쨌든 그게 무서운 거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면적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한다. (합리화하는 방법도 가지가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이 좋을 거다, 별로일 거다, 그런 말은 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내가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나 부정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기는 했으나, 나중에 가면 이 책이 뭐야~ 너무 당연한 말만 해놨잖아? 라면서 옆으로 슬그머니 밀어둘 수도 있으니까. 2019년 지금의 나에겐 참 괜찮았던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