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 쓰여있는 이 문장이 이 책 내용의 전부다. 눈사람이 된 여자. 그것도 갑작스럽게. 雪.

눈사람이 되었다는 건 어떤 상태를 뜻하는 말일까. 정말 내가 생각하는 동글동글한 눈사람이 되었다는 건가, 아니면 단박에 보아도 눈사람임을 알아챌 수는 있지만 거부감이 없는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다는 건가. 어떤 형태이든 그녀는 꽤나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의 담담함이 나는 슬펐다. 어떻게 저렇게 차분할 수가 있지. 언젠가 눈사람이 될 줄 알았다는 듯이, 혹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눈사람이라고 했을 때, 까불랑 거리는 올라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슬픈 눈사람일 줄은 몰랐다.


 

 

 

17. 이게 혹시 마지막인가.

그녀는 문득 의문했고, 살아오는 동안 두어 차례 같은 의문을 가졌던 순간들을 기억했다. 그때마다 짐작이 비껴가곤 했는데, 기어이 오늘인가.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왜 이별이 아니고 작별일까 생각했다. 급기야 작별의 사전적 의미를 찾기에 이르렀는데,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이었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마 사전적 의미의 작별이 와닿지 않았을 터였다. 여자는 아들 윤을 거쳐 엄마, 아빠, 남동생을 지나 그리고 남자친구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작별이 가진 단어를 입에서 공글리며 오물거렸을 때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46. 내가 널 원망할 거라고 생각해왔을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네가 윤이와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매 순간을 난 명백히 이해했어. 자신을 건설하기 위해 가깝고 어두운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의 용기를. 정말이야,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어. 같은 방식으로 윤이가 나를 떠났다 해도 난 서슴없이 이해했을 거야. 다만 분명히 알 수 없는 건 이것뿐이야. 먼지투성이 창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니, 얼음 낀 더러운 물 아랠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작별을 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와 할 수 있을까 - 생각해보면 J씨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J씨는 첫 번째요, 엄마가 마지막이 될 거였다. 아마도,라고 말은 하지만 명백히, 그러할 것임을 안다. 엄마를 많이 미워했지만 생각처럼 많이 미워하지 못했다고, 사실 엄마를 미워한 만큼 엄마를 사랑하고도 싶었다고. 꼭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것을 그때 내려놓을 수 있겠지. 생의 끝에서는 하지 못할 것이 없을 테니까. ​

하지만 내게 작별할 시간이 주어질까. 나는 이 책을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로 여행을 간 글램핑장에서 아침에 읽었는데, 씻기 위해 비운 짧은 시간 동안에 J씨가 보고 싶어졌었다. 갑작스럽더라도 J씨에게만은 꼭 작별할 시간이 주어지면 참 좋겠다.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은 그이니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신 덕분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많이 행복했다고, 고마웠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다.

이 부분을 쓰다가 나는 차마 다 쓰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울다가 오늘도 근무인 그이의 전화를 받고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럼 뭐 해, 책에 대해 하려고 했던 말을 다 까먹었잖아...

 




43. 하지만 무서울 게 뭐야, 문득 소리 내어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늑골이 무너지고 옆구리가 부스러지면 어때, 뒤이어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좀 전보다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고통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지.

 

 

53.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일까, 그녀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과 귀와 입술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정수리부터 녹은 머리가, 눈 녹은 물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내리면? 심장부터 발끝까지 형상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이 층계참에 흥건한 물웅덩이만 남으면.
그냥 끝이야.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여 그녀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홀가분했다. 미치도록 후련했다. 아니, 억울했다. 이가 갈리게 분했다. 아니, 아무것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제발 더 생각을 해야 했다. 가능한 시간만큼, 조금만 더.

 

 

55. 무엇을 돌아보는지 알지 못한 채 사력을 다해, 그녀는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 부분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나는 오래도록 먹먹해진 가슴을 끌어안았다. 눈사람이 된 자신을 담담하게 표현할 때, 아, 마지막을 기다린 사람 같다. 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삶이란 그런 걸까. 언제라도 마지막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했으면서도, 다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는 것. ​홀가분함과 후련함과 억울함과 분함의 감정들이 뒤섞인 것, 그러면서도 후회하고 싶지 않은 것. 후회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후회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나도. 끝인 걸 알잖아. 잘 살았다고 끝내야지, 잘 살고 싶었어라고 끝내면 너무 슬프잖아.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엔 한강 특유의 힘이 강하지 않아서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독서노트를 통해 책을 정리하고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한 번 더 들여다보니 한심해서 웃음이 났다. 이렇게 좋았으면서. 왜 좋았던 것을 숨기고 있었나. 나는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지는 않았나. 때에 따라 변화했고 변화하고 변화하고 싶어하고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데, 나는 무슨 자격으로 꾸준함을 작가에게 들이댔나. 혹은 이 책을 서너 번 더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 걸까. 읽을 때마다 비슷하지만 새로운 느낌이다. 책장에 고이 꽂아두어야지.

 

 

PS1. 이 책을 읽고 나서 단편집 《노랑무늬영원》 속에 실려있는 <노랑무늬영원>이 읽고 싶어졌는데,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려읽었던 책이었네. 딱 그 단편만 다시 읽고 싶은데.

PS2. 나는 올라프를 본떠, 나는 벨라프야!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이 책의 여파로 나는 더 이상 내가 벨라프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눈사람이라니, 너무 슬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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