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쨌든,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라는 문장을 이 책의 서평 첫 머리에 꼭 쓰고 싶었다.



5년 사이에 거주지가 자주 바뀌었다. 대부분의 생을 대전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평택으로, 진주로, 대구로 오가는 동안 내가 느낀 결핍들은 때때로 나를 잠식시킨다. 이는 누군가와 비교해서 생기는 결핍이 아니라 내부의 모든 감정들이 충돌하여 일어난 결핍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나는 앞으로 남은 생의 20년 정도는 더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그러한 방법을 잘 모르고 있어서 여전히 힘이 든다고 자주 느낀다. 지난번에 겪어봤으니 이번엔 괜찮겠지, 지난번에 그만큼 힘들었으니까 이번에는 좀 덜 힘들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보기 좋게 예상과 빗나갔다. 그때는 그때라서 힘들었고, 지금은 지금이라서 힘들었다. 그때는 그때만큼 힘들었고, 지금은 지금만큼 힘이 든다. 그때도 많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는 곱절 힘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어딘가에 정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 적이 있었다. 여행 다니듯 삶을 살면 정말 좋겠다. 나는 여행하는 삶을 살아야지. 하지만 그런 마음은 항상 그곳에 정착하고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낯가림이 많은 사람이었고, 쉽게 마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게 문제일지도 몰랐다. 이사를 다니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결국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귀결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동안 내가 긍정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지 않아도 되네. 얼마만 더 이곳에 살면 되겠다. 하는 것들이었는데, 특히 지금이 그랬다. 뭘 해도 마음이 붕 떠있는 것 같은 나날들을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몇 년만 더 참으면 된다. 라는 생각이 아직도 나를 지배하고 있다. 처음보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우습지만, <이방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운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삶이 힘겨웠다고 말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한국에서 지역과 지역 사이를 오가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저들은 어떨까 - 하물며, 모국어가 아닌 그곳의 언어로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이야기할 수 있겠으며, 그렇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친구가 과연 생길까? 하는 것들에 눈이 시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라는 제목을 보고, 마음이 저렸다. 꼭 나를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전 회사에서 안건을 낼 때 “그 지역에서는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말로 시작된다거나, “OO씨가 사는 곳은~” “OO씨, 다음번엔 어디로 가요?” 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내내 주변인이었고,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 뼈가 있는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줄거리를 읽으며, 나는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하겠어 - 라는 강한 집착을 가지기도 했다. 내가 찾지 못한 숙제의 답을 간절하게 찾고 싶었던 심정의 나는, 여전히 한 마리의 어리고 여린 사슴이었다. 그러면서도 책을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




책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려있었다.

<히어 앤 데어> <동국> <라스트 북스토어> <천천히 초록> <로사의 연못> <분홍에 대하여> <압시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로드>


체류 기간 2년 동안 거주지를 정해야 하는 동희, 이제야 자신을 찾기 시작한 작은엄마 동국, 헌책방에서 판소리 LP판을 보고 반가워하는 ‘’, 무슨 연유에선지 우울증에 걸린 올케 연희(개인적으로는 안아주고 싶은 인물), 총성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 거의 매일 물 뿌리듯 비가 조금 오고 무지개가 자주 드는 신비한 곳의 검은 연못, 검은 물, 검은 흙 속에 살고 있는 듯한 부부, 마음에 쏙 드는 단어들을 속삭였던 남편과 헤어진 뒤에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로 도망치듯 온 세레나, 생부가 써놓은 ABCD가 이름이 된 압시드, ‘네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 몰라서 그래’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 둥지를 떠나 살다가 엄마의 집으로 향하는 삼 남매, 진, 범, 명




단편 중 좋지 않았던 단편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각기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의 단편을 두고서도 오래도록 생각할 수 있음이 실로 반갑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찾던 답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고 나를 쓰다듬어주거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을 그려낸 이야기를 보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책 뒤편에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보고, 울컥,한 마음을 삼키었다.



늘 그랬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떠나야 하는 나는, 그곳에서의 삶이 힘들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퇴색되고 급기야 미화되고 있는 것을 종종 느꼈다. 이제 익숙해졌으니까, 하는 마음이 더 컸던 탓도 있었다. 이제 살 만한데, 또다시 어디론가 가야 한다니 - 라는 생각만으로도 아득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마주치고 나면 그러한 마음들은 자주 힘을 잃어버렸다. 어느 지역에 잠시 임시로 거주한다는 생각을 언제나 가지고 있던 탓에 완전한 마음을 줄 수도 없었고, 나는 자주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나는 이번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어떤 것이라도 붙잡고 싶었으나 그런 노력들이 허공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급기야는 나는 이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결론까지 내는 상황까지 이르며 주말부부를 먼저 내뱉기도 했다. 그런 나를 잡아준 것은 J지만, 한편으로는 J 때문에…라는 원망과 미움이 커져가던 나날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제는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마음을 한 단계 내려놓고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면 그 여느 때보다 선명해지고 분명해진다.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내가 꿈꾸는 삶에 대하여. 그러면서 이러한 삶들은 결국, 내게 주어진 기회라고 여기게 된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책에서, 우리는 어떤 식이든지 세상을 떠도는 유목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부분에서 나는 이민을 간 사람과 역이민을 온 사람과 한국에서 사는 사람 모두 각자의 고충을 안고 있구나. 누구나 다 고립되어 있는, 소속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시간들을 보냈다. 익숙하다고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낯설다고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들을 내비쳤고, 극렬히 미워하는 시선들을 내리꽂았다. 일부도 전체로서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부라고 부른다는 그 말을, 그렇기 때문에 그게 전체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는 그 말을,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건에 대해 일부에게도 윤리적 책임이 따른다는 그 말을 나는 분명하게 지지하는 바이기에 여전히 내가 이곳에서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느낀 것들을 뒤엎기는 힘들겠지만, 조금은 나른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희는 문득 한국에 머문 지 어느덧 4개월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1년 8개월이 지나면 거소증이 만료된다는 사실도. 더 연장할 건지 떠날 건지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엇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가령 어느 천변이 걷기에 좋은지, 어느 밥집이 맛있는지, 어느 마트가 친절한지, 어느 미용실이 샴푸를 더 깔끔하게 하는지 같은 거였다. 이 도시가 점점 몸에 익어가는 것만 같았다. 동희는 제 몸 어딘가에서 잔뿌리들이 뻗어 나와 흙을 가르고 축축한 곳을 찾아 스스로 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본능처럼 익숙한 곳은 감지하고 저 홀로 뻗어 나갔다. 그러니 동희는 아무 일도 한 게 없었다.

동희의 이야기를 읽으며 왈칵 자주 눈물을 쏟았던, 한국도 미국도 아닌 서 있는 곳이 그녀가 존재하는 곳이며,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더라는 그 말들을, 나는 오래도록 사슴이 풀을 되새김질하듯 이곳에서의 삶이 힘겨워질 때마다 반추하게 될, 귀중한 지표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한 마리의 어리고 여린 사슴이다.





 




<히어 앤 데어>

 

21. 지하로 내려오면 방향 감각을 잃었다.


30.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더라고. 체류 기간 2년 동안 잘 생각해봐요.”

33. 모든 것이 흐릿한 가운데 그녀의 의식만이 분명했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현재 서 있는 곳이 그녀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34. 동희는 문득 한국에 머문 지 어느덧 4개월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1년 8개월이 지나면 거소증이 만료된다는 사실도. 더 연장할 건지 떠날 건지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가령 어느 천변이 걷기에 좋은지, 어느 밥집이 맛있는지, 어느 마트가 친절한지, 어느 미용실이 샴푸를 더 깔끔하게 하는지 같은 거였다. 이 도시가 점점 몸에 익어가는 것만 같았다. 동희는 제 몸 어딘가에서 잔뿌리들이 뻗어 나와 흙을 가르고 축축한 곳을 찾아 스스로 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본능처럼 익숙한 곳은 감지하고 저 홀로 뻗어 나갔다. 그러니 동희는 아무 일도 한 게 없었다.


 

 

<라스트 북스토어>


79. 우리는 어떤 식이든지 세상을 떠도는 유목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이민자가 나이거나, 내 동생이거나, 내 엄마이거나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천천히 초록>


101. “나를 떠올리면 그림의 한 부분이 지워지거나 뭉개져 있는 느낌이 들어. 시간의 한 부분이 뭉텅뭉텅 잘려나간 느낌이 든다고. 그런 기분 모르지? 머리와 다리만 있는 몸으로 사는 느낌.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 거냐는 질문도 하지 마. 날 짜구 몰아내는 것 같아. 어디에서 사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


110.“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이야. 그렇게 다른 것들을 같은 조건으로 비교하면 고유한 것들이 묻혀버리고 말잖아.”


116.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본 것은 신문지를 꽉 움켜쥔 아버지의 두 주먹뿐. 묻지 않아도 될 것과 알지 않아도 될 것들 속에서도 삶은 충분히 완전체로 흘러갈 거였다.




<분홍에 대하여>


151.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의 말을 이해했어. 그도 나의 말을 이해했어. 우리는 서로의 말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었어. 그러니까 사랑이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 나는 그의 말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다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이해 못 할 말이 세상에 어딨느냐고 물을 거야.”

“돌을 쪼듯, 그는 내 맘에 꼭 드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골라 내게 말을 걸어주던 사람이었어.

“나를 ‘내 예쁜 빨강 눈 토끼새끼’, 그렇게 불러줬는데…….

“나는 그 말이 너무도 듣기 좋아 자주 들려달라고 자꾸 힝힝, 하면서…….

158.“입술도 점점 파리해지고 빛나던 눈동자도 빛을 잃었겠지. 묽어지다 희미해지다 결국 사라지는 것. 색깔을 잃어버리는 것. 사랑을 놓친다는 것은 그런 거였더라고.

“남편과 헤어지고 어디든 멀리 가고 싶었어. 다른 언어를 스는 곳이면 어디든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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